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47화 (147/458)

< 제 147화. >

추악한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고키부리 총리는 도대체 이 난관을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총리관저 밖 진을 치고 있는 외신들과 자국의 언론사들 때문에 퇴근도 미루고 총리실에서 담배만 뻑뻑 피워댈 뿐이었다.

“망신, 망신··· 개망신이 따로 없군.”

고키부리는 억울했다.

여태껏 자민당이라는 제1당이 총리의 자리에 장기 집권 하면서 항상 ‘치트키’처럼 사용해오던 혐한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의 차례에 이딴 식으로 반격이 나오는 것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나랏말이라면 떠받들 듯 모시고 사는 일본 노인층의 반발은 전혀 예상치 못한 그였다. 경찰이 찾아가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 차가운 경고를 했음에도 노파는 카메라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설쳤다.

과연, 현재의 일본이 자신이 알고 있는 일본이 맞나 절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철컥.

노크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고키부리.

“총리님.”

“그래, 유스케···”

“내각의 중진들이 모였습니다.”

“개 같은···”

대충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고키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법 당당한 모습으로 총리실을 벗어나 중진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 비어있는 상석에 앉은 고키부리.

“총리, 어쩌자고 일을 이리 벌이셨소?”

앉자마자 비수 같은 혓바닥이 날아들었다.

“나 좋자고 했겠소? 다 우리 당을 위한 게 아니요?”

“한 나라의 총리라는 자리가 신뢰를 잃었습니다! 이건 우리 당에도 실추에요!”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해결책을 제시해줄 중진들이 지금 대일본제국의 총리를 훈계라도 하고 싶은 겁니까!”

오히려 배짱으로 나가는 총리.

솔직히 그는 더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정치인은 신뢰를 잃는 순간 끝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비리’ 사건이었다면 유야무야 넘길 수 있었다. 비일비재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외교적으로도 문제가 될만한 발언을 했기 때문에 더 문제였다.

한마디로 국제적 거짓말이 문제란 얘기였다.

“툭 터놓고 말해, 위안부 문제부터 우리 일본이 어디 거짓말을 한 게 하루 이틀 일입니까?”

고키부리의 발언에 중진들이 입을 떡 벌렸다.

사실이지만, 금기시되는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기 때문이었다.

“세계대전 당시, 우리 선조들이, 우리의 아버지들이 할아버지들이! 패악을 부린게 한 두가지냐 이 말입니다! 바깥에 나가서 입을 열어볼까요? 마침 기다리고 있는 외신들과 자국 언론사에 내가 입 한번 열어요?”

되려 협박이 돌아오니 중진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유스케는 고키부리의 이런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머리를 조아리고 ‘살려달라’ 간청할 줄 알았었는데, 고키부리 총리의 반응은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곧 정신을 차린 유스케가 ‘과연, 저 자리를 빠칭코로 따낸 것은 아니구나’하는 생각과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크음···”

중진들이 불쾌하다는 것을 숨기지 못하고 헛기침등을 내뱉으며 총리에게서 눈을 돌렸다.

“말을 해보세요 말을!”

“자자, 총리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우리도 당황스러워 그런 게 아닙니까?”

“대책을 내놓으란 말입니다 대책을!”

“지금부터 의논해 봐야지, 이게 어디 내놓으라 한다고 내놓을 수 있는 일입니까?”

중진 중 대표 격인 자의 말에 총리가 크게 한숨을 내 쉬며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말했다.

“좋습니다. 나도 잠시 흥분한 것 같으니 사과드립니다. 천천히 우리 당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의논 해 봅시다.”

“그러시지요.”

중진 중 가장 젊어 보이는 인물이 고키부리에게 물었다.

“이번 성명문에 어디까지가 사실이 아닌지를 먼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총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굳이 몰라서 묻습니까?”

“일단 정확히 알아야 추후 터질 일도 방비할 게 아닙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은 없었소, 모두 혐한 우익들의 표심을 가져오기 위한 발언이었고, 야스쿠니 신사가 전소되며 진행하지 못한 참배 건까지 함께 그들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소.”

“야스쿠니 신사와 한국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어쨌든 2차 대전의 영웅들 아닙니까?”

“아아···”

“야스쿠니 신사가 전소된 것도 우리 대일본제국이 건방진 조센징들에게 당하고 있어, 영웅들이 억울함에 그랬다는 식으로 몰고 갈까 싶었소, 아직 대중은 그런 자극적인 미신을 신봉하는 게 아니겠소?”

중진들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유스케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썼다.

회의는 밤을 모르고 깊어졌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 총리관저를 벗어나기 어려웠기 때문도 있었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다.

“결국, 우리는 끝까지 혐한으로 몰고 가야 하지 않겠소? 모든 것은 한국의 수작이다. 천혁수와 SKY가 돈으로 일본인을 매수했다. 그런 식으로 말이오.”

총리의 말에 자민당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후우··· 천혁수와 SKY가 그랬다면 마땅한 명분이 필요할 게 아닙니까?”

“위안부 문제와 역사 바로 알기 따위의 문제로 우리 일본의 국격을 실추시키기 위함이라는 명분이면 충분하지 않겠소?”

“전 세계가 비웃을 겁니다. 게다가 위안부 문제나 역사왜곡 문제는 굳이 우리가 먼저 언급해서 득이 될게 없습니다. 조용조용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에요.”

고키부리가 얼굴 가득 비웃음을 걸고는 혀를 차더니 말했다.

“쯧, 이렇게 생각이 없어서야, 전 세계가 비웃는다고 뭐? 그들이 우리 밥줄을 쥐고 있소? 그들이 우리의 자리를 책임져주오? 결국 우리는 우리 대일본제국의 신민들이 책임져주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줘야 함이 옳지 않겠소? 또, 지금처럼 혐한과 혐일이 대립하고 있을 때, 그들이 불타오를 위안부 문제나 다케시마 문제를 얘기해줘야 여론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오!”

“언론통제를 벗어나려는 놈들이 과연 가만히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외신의 반응을 가져오려 할 겁니다.”

말이 없던 다른 중진이 말을 보탰다.

“요즘은 인터넷이라는 놈으로도 뉴스를 접할 수 있고 해외 소식도 접할 수 있습니다. 그것까지 막는 것은 불가능해요, 대중들은 자신들의 서브컬쳐까지 방해하면 들고 일어날 겁니다.”

“확실히··· 우리 일본인들은 제 밥그릇을 건드리면 그때야 난리를 부리죠.”

“언론은 내가 확실히 통제하겠습니다.”

“총리께서요?”

“예.”

총리가 유스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 사태를 제일 빠르게 보도한 언론사 명단 작성해서 올려, 감히 대일본제국의 명예를 더럽히다니 더러운 매국노 자식들.”

“예!”

유스케가 막 회의실 바깥으로 나가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다급하게 들어온 인물과 몸을 부딪쳤다.

“뭐야!”

“아앗, 죄, 죄송합니다! 총리께 긴히 보고드릴 것이 있어···”

제법 큰 목소리를 냈던 유스케, 덕분에 총리와 자민당 중진들의 고개가 절로 유스케를 향했다.

“무슨 보고?”

총리의 질문에 다급하게 들어왔던 여인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그, 그것이··· 아사쿠사가··· 아사쿠사가, 부, 불타고 있습니다.”

“뭐?”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수준의 화재라는 다급한 보고가···”

“이런 미친! 화재 메뉴얼은!”

“메뉴얼에 따라 대응하고 있으나 워낙 오래된 신사이기도 하고, 목조이기 때문에 전소에 가까운 피해가 예상된다고 합니다.”

“도대체가!”

***

새벽 1시.

세상이 조용한 시각.

평일이기에 더욱 조용한 밤거리를 내려다보며 시가를 입에 물었다.

곧, 철웅과 호석이 내가 있는 발코니로 나오고.

“사모님은 주무십니까?”

철웅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법 피곤했던 모양이에요 이렇게 오래 걷는 건 오랜만이겠죠.”

오늘 관광한다고 제법 많은 거리를 걸었다. 젊음의 거리라는 시부야부터 시작해 츠키지 시장까지.

재미라는 놈이 피로를 잊게 했겠지만, 마지막 시부야의 밤거리에서 츄하이와 하이볼 등의 알코올은 끝내 그녀들을 뻗게 만들기 충분했다.

“바퀴벌레는 뭘 하고 있답니까?”

“총리관저에서 자민당 중진들과 회의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 시간까지요?”

“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마 머리가 깨질 것 같을 테다.

엎친대 덮친 격.

잽에 이어 스트레이트, 그리고 곧 훅이 등장할 차례다.

“저기가 아사쿠사던가요?”

“예, 회장님.”

“어디 얼마나 대단한 불꽃놀이가 될까 구경이나 해 봅시다.”

철웅과 호석도 제법 편안한 자세로 발코니에 마련된 자리에 앉는다. 각자 취향에 맞는 시가를 입에 물고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본 음식은 너무 달고 짭니다. 쯧, 김치가 절실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회장님. 역시 한국인은 김치 아니겠습니까? 뜨끈한 국밥에 아삭한 섞박지 한 점이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내일 스텔라케미칼과 계약만 끝나면, 새벽 비행기로 바로 넘어갈까 싶습니다.”

“예, 회장님 스케쥴 잡아놓겠습니다.”

위스키에 안주 삼아 시가를 태우던 호석이 목을 쭉 빼더니 말했다.

“불꽃놀이 시작한 것 같습니다.”

확실히 아무것도 없던 어둠 속에 환한 주황빛이 보였다. 새벽이기에 연기까지 보이지는 않지만, 점점 빛의 밝기가 세지는 것으로 보아 잘 불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바라보며 시가를 태우기도 잠시, 어느새 시가 연기와는 다른 매캐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이 냄새면 바퀴벌레가 기겁하겠네요.”

내 말에 철웅과 호석 둘이 모두 피식하고는 웃는다.

“바퀴벌레 섬멸 작전, 제법 괜찮은 작전명 같습니다.”

이제 와서 아부하는 호석.

힐끗 그를 잠시 째려보고는 말했다.

“놈들은 아마 대가리가 깨지겠죠?”

“예,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좋네요, 이제 훅까지 정통으로 들어갔으니, 마지막 피니시 블로만 남았네요.”

호석과 철웅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바로 동영상 공개할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직은 한 번 더, 놈들이 변명을 늘어놓아야 합니다. 대충 뭐 예상은 됩니다만··· 아마 우리나라를 혹은 나와 할아버지를 저격하겠죠.”

철웅이 ‘아아’하고는 말한다.

“확실하게 정치인으로서 생명을 끊겠단 말씀이시군요.”

“예, 신뢰를 잃은 정치인은 더 이상 살아도 산 게 아니죠.”

이미 한번 신뢰를 잃은 고키부리.

그런 놈의 입에서 다시 한번 거짓말이 나온다면 더 이상 그를 신뢰하는 멍청한 일본인은 존재하지 않을 테다.

“그러니까, 내일 봅시다. 놈들은 아사쿠사까지 불탄 마당에 어쩔 수 없이 내일이면 급하게 성명을 발표할 테니까.”

“예, 시국이 시국인 만큼 급하게 성난 여론을 잠재우려 하겠죠.”

“정확합니다. 자! 냄새가 영 별로니, 이만 주무시죠.”

“예, 회장님.”

***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약속 장소에 우리를 따라붙은 일본 정보부의 눈은 없었다. 지금 저쪽도 저쪽 나름대로 난리가 났을 테니, 굳이 관광을 온 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테다.

처음엔 나와 찰리 박이 본사를 찾아갔으니, 이번에는 스텔라케미칼의 인물들이 우리가 있는 곳에 오는 것이 옳았다. 철웅이 우희와 루시를 데리고 관광을 나온 사이, 그들이 우리를 찾아 호텔에 도착했다.

굳이 그들을 내가 머무는 펜트하우스로 부르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백발의 노신사와 함께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는 토리야마 세이토.

“다시 뵙습니다. 천우진 회장님 여기는 저의 아버지이시자, 스텔라케미칼의 회장님 토리야마 류이치님 입니다.”

나는 노신사에게 악수를 건네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회장님, SKY의 천우진입니다.”

“류이치요.”

존장에 대한 예우로, 그가 먼저 자리에 앉고 우리가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많지 않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들놈에게 얘기는 들었습니다.”

“2천억엔, 스텔라케미칼을 인수하겠습니다.”

“후우··· 스텔라케미칼은 내게 값을 넘는 무엇인가가 있소이다.”

“지금의 직원들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며, 회장님의 경영철학을 적극 수용할 생각입니다. 스텔라케미칼은 SKY반도체에 편입될 것입니다.”

“계열사 같은 느낌이 될 것이란 말입니까?”

“예, 독자적인 경영은 인정하겠습니다.”

“그곳에 내 자리는 없겠지요?”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쉬실 때가 되셨습니다. 아드님을 믿어주시지요.”

“우리 회사를 넘기지 않으면··· 경쟁사를 모두 사겠다고 얘기했다 들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SKY에겐 그럴 재력이 충분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중견기업은 비교할 수 없는 자금력이 있겠지요.”

“2천억엔은 현재 토리야마 가문의 지분 가치의 4배 정도의 금액입니다.”

“인정합니다··· 아쉬워서 그럴 뿐입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는 것을··· 이 노인네는 인정하지 못할 뿐입니다.”

“스텔라케미칼은, 우리 SKY와 함께, 세계 불화수소 시장 최선두의 자리를 달릴 것입니다. 토리야마 가문의 명예는 반드시 지켜질 겁니다. 그러니 아쉬움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내 회사를 사가실 모양이오.”

“예.”

“졌습니다··· 늙으니 보이는 것들이 있소, 이제 나는 싸울 힘이 없구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임 없이 뒤돌아 호텔을 벗어나고, 세이토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다 굳게 다짐하는 표정으로 지분양도계약서를 내밀었다.

이미 계약서에는 지분을 가지고 있는 토리야마 가문 사람들의 도장이 찍혀있는 상태.

“사전에 얘기가 잘 풀렸던 모양입니다.”

“예, SKY와 싸운, 한국의 공룡들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우리도 눈이 있으니 지켜봐 왔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예, 경영은 문제없이 할 테니, 고용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러죠, SKY와 차별 없는 대우를 약속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여기 찰리 박 대표와 진행하십시오, 나는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예, 들어가십시오 회장님.”

얘기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압도적인 금력은 이래서 편하다.

그리고 여태껏 보여주었던 SKY의 행보가 도움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와 싸웠던 대표적인 공룡은 삼현, 타타다우 정도가 될 터.

그리고 그들의 창업주, 혹은 재벌가의 말로가 어땠는지 보았다면, 토리야마 가의 선택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회장님, 오후 2시. 고키부리총리가 성명 발표를 예고했습니다.”

“결정타를 날릴 시간이 됐군요.”

“예.”

“성명 내용 보고, 바로 진행하죠.”

“예! 회장님.”

아마 오늘을 끝으로.

어쩌면 며칠 정도는 더 그 알량한 총리 자리에 앉아 있을 고키부리. 그의 끝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 제 147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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