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45화. >
프랑스 보르도의 야심한 밤.
로스차일드 가문의 원로회가 소집되었다.
보르도 지방의 가장 유명한 호텔이라지만, 그들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 말고는 마땅히 그들이 모일 장소가 없었다. 그들의 안식처이자,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보르도 지방 저택이 불타 잿더미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로스차일드가 앉아있는 원로회의 면면을 살피며 말했다.
“지금 이곳에 앉아계신 분들 빼고는, 절대로 우리의 지하 저장고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방화범들은 정확히 우리 저장고를 노리고 침입했습니다.”
““······””
“나는 반드시, 그 저장고를 침입한 놈들과 이곳 원로회와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분명히 이 중에 누군가는 입을 가볍게 놀렸음이 분명합니다.”
“가주, 언사가 지나칩니다.”
윌리엄이 고개를 저었다.
“꾸짖고 훈계하자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당장 잊어버린 우리의 재산을 되찾자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과연 누가 우리 로스차일드를 노리느냐 그것도 경계해야 함이 옳습니다. 그러니 원로회 중, 바깥에 혹은 알아서는 안 될 누군가에게 지하 저장고에 대해 얘기를 했다면 밝혀주시기를 부탁합니다.”
““······””
누구 하나 대답하는 이가 없었지만, 윌리엄은 예상했는지 테이블을 탁! 하고는 세게 치며 말했다.
“프랑스 정보총국, 영국의 MI6, 독일의 연방 정보원, 이스라엘 모사드, 미국의 CIA를 동원해 찾고 있습니다. 그들을 찾고 나서 감히 우리 저장고를 탐낸 인물에게 이곳 원로회 인물의 이름이 흘러나온다면··· 목숨은 물론 가진바 자산을 몰수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지금 얘기하세요, 최대한 시간을 줄이기 위함임을 명심해주십시오.”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살벌한 말을 내뱉은 윌리엄 로스차일드.
그의 말에 몇몇 원로회의 인물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윌리엄은 빠짐없이 살폈다.
“각국의 정보부가 무능한 놈들이 아니라면,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함구하겠습니까? 사소한 것도 좋습니다. 외부에 발설한 적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씀하세요, 그래야 우리가 더 빨리 놈들을 찾을 게 아닙니까? 벌써 우리 저장고가 털린지도 5일이 지나갑니다!”
““······””
여전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점잖게 눈을 감고 있던 백발의 노인이 눈을 뜨며 윌리엄을 똑바로 바라보곤 물었다.
“그러는 가주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것이 맞습니까?”
“당연합니다! 이것은 원로회의 규칙이 아닙니까?”
“후계자에게도 말하지 않았소?”
윌리엄은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의 머릿속에 ‘설마’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자기 아들 로이드 로스차일드 역시 저장고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규모인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저장고를 다녀올 때면 항상 아들에게 ‘저장고’를 다녀오겠노라 말해줬었다.
“가주의 아들 로이드의 평판이 우리 가문 내에서도 좋지 않음을 알고 계실게요, 만약 가주께서 로이드에게 저장고에 대하여 언급했다면··· 나는 그곳에서부터 이 일이 시작되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순식간에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윌리엄이 대답을 망설이는 순간, 모든 원로가 날카로운 눈으로 윌리엄을 쏘아보았기 때문이었다.
“크음··· 로이드가 그리 멍청한 아이가 아닙니다.”
“먼저, 가주의 후계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소? 나는 나의 자식들에게도 저장고에 대하여 발설하지 않았소, 저장고의 출입은 오직 가주께서만 가능한 일이니, 괜히 아이들에게 ‘욕심’을 키워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오.”
노인의 말에 원로회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같은 로스차일드라는 성을 쓰면서도 자산의 규모나 그 크기가 제각각인 로스차일드 가문이었다.
그러니 ‘가주’에 대한 욕심과 열망이 있는 아이들 역시 제법 많았다.
부의 상징이라 불리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가주’의 자격은 ‘자산’으로 결정된다. 현 윌리엄 로스차일드의 아비도, 그리고 그 아비도.
그 어떤 가문의 일원보다 항상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감히 가주의 자리를 넘보기 힘든 그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장고’라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보고는 새로운 ‘가주’의 탄생이라는 헛된 희망에 불씨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숨기고 숨겼다.
그래야만, 현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지될 수 있으리라 원로회는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가문이라지만. 한 ‘가정’만 떼 놓고 본다면 결코 ‘정부’와 대립할 수 없는 약한 존재였다. 그러니 그들은 ‘정부’ 혹은 어떤 한 ‘국가’와 대립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필요했고, 그 힘 때문에 아직도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원로회의 뜻이 그렇다고 하니, 저도 확인을 해 보지요··· 원로회 내부에서도 따로 더 확인한 뒤, 다시 원로회를 열겠습니다.”
노인들이 하나둘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프랑스 내부에서는 최대한 장물아비들을 털어보겠소, 혹··· 우리 가문의 보물이 나올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원로회가 모두 떠나고.
꼬냑을 벌컥벌컥 들이킨 윌리엄이 전화기를 꺼내 자기 아들 로이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아버지.
“하나만 묻자.”
-예, 말씀하십시오.
“너, 우리 가문의 지하 저장고에 관한 얘기 기억하고 있더냐?”
-그럼요, 잊지 않고 있습니다.
“혹, 그 얘기를 바깥에서 한 적이 있더냐?”
-······
“왜 대답이 없지?”
윌리엄은 대답을 재촉하면서도 제발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그게···
“이 멍청한 자식이! 내가 저장고를 얘기하면서 바깥에서는 절대 함구하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며, 몇 번 술 취해서.
“한 번도 아니고 몇 번! 몇 번! 네놈이다··· 네놈이 우리 가문을 망하게 할 놈이구나··· 덕분이 이 애비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어···”
-그래도 우리 가문의 최측근들만 아는 얘기입니다. 아버지! 절대 바깥에서 얘기하지는 않았어요.
“멍청한 놈! 우리 핏줄이 아니라면 소용없다는 걸 모른다고? 그들과 우리는 고용인, 고용주의 관계일 뿐이야! 이 머저리 같은 놈··· 내가 돌아갈 때까지 집구석에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마라! 근신이야, 근신!”
-아, 아버지!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닥치고 말 들어 죽여버리기 전에.”
-··· 예.
쾅.
전화기를 부술 듯 테이블에 내려친 윌리엄은 온종일 꼬냑을 연거푸 들이켰다.
***
오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펜트하우스의 발코니에서 한가롭게 위스키와 시가를 즐겼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 TV속에는 고키부리 총리의 모습이 여러 번 재생되었다.
“저놈 발등에 불 좀 떨어졌겠습니다.”
내 말에 정호석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돈값은 한 것 같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찰리 박에게 물었다.
“우리 할아버지의 기자회견 내용을 방송해주는 대가로 얼마를 주셨다고요?”
“5억엔을 줬습니다.”
“뉴스 한 번에 50억, 많이도 처먹었군요.”
“워낙 언론통제가 심한 나라라 그 정도가 아니고는 사장 놈은 꿈쩍하지 않을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50억도 솔직히 싸게 먹힌 편이었다. 이유는 별것 아니다. 아직 우리 할아버지의 말 어떤 것도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었다. 고키부리 총리 그놈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아니다’하면 ‘아닌게’되어버릴 수준의 뉴스였다.
그리고 난 그걸 바라고 있었다.
놈이 죽을 둥 살 둥 억울하다며 발악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다음 시나리오를 진행했을 때 파급력이 크기 때문이었다.
“마킹은 제대로 되고 있나요?”
“예, 지금 막 고키부리 총리가 풍속주점을 벗어났다고 합니다.”
“이 시국에도 그짓거리가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주 3회이상, 잠자리를 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다고 들었습니다.”
“고키부리 그놈 나이가 몇이라고 했죠?”
“올해 한국나이로 예순 둘입니다.”
“그 나이에 그 어린 아가씨들이랑?”
“예.”
“일본이나 한국이나, 에휴 미친놈들.”
정호석과 찰리 박이 입술을 짓씹는다. 웃음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왜요?”
찰리 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회장님 말씀이 꼭··· 천혁수 장관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그럽니다.”
“내가요?”
정호석이 살을 붙인다.
“예, 꼭 말씀하시는 게··· 70대 노인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이.
전 삶을 다 합쳐도 아직 70년은 산 적이 없었다.
어쨌든 너무 나이 들어 보이게 얘기했나보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조심할 필요도 있지 싶었다. 이렇게 정호석이나 찰리 박처럼 젊은 사람들과 있는 것 보다, 할아버지나 대비 할아버지처럼 연배가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더 재미있으니까 말이다.
“스텔라케미칼 미팅은 언제입니까?”
“모레 오후 3시입니다.”
“그 안에 확답을 주겠답니까?”
“어떻게든 회장을 설득해보겠다는 사장의 얘기가 있었습니다.”
“스텔라케미칼 인수 끝나고, 바로 나머지 회사들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게 준비해주세요.”
“예, 회장님.”
정호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은 우희, 루시랑 늘어지게 관광이나 해야겠네요, 코스 좀 알아봐 주세요 대표님.”
“예, 회장님.”
***
다음날 오전 10시.
고키부리는 잠을 설친 것 같은 모습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눈에 봐도 그의 몰골은 매우 피곤한 사람처럼 보였다.
“국민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총리 고키부리입니다. 어제 뉴스가 보도되고 한시도 자지 않고 상황 파악에 총력을 기울인바, 한국의 천혁수 장관의 기자회견 내용은 모두 사실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기자들이 바쁘게 셔터를 눌렀다.
누가 들어도 특종이라 할 만했다.
제법 공신력 있는 언론에서 비중 있게 다룬 한국의 장관 기자회견. 그러나 현 내각에서 그것도 총리의 입을 통해 완벽한 반박이 시작되니 이것은 틀림없는 특종이었다.
“오사카 초교 난입 사건의 범인은 지난날, 오사카 경시청의 발표처럼 일본 국적의 한국인이 벌인 일이 맞습니다. 또한, 우리 일본의 공권력이 고작 한국의 작은 기업가에게 닿았을 리 없음을 국민 여러분께서는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어찌 하나의 국가가 한 명의 기업인에게 정보기관을 통해 ‘감시’의 업무를 시키겠습니까? 이는 지나친 억측이며 한국 내 혐일 감정을 부추기는 행위로 보여지는바, 우리 일본은 한국에게 정식으로 항의 할 생각입니다.”
고키부리가 얼굴 가득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한국 정치인이 혐일 감정을 부추기고, 단순 표심을 얻기 위한 정치적 발언으로 우리 일본의 국격을 실추시키고! 심각한 외교적 결례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그가, 과연 장관의 자질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
***
조식을 먹는 둥 마는 둥.
다시 방으로 올라와 고키부리의 기자회견을 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휴대폰을 찾았다. 눈치 빠른 정호석이 어느새 저 멀리 어딘가에서 굴러다니던 내 휴대폰을 찾아와 내게 건넸다.
-흐흐, 전화 받았습니다.
“김 사장님, 뉴스 보셨죠?”
-예, 인자 막, 보던 참이었습니다. 아따 저 바퀴벌레 총리 놈, 강을 건너부렀네요잉.
“미야자키인가? 그놈 모친 준비됐죠?”
-예진즉에 오사카 경시청 인근의 호텔에서 삐대고 있었습니다.
“좋네요, 오늘 오후 안에 터트릴 수 있죠?”
-알겄습니다. 제대로 터트려 불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뭐, 제대로까지 하실 필요는 없고, 미야자키가 확실히 ‘일본인’이다만 각인시켜주면 됩니다.”
-옙! 알겄습니다. 벌써 미야자키의 노친네는 돈도 썼습니다. 인자 빼도 박도 못한다 그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일 끝나고 잠깐 놀다 오셔도 됩니다. 한 며칠은 내가 더 머물거라, 찰리 박 경호는 신경 안쓰셔도 돼요.”
-흐흐, 알겄습니다. 그랴도 가기 전에 한잔하셔야죠?
“하하, 알겠습니다. 일본 떠나기 전날 올라오세요.”
-예, 맞춰 가겄습니다.
김장원과 전화를 끊고 정호석을 바라보았다.
“동영상, 풀까요?”
척하면 척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니요, 일단은 고키부리놈 반응 봐서 하죠, 한방에 터뜨리면 임팩트가 약합니다. 일반인들은 빠르게 불타오르고, 빠르게 식는 법이죠.”
“회장님은 그들이 계속 불타오르길 바라시고요?”
“뭘, 다 아시면서 묻고 그러세요?”
“하하하, 그럼 이번 작전은 불빠따 시즌 3쯤 되겠습니다?”
나는 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우 구려, 작전 이름이 그게 뭐예요?”
정호석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예? 이재형에게는 불빠따 시즌 2라고···”
“언제요? 기억 안 나는데요?”
“아니···”
“이번 작전은 바퀴벌레 섬멸 작전이라고 하죠.”
정호석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들은 척도 하지 않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발코니를 벗어났다.
“크음, 이번에도 별론가.”
< 제 145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