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41화 (141/458)

< 제 141화. >

조직이라는 놈, 회사라는 놈의 생리가 그렇다.

상명하복이 있고 ‘책임소재’ 때문에 최고경영자가 아니라면 쉽게 어떤 선택을 하기가 어렵다. 보고 체계가 있고 그것을 따라 시간을 허비하다 보면 좋은 때를 놓치기 마련이다.

특히나 기업 인수 즉, M&A를 하는데는 더욱 1분 1초가 급박하게 흐르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때마다 ‘누구님 이렇다는데 어떻게 할깝쇼?’하고 묻는다면 적기를 놓치기 쉽다.

물론, 찰리 박이 그렇게 우둔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들, 저번 찰리 박이 굳이 내게 전화해 김장원의 힘을 빌리겠다 한 것처럼, 또 그런 상황, 책임자의 선택과 결정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올 수 있었다. 시간을 허비하기 싫은 내가 직접 일본을 찾아온 이유였다.

“얼른 끝내고, 찰리 대표는 이제 미국으로 가야죠? 아직 미국에서 인수할 기업이 많습니다.”

강기태 투자총괄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테다. 이런 와중에 본격적으로 부쉬와 함께 대비 할아버지, 체이스와 삭스가 움직인다면 나는 몸을 빼기 어렵다 느낄 정도로 바빠질 테다. 로스차일드라는 놈은 그만큼 덩치가 크니 제대로 상대해야 할 놈이란 뜻이다.

찰리 박이 부드럽게 웃던 얼굴에서 날카롭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끼이익.

마침 나리타 공항에서 출발했던 차량이 특급 호텔 앞에 멈춰 서고, 우리는 펜트하우스 회의실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각자의 입에 저마다 기호에 맞는 구름과자들이 물려 있었다. 아직은 제법 흔한 그림이니 어색한 부분은 없었다.

짤그락.

온더락 위스키 한 잔을 마시며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모리타에 최대 걸림돌은 무엇입니까?”

찰리 박이 서류에 있던 사진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이치로 모리타, 창업주의 아들이자 현재 최고경영자의 위치에 있는 인물입니다.”

“얼굴부터 고집이 있어 보이네요.”

“예, 그의 고집이 최대의 난제입니다.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지만 포기할 줄 모릅니다. 집안의 가산을 끌어다 쓰면서도 우직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확실히.

전 삶에서 모리타 화학공업은 그 고집과 우직한 뚝심으로 불화수소 소재 부분에서 정상을 찍었던 기업이었다. 오랜 경영난으로 단독주택에 살던 경영주 일가는 단칸방으로 집을 옮기면서까지 지켜낸 기업이었다.

그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바보다’, ‘미련하다’란 평가도 받는 인물이었다. 끝내 모리타는 한 분야에서 정상을 찍지만, 대체재가 없냐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당장 같은 일본 내에서도 스텔라, 쇼와라는 기라성같은 기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즉에 모리타는 그들과 합병하거나 매각했다면 오히려 일본의 소재산업 발전에 이바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어쨌든, 오이치로 모리타는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뚝심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뚝심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던 찰리 박은 김장원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계획했던 것은, 납치라고 했던가요?”

민망했는지 찰리 박이 김장원과 정호석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크음, 예. 그랬습니다. 그가 잠시 ‘실종’된 상태라면 이사진들의 협의를 통해 충분히 인수 절차를 끝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습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치졸한 수였다.

“경영권을 그에게 주고 회사 자체만 가져오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나요?”

“그것 역시 대화를 나눠 봤지만, 그는 믿지 않았습니다. 단순하게 ‘한국’ 기업은 믿을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흠, 극우파였던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우파 성향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창업주의 경우 전쟁에 깊지는 않지만 관여한 정황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한국을 신뢰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무시’ 한다는 쪽이 더 설득력 있겠군요.”

“예, 그래 보였습니다.”

모리타 화학이 가지고 있는 부채는 약 420억원으로 그렇게 대단한 규모는 아니었다. 물론 현재 모리타 화학의 규모 역시 대단치 못했기에, 상대적으로 부채가 회사의 가치 대비 63퍼센트에 육박하고 있었다.

“여기 보면 스텔라가 모리타에 많은 자금을 집어넣었군요?”

“예, 현 최고경영자 외에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스텔라입니다.”

“놈들도 불화수소 제조법을 노리는 모양이군요.”

“그 부분이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오이치로가 버티는 이유는 돈 나올 구멍이 있기 때문이었죠.”

“여차하면 지분을 더 주더라도 돈을 가져오겠다?”

“예, 물론 경영권이 흔들릴 것을 대비해 우선 가산을 먼저 끌어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궁지에 몰린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찰리 박의 의견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우리가 오이치로를 압박하게 된다면 결국 돈이 필요한 그는 타인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을 터, 지분이 스텔라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닭 쫓던 개처럼 지붕을 올려다봐야 할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스텔라케미칼 지배구조, 재무제표 준비됐죠?”

“예.”

찰리 박이 준 서류를 살피니 확실히 아직은 중견기업 정도의 수준이었다. 중견기업이 중소기업을 먹으려고 준비 중인 단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황이었다.

“기업 가치가 대충 자투리 빼고 3400억쯤이네요.”

“예, 그렇습니다.”

이제 확실히 문제점을 깨달았다.

우리 일 잘하는 찰리 박은 처음부터 너무 보수적으로 접근했다. 현재 일본에서 내가 인수하려는 기업들이 미래에 어떤 가치를 가진 놈으로 탈바꿈되는지 전혀 모르니 보수적으로만 본 것이다.

현재의 가치, 그리고 성장 가능성, 부채의 규모 등으로 추산한 ‘적정가’가 찰리 박의 머리에는 들어 있을 테다. 그 가격이 쓸모없다는 것이 아니다. 현재로서는 찰리 박의 계산이 누구보다 정확하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은 그만큼 유능한 사람이란 것을 절대 부정할 수 없으니까.

“모리타도, 스텔라도 어차피 담아야 했을 계란입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적정가를 너무 작게 잡으셨던 모양이네요, 그러니 그들이 흔들리지 않았겠죠.”

그의 잘못이 아니다. 여태껏 그는 자신의 원칙과 철저한 계산으로 SKY인베스트먼트에 천문학적인 이득을 쥐여주고 있었다. 미래의 불투명성을 생각한다면, 미래의 일을 아무도 모른다고 가정한다면 그가 옳다. 그의 방식이 정답에 가깝다.

그러나 그의 앞에 앉은 나는, 그가 내민 답안지가 단호하게 ‘오답’이라고 외칠 수 있었다. 스텔라라는 기업의 현재가치 3400억, 나는 그것의 두배, 세배를 주더라도 그 기업을 살 생각이 있으니까.

“돈으로 패면 되겠네요.”

“예?”

뜬금없었을까? 찰리 박이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돈으로 패면 된다고요, 너무 적게 불렀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입을 떡 벌리는 찰리 박.

“플렉스라는 말 알죠?”

“예,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플렉스 좀 하고 갑시다. 돈도 많은데.”

찰리 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얼마나 사용하시려고···”

“아 프랑스에서 현금자산만 대충 6조쯤 가져왔거든요? 그거 3분의 1만 써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김장원이 입을 떡 벌렸다.

찰리 박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정호석은 찰리 박의 눈빛에 어깨를 으쓱인다. 나는 피식 웃으며 김장원을 바라보곤 말했다.

“쓸 땐 쓸 줄 알아야 남자 아닙니까?”

“아따··· 고거슨 맞는디, 워메 6조요? 워따 워츠케 생겼는지 감도 안 잡혀부네잉··· 그, 이건인지 지랄인지 하는 넘 비밀 금고에서 수십, 수백억을 보고 놀라 뒤지는 줄 알았는디···”

다시 찰리 박을 바라보고 말했다.

“미팅 잡으세요, 순식간에 헤치웁시다.”

“예, 회장님.”

***

일본 총리 관저.

고키부리 총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록펠러 가문의 전용기가 나리타에 착륙했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 록펠러가 내가 아는 록펠러가 맞겠지?”

“그렇습니다.”

“일본에 온 이유는?”

“입국자는 록펠러가 아닌, 루이지나 록펠러 천, 천우진, 천우희 외 그들의 수행원이었습니다.”

“루이지나 록펠러 천?”

“록펠러 가문의 손녀가 한국의 SKY그룹의 경영자 천우진과 결혼했습니다.”

“미친, 고작 한국 놈에게 시집을 갔어?”

“예 그렇습니다. 결혼한 지 1년이 조금 안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던 고키부리가 날카롭게 쏘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놈의 목적은?”

“입국심사에서는 관광이라 했습니다만, 그 정도 되는 인물이 관광을 왔을리는 없고, 아마도 ‘동상’ 관련된 일 처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고키부리의 인상이 단숨에 구겨졌다.

“칙쇼, 듣기 싫은 소리를 꺼내는군.”

“죄송합니다.”

“감히 조센징들이 우리 대일본제국의 땅을 더럽히려 든다? 막아! 어떻게든 막아!”

“······”

“왜 대답이 없나 유스케!”

“오사카 초교 난입 테러 이후부터, 신사 화재까지, 현재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총리님.”

“그러니 조센징들을 막아야 할 게 아닌가?”

“오사카 경시청으로 요즘도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교포가 아닌데 어째서 한국인으로 위장시켰냐는 항의 전화입니다.”

“쯧, 무시하라고 해. 여태껏 잘 하던 일이 아닌가?”

유스케는 답답한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요즘에는 ‘인터넷’이라는 것 때문에 언론 통제가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총리님.”

“쯧쯧, 하여튼 세상이 좋아지면 정치하기가 힘들다니까?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조센징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어, 알겠나?”

“··· 예.”

***

다음날.

여자들이 밤 늦게까지 바깥에서 놀고 와 숙취에 시달리는 것 같아, 우리 일행은 그녀들의 단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룸서비스가 아닌 호텔 레스토랑 안에서 조식을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의 조식은 제법 훌륭한 편이었다. 시소와 같이 입에 안 맞는 것들이 가끔 있지만 그래도 위에 부담을 덜 주는 음식들이 상당히 많았다.

물론, 나는 한식 파다.

아침은 든든한 들깨 미역국이나 뜨뜻한 누룽지에 젓갈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후르릅.”

미소 된장국을 한 숟가락 퍼 올리는데 정호석이 굳은 얼굴로 내 맞은편에 앉는다.

“6시 방향 골프복 입은 사내, 정보부 요원으로 판단됩니다.”

나는 슬쩍 호석의 어깨너머로 그가 말한 골프복 사내를 살폈다. 확실히 우리 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음이 느껴졌다.

“9시 방향 젊은 커플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붙었습니까?”

“현재까지 파악된 인원은 총 4명입니다.”

“바퀴벌레 같은 총리 놈이 뭔가 냄새를 맡은 모양이네요.”

“예, 현재로서는 ‘감시’의 목적이 분명해 보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공격 따위는 생각하지 않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호석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단 놈들이 오늘부터 붙었다면, 아직 김장원 사장은 노출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겠네요, 그는 다른 쪽으로 돌리세요, 가이드 쪽으로 위장하거나.”

“예, 회장님.”

“치졸한 수법을 쓰는 놈들이니, 호텔 측에서 방을 청소하거든 카메라나 도청 장치도 체크하시고요.”

“물론입니다.”

“그럼 라멘 한 그릇 부탁드립니다.”

“예,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김장원을 만나러 일어나는 정호석을 확인하고는 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래, 일본엔 잘 도착했더냐?

“예, 할아버지는 뭐하고 계세요?”

-평일이니 공무원이 뭘 하겠더냐? 일해야지.”

“대비 할아버지는요?”

-사돈이야 잘~ 놀고 계시겠지.

어째서인지 약간의 비꼼이 느껴졌지만, 용건은 그게 아니니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일본 쪽에서 냄새를 맡았지 싶네요.”

-무슨 냄새?

“위험한 냄새가 아닐까요? 일단 제가 왔으니까요.”

-으음, 대충 ‘동상’이나 오사카 초교 난입 사건 언급 등의 문제로 긴장 했을 테지.

“예, 그래서 말인데요 할아버지.”

-또 일을 시키려고? 이놈이 이제 아주 할애비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드는구나.

역시 눈치가 귀신이다.

“에이, 손자가 의지할 사람이 할아버지 말고 또 있나요?”

-네 처조부를 시키거라, 이 할애비는 오늘도 공사가 다망하니.

“언론 플레이도 슬슬 시작하셔야죠? 우유 복지 단물 이제 빠질 때도 됐잖아요? 벌써 두어 달 지났는데.”

-크음···

“한국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일본 놈들이 잘난 척 하고, 우리 한국을 무시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신사가 불탄 이후로는 잠잠하다만.

“여태껏 정치인 중에, 일본에 선빵 날린 정치인 있습니까?”

전화기 너머 생각하시는 중인지 대답이 없는 할아버지.

“제가 알기로는 그런 정치인 본 적이 없거든요? 할아버지가 최초 하시죠.”

-이놈아, 무슨 복지부 장관이 자꾸 외교 문제를 건드리느냐?

“소신 발언이란 게 있잖습니까? 소신 발언.”

-어떤 미친놈이 소신 발언은 먼저 기자들 불러 놓고 한다더냐? 물어보면 답하는 거지.

“그렇게 그림 만들면 되겠네요, ‘봉사 활동 중인 천혁수 장관,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다.’ 캬~ 헤드라인 기가 막히네.”

보이지 않지만.

할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것이 상상돼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굳이 시끄럽게 만드는 이유는?

“제가 좀 처리할 일이 있는데, 일본이 제게 감시를 붙였네요, 회사 몇 개 쇼핑할 건데 정부가 붙으면 좀 힘들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경계하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은 다르니까요.”

-쯧, 알아들었다. 어차피 동상 설립 문제로 시끄럽게 해야 할 상황이었어, 역사 바로 알리기 재단에도 벌써 400억이 넘게 쌓였다더구나.

“아아, 기업들이 제법 후원해 줬네요.”

-총리 놈이 감히 네 앞길에 신경 쓰지 못하도록, 어지럽게 만들어줘라 이 말이겠지?

역시 척하면 척이다.

“옙, 그리고 은근슬쩍 ‘소문’도 언급해주세요.”

-아아, 그때 말했던 그 소문? 고키부리 그 바퀴벌레 놈이 총리가 되고 나서 일본에 망조가 깃들었다고?

“예, 그런 항간의 소문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는 식의 뉘앙스요.”

-오냐, 해 보마. 근데 소문은 언제나 소문으로 끝나는 법이야.

“소문을 실제로 만들어 줘야죠.”

-쓸데없는 피는 삼가거라.

“예, 피 말고 잿더미로 가겠습니다. 이번 작전명은 음··· 불빠따 시즌 2?”

-끊자, 통화료 아깝구나.

“또 별로···”

말도 끝나기 전에 끊어버린 할아버지.

불빠따라는 작전명이 그렇게 싫으셨을까? 난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한 것 같은데 말이다.

< 제 141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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