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39화. >
모든 일 처리를 끝내고 나는 다시 프랑스 파리로 날아왔다.
“허니!”
굳이 괜찮다고 얘기했는데도 공항으로 마중 나온 우희와 루시.
“에이, 놀고 있으라니까 뭐 하러 왔어.”
“보고 싶어서?”
“우희는 잘 놀고 있었어?”
“응, 오빠 패션의 도시라더니 루시 언니한테 진짜 많이 배웠어.”
확실히 루시와 우희는 길가는 어떤 사람보다 태가 다른 옷들을 입고 있었다. 루시는 파리를 좋아했다. 아무래도 패션 관련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우희도 마찬가지였다. 해외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설레는 일인데, 그 해외여행이 생에 처음이라면 더욱 설렐 테니까.
“프랑스는 좀 질리지 않아?”
눈치가 빠른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뭐야? 벌써 다른 나라로 가는 거야?”
다른 나라로 간다는 말에 우희가 기대 반, 설렘 반을 가지고 날 바라본다.
“일본 어때?”
“일본?”
루시가 혀를 삐쭉 내밀며 말한다.
“우진, 또 일하는구나?”
우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 동상문제 때문이야?”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이제 빵 먹기 좀, 질리잖아?”
피식 웃는 우희와 루시.
실제로 빵을 많이 먹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패션의 도시로도 유명하지만, 미식의 도시로도 유명하기 때문이었다. 빵 보다는 온갖 진귀한 요리들로 매 끼니를 먹던 우리였으니, 내 말은 그저 핑계에 불과할 뿐이었다.
루시가 내 팔에 매달리듯 끌어안으며 묻는다.
“일본 어디?”
“일단은 난 도쿄부터 가야 돼, 루시랑 우희는 가고 싶은 곳 어디든?”
“오! 도쿄 투어 좋다!”
루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우희를 바라보았다.
“우희도 좋아?”
“응, 언니랑 오빠랑 같이 가는 거니까.”
“일 때문에 나는 잠깐씩 떨어져 있는 날이 있을 거야.”
“그것도 괜찮아.”
“그럼 다행이고. 보자··· 전용기가 한 13시간 뒤면 공항에 도착할 테니까, 마지막 13시간 보람차게 보내볼까?”
“응!”
“좋아!”
***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던 윌리엄 마이드 로스차일드. 현 로스차일드가의 가주가 눈을 부릅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비서 세바스찬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입술을 꾹 깨물었던 세바스찬이 얼굴 가득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별장 부지를 포함한 포도밭 부지 대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
“100만평이 넘는 부지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다고?”
“예.”
“화재가 아니군.”
로스차일드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세바스찬.
자연적인 화재가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넓은 부지에 순식간에 화재가 발생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미친놈들이 작정하고 불을 질렀단 소린데··· 조사 결과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으며, 지금도 곳곳에서 불길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쯧, 샤또 마고의 포도주는 이번년도에는 글렀군.”
어마어마한 부지의 포도가 사라졌지만 로스차일드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손실을 보았지만 괜찮다는 태도였다.
“별장의 사용인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정체불명의 무장단체가 순식간에 경비들을 제압하고 자신들도 제압했다고 전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별장의 지하 와인저장고였다고 합니다.”
조금 짜증은 났지만, 크게 화를 내거나 당황하지 않던 로스차일드의 표정이 일변했다.
왼쪽 볼과 눈 밑이 부르르 떨리는 얼굴로 세바스찬에게 물었다.
“와인 저장고를 노렸다고?”
“예, 무장단체가 떠나고 와인저장고에 사용인들이 도착했을 때는 가주께서 아끼시던 샤토 무통 와인이 사라진 상태였다고 합니다.”
쾅!
앉아있던 테이블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선 로스차일드.
“당장 전용기 불러! 보르도로 간다.”
크게 놀란 세바스찬.
“내일 상원의원과 미팅이 있습니다.”
“닥치고 전용기 불러, 약속은 취소야.”
심상치 않은 로스차일드의 분위기에 세바스찬은 ‘예’하고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제기랄! 제기랄!”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고급스러운 집기들이 이리저리 나부낀다. 이성을 잃은 로스차일드는 제 손에 피가 흐르는 것도 잊었는지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안돼! 안돼! 어떤 미친 새끼들이!”
피가 뚝뚝 흐르는 손으로 다급하게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 올린 로스차일드.
-가주, 어떻게 전화를 다···
“국장, 꼭 찾아야 할 놈들이 있소.”
-예?
“후우, 꼭 찾아야 할 놈들이 있다고 말했소.”
-어떤 놈들입니까?
“내 것을 훔쳐 간 놈.”
-흐음, 우선 알겠습니다. 잠시 진정하시고 차근히 풀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듣기로는 뉴스에도 보도되었다고 하던데, 보르도 지방의 포도밭이 화재로 불탔다는 뉴스는 확인했소?”
-아, 봤습니다.
로스차일드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까드득, 그 포도밭이 내 것이오, 우리 가문의 오랜 역사가 잠들어 있는.”
-이런, 그놈들을 찾아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알겠습니다. 우선 우리 프랑스 지부를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따로 나서죠, 우리 CIA의 정보망을 벗어날 놈들은 없습니다.
“꼭 찾으셔야 하오, 만약 놈들을 찾는다면··· 국장의 여생은 내가 보장하겠소.”
로스차일드의 말에 수화기 너머 CIA국장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 반드시 찾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믿겠소.”
***
같은시각.
제 아비가 얼마나 뭣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로이드 로스차일드는 젊은 여자들과 함께 풀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헤이~ 로이~ 같이 수영하자!”
“아, 레이첼, 먼저 들어가 있어 잠깐 기다리는 전화가 있어서.”
“아~ 역시 로이는 돈 버느라 바쁘구나?”
“피식, 놀고 있으라고.”
툭툭.
검은색 비키니를 흔드는 레이첼이란 여인의 엉덩이를 두어번 두들긴 로이드 로스차일드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 미친 새끼는 도대체 언제 전화를 한다는 거야? 벌써 약속 시간이 30분이 훌쩍 지났구만.”
유리창 너머 호호, 깔깔, 하하 하고 웃고 있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모두가 거의 헐벗은 상태였고 로이드는 당장이라도 저곳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아이씨, CIA한국지부장주제에, 감히 날 기다리게 만들어?”
그렇게 로이드는 절대로 걸려 올 수 없는 전화를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와 술이 주는 유혹을 뿌리치며 한참을 기다렸다.
***
록펠러가 전용기가 아닌 국적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다.
“쑤!”
자신의 친우이자 이제는 사돈이 된 천혁수를 반갑게 부르는 그.
“대비,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하하, 고생은 무슨 자네 볼 생각에 기장에게 재촉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고.”
“하하하, 이거 손자놈이 우리에게 일을 미루고 제 놈은 관광이나 하고 있으니, 우리 둘의 말년이 참 우습게 되었어.”
록펠러가 천혁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그래도 손자놈 덕분에 마음은 편하지 않은가? 그 뭣 같은 로스차일드 놈들에게 한 방 먹였다니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구만 그래.”
“자네도 그런가?”
“그럼, 감히 쑤 자네에게 총질까지 했다면서?”
“로이드라는 어린 애송이가 루시에게 반했던 모양이야, 우리 우진이에게 빼앗기니 배알이 꼴렸겠지.”
“그나저나 전용기는 도착했나?”
“곧 도착할 시간이니 잠시 기다리지.”
“그러세, 한국은 제법 덥구만··· 어디 시원한거나 먹자고.”
“아아, 차로 조금만 가면 유명한 냉면집이 있네.”
“냉면?”
“그래, 아마 자네도 좋아할 거야.”
“하하 그럼 그거에 그 복분자? 그 술로 한잔할까?”
“그것도 좋지.”
냉면과 복분자를 마시고 인천의 물류창고로 이동하는 차 안.
“그나저나 우진이 기대해도 좋다는데, 무엇을 가져오는 지 모르겠군, 쑤 자네는 들은게 좀 있나?”
“흠, 글쎄. 포도밭이 다 불탔다는 뉴스는 봤는데 손주놈이 무엇을 보냈는지는 잘 모르겠군.”
“흠, 하여간 한번을 속 시원하게 알려 주질 않는 군.”
“노인네들이 너무 놀라 심장마비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은 하지 않는 모양이야.”
“파하하, 어지간 한 것에 우리가 놀라겠는가?”
“그것도 그렇지.”
냉면에 복분자를 얼마나 마셨는지 둘의 텐션은 한층 올라와 있었다. 약간을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둘러 창고에 도착한 둘.
본래는 공항에서부터 전용기에 싣고 온 화물을 확인했어야 하지만 복분자를 한 두잔 나누다보니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감히 록펠러가의 화물을, 복지부장관 천혁수의 화물을, SKY 천우진의 화물을 트집 잡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창고에 도착하니 마련된 작은 카트를 안내하는 SKY시큐리티의 직원들.
“깊게도 가져다 놓은 모양이야.”
천혁수의 말에 직원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회장님의 특별 지시사항이 있었습니다. 오직 회장님의 허락을 받은 분만 출입을 허용하는 공간으로 이동하시겠습니다.”
퍽이나 까다로운 절차.
천혁수와 록펠러는 당연하게도 그 절차에서 프리패스였다. 천우진이 그들의 행보를 막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창고에서도 카트를 타고 한참 이동하니 제법 커다란 규모의 창고건물이 천혁수와 록펠러를 반겼다.
꾸우우웅.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넓은 창고의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한 컨테이너 3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기부터는 두분만 입장 할 수 있습니다.”
록펠러와 천혁수의 수행원들은 들어가지 말란 뜻이었다.
자신의 손주, 자신의 손녀사위의 회사였으니 천혁수와 록펠러는 일말의 의심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꾸우우웅.
육중한 창고 문이 닫히고.
“이거 참, 안 좋은 마음먹은 놈들이 계획한 거라면 꼼짝없이 죽겠구만.”
천혁수의 말에 록펠러가 ‘파하’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조금 긴장되는 것도 같고?”
둘은 피식 웃으며 뚜벅뚜벅 컨테이너 앞에 도착했다.
“나는 이놈을 열고 싶은데?”
록펠러가 먼저 가장 왼쪽의 컨테이너를 가리켰다.
천혁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쪽에 있던 컨테이너를 가리킨다.
“그럼 난 이것을 열지.”
“좋아, 뭘 보냈나 확인 해 보자고.”
별로 어렵지 않게 컨테이너 문을 열고 들어간 둘.
그러나 잠시 후.
“크하하 미친!”
“이야, 진짜 보물이라도 훔친 모양이군.”
컨테이너 바깥으로 나온 둘의 얼굴은 약간이나마 상기 되었다.
“로스차일드 놈들이 제대로 한 방 먹었겠어.”
“파하, 그렇게 말이야 쑤, 내가 손녀 사위 하나는 기가막히게 얻었구만.”
“이 가운데는 같이 들어가 볼까?”
“그러세.”
천혁수가 웃으며 가운데 있던 컨테이너를 열고.
활짝 열린 컨테이너 문을 통해 내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맙소사!”
“이런 미친.”
천혁수와 록펠러가 입을 떡 벌렸다.
어지간해서 놀라는 일이 별로 없던 둘이 그 자리에 굳을 정도로.
“박물관을 뜯어왔나?”
“이 정도면 박물관 하나로는 어림도 없겠군.”
천혁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록펠러가 말했다.
“로스차일드의 윌리엄 그 놈이 뒤로 쓰러져도 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
“저거 모나리자 아닌가? 박물관에 있던 놈이 가품이란 뜻이겠지?”
“그렇겠지··· 로스차일드 놈들이 가품을 소중하게 보관하진 않을테니까.”
“이거 원, 직원들이 없으니 이 컨테이너 세 개가 얼마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감이 잘 안오는 군.”
록펠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전화를 들어 올렸다.
“물어봐야겠네.”
“좋은 생각이야.”
바로 천우진에게 전화를 건 록펠러.
-예 할아버지.
“그래··· 컨테이너는 봤다.”
-아 보셨어요? 깜짝 놀라셨죠?
“얼마냐?”
-크크큭.
“이 놈아 그만 웃고, 노인네들 궁금해서 숨넘어가기 직전이니 빨리 얘기해.”
-가문 대대로 탈세하던 창고 같더군요, 미친 듯이 높은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현물을 마련해둔 곳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게 얼만데.”
< 제 13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