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38화 (138/458)

< 제 138화. >

이른 아침.

여객선 터미널은 여행객들로 붐볐다.

동이 터 오를 시각 윌리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당신은 잠도 없나?”

“···”

사내는 묵묵부답 앞으로 가라고 고갯짓을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윌리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뜨거운 눈초리에 눈이 감기지 않아서였다.

생각해 보라.

누군가 밤새 의자에 앉아서 침대 위에 누워있는 자신을 쳐다보는 상상을. 그런 환경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연스럽게 윌리의 표정은 피곤에 쩔어 있었고, 히스테릭하게 보였다.

모로코로 향하는 여객선의 표를 구매하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 윌리. 그리고 그런 윌리를 바짝 쫓는 사내.

“똥 쌀건데, 변기도 같은 칸을 쓸 생각이야?”

“들어가, 문 앞에 서 있지.”

“하, 시발. 누가 정보국 요원인지 모르겠네.”

천우진이 이렇게까지 지독한 놈을 자신에게 붙였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분명 불바다로 변하던 로스차일드의 포도밭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러니 자신의 곁을 지키는 인물도 밤을 꼬박 세웠을 터. 하지만 전혀 피곤한 기색은 없고,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는 계속된다.

결국 제대로 볼일을 보지도 못하고 바깥으로 나온 윌리, 손을 씻는 둥 마는 둥, 거울을 통해 뒤쪽에 서 있는 사내를 쳐다보다 고개를 저으며 화장실을 벗어났다. 마침 화장실을 벗어나는데 무장한 경찰들이 윌리를 스쳐 지나간다.

“총이다!”

윌리의 외침에 화들짝 놀란 경찰들이 얼른 뒤돌며 윌리를 바라본다. 윌리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려 천우진이 자신에게 붙인 사내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권총이다!”

여행객들의 시선이 모이고 경찰들이 총구를 들이밀며 사내를 압박한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사내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올리고 윌리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막 자리를 박차고 달리기 시작하는 윌리.

“꺄아아아악!”

여행객들의 비명에 화들짝 놀란 윌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무장했던 경찰 둘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미친.”

겨우 몇 초 사이에 무장경찰 둘을 제압한 사내가 자신을 향해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꼼짝마!”

주변의 다른 경찰들이 사내에게 총구를 겨눈다. 사내는 별수 없이 경찰들의 총구를 피해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윌리는 커다란 한숨을 내뱉으며 서둘러 자신이 예약한 여객선을 탑승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천우진이 딸려 보낸 사내와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윌리가 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미스터 로스차일드.”

-왜 또 전화했지?

“지난번 내 제안은 생각해 봤습니까?”

-흥, 네 놈이 내가 들으면 솔깃할 거란게 뭔데? 그것부터 알려주는 게 순서 같은데?

“하하, 로이드 로스차일드 역시 로스차일드의 차기 가주답게 거래할 줄 아시는군요?”

-피식, 기본이잖아 기본.

작은 칭찬에도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로이드를 구워삶기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라고 윌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망할 천우진만 아니었다면 벌써 포도밭에서 내용물을 확인하고 그것을 가지고 딜을 쳤을 테다.

“곧 알려줄 테니 나를 위한 높은 자리나 마련해주세요.”

-봐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다른 곳에 전화를 걸면서도 바쁘게 움직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 나야.”

-예, 보스.

“모로코에 항공기는 준비되어 있겠지?”

-예, 바로 본국으로 이동합니까?

“그래, 물건을 싣는 즉시 움직여.”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확인.”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처리가 진행되니 저도 모르게 표정이 좋아진 윌리. 방긋방긋 웃으며 인사하는 승무원들에게 마주 인사하며 일등석에 앉은 윌리가 싱글벙글 웃으며 ‘샴페인’을 주문했다. 승무원이 방긋 웃으며 그에게 샴페인 가져다주고, 승리의 미소와 함께 샴페인을 들이켜는 그.

“좋은가 봐?”

익숙한 한국말에 덜컥 몸이 굳은 윌리.

스륵, 고개를 돌리니 검은머리의 동양인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윌리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장난을 쳤어.”

윌리가 썩은 표정으로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말했다.

“도대체 나한테 몇 놈이나 붙은 거야?”

사내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가리킨다. 윌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일등석 칸에만 총 4명의 한국인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헛짓거리로 체력낭비 그만하자고, 조용히 가자고 조용히.”

이어진 사내의 말에 윌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지.”

***

준비된 경비행기를 타고 바로 모로코로 향했다. 포도밭에서 뿔뿔이 흩어졌던 대원들은 알아서 모로코로 집결할 것이다. 루시와 우희가 프랑스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아직은 그녀들에게 돌아갈 시기가 아니었다.

호석이 윌리를 믿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윌리놈을 믿을 수 없으니까.

해가 떨어진 지 한참이 지났고, 오후 3시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하역장 인근의 허름한 호텔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오후 2시 40분.

늦은 점심을 먹던 나와 정호석.

호석의 품에 들어있던 무전기가 시끄럽게 울린다.

-치익, 치익. 배가 정박했습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의미. 포크를 내려놓고 대충 입을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석도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찰에 쫓겼다는 대원은 어떻게 됐습니까?”

“안전하게 이동했고,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난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행히 경찰과 연루되지는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역시 정보 관련 일하는 놈들은 믿을 게 못 됩니다.”

호석의 옳은 말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안 믿었으니 됐지요.”

“하하, 예.”

“전용기는 준비됐죠?”

“예, 이미 공항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번엔 화물만 갈 거니까,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주세요.”

“예, 회장님.”

아마 윌리놈은 모로코에서 한국으로 움직이는 화물기를 확보해놓았을 테다. 그러나 난 윌리 놈이 만들어 놓은 루트가 아닌, 모로코부터는 내가 직접 만들어 놓은 루트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애초부터 물건을 프랑스에서 빼 오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 부분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모로코에 물건이 도착한 이상, 더는 CIA따위의 힘은 필요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PMC의 정보 루트와 록펠러가의 전용기를 이용해도 충분하니까.

PMC에서 빌린 전세기로 인도로 보내고, 인도에서 다시 록펠러가의 전용기로 한국으로 가져갈 생각이었다. 이미 모로코와 인도의 항공관리국에 기름칠은 끝냈고, 지금 할아버지와 록펠러가 한국 공항에는 기름칠을 하는 중일테다.

그러니 감히, 록펠러가의 전용기를 검사할 간 큰 놈들은 없을 것이란 뜻이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형트럭에 컨테이너가 적재 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앞에 우리 대원들과 윌리가 보였다.

초췌한 몰골을 하는 윌리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나를 맞이했다. 완전한 패자의 얼굴. 보르도의 포도밭에서는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던 얼굴과는 묘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헛짓거리에 심력 소모 하지 말라고.”

내 말에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린다.

“뭐가 들었는지 궁금했나?”

순간 윌리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혹시나 싶은 기대감을 숨기기 어려운 모양이다. 나는 친절히 정호석과 함께 컨테이너 하나를 열고 놈에게 손짓하니,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얼른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온다.

딸깍.

호석이 품에서 플래시를 꺼내 상자 하나를 비춘다.

놈은 히죽 웃으며 얼른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반짝.

플래시를 받아 반짝이는 금화. 그 생산년도가 과연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오래되었을 테다. 선명하게 보이는 프랑스 왕조의 인장.

“맙소사.”

고개를 들어 컨테이너 내부에 가득 차 있는 나무상자들을 쭉 훑어보는 윌리.

“궁금증은 좀 풀렸나?”

“이게 다 로스차일드의 포도밭에서 가져온 거란 말입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고, 호석이 건네는 플래시를 받아들었다. 호석은 자연스럽게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소음기를 장착하기 시작한다.

때마침 철컥 하고는 컨테이너의 문이 닫히고. 넋을 놓고 금화를 한 줌 들어 올리는 윌리의 뒤통수를 정확하게 조준하는 호석.

“로스차일드에게 약속받은 보상은 뭐지?”

내 질문에 움찔 몸을 떨었던 윌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두컴컴한 컨테이너 안에서 정확히 놈의 두 동공에 플래시를 쏘고 있으니 이쪽을 확인하기는 어려운지, 호석이 제 놈의 대갈통을 조준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거, 선수끼리 왜 이래?”

긴장되는지 놈이 아랫입술을 살짝 핥는다.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늙은 여우 윌리는 직접 물건이 무엇인지 확인한 뒤, 그 물건을 가지고 로스차일드냐, 아니면 나 천우진이냐를 선택할 생각이었을 터.

“그래서, 선택은 했나? 내 밑에서 길지, 로스차일드의 엉덩이를 핥아줄지.”

팍 인상을 찡그리는 놈.

퓩!

정호석이 들고 있는 권총이 불을 뿜는다.

“크윽, 이게 무슨?”

“대답을 하지 않으니, 벌을 받아야지.”

“로스차일드는 날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내가 왜 로스차일드와 당신을 저울질 하겠습니까!”

“호오.”

확실히 제법 놀라운 연기력을 뽐낸다.

그러나 놈에게 속을 정도로 난 바보가 아니다. 물론 두 눈에 보이는 저 붉은 연기도 그것을 알려준다. 절대 속을 수 없다는 사실을.

놈에게 나와 로스차일드를 저울질 할 수 있는 기회는 애초부터 없었다. 난 놈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으니까.

천가는 원한을 잊지 않으니까.

놈은 결국 우리를 감시 미행했으며, 우리의 정보를 누군가에게 전달했다. 누군가를 배신하는 놈들, 특히 정보를 다루는 각국의 정보국 인물들은 단 한 명도, 단 한 순간도 믿을 수 없는 종자들이다.

애초부터 난 그런 놈들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 배신당하거나 속을리도 없다.

“네놈이 전자를 선택했든 후자를 선택했든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어.”

“크윽, 미스터 천! 나 없이 이 많은 물건을 한국으로 옮길 수 있을것 같습니까?”

“어, 있을 것 같은데?”

“크윽, 제기랄··· 살려주십쇼! 내가 실수를 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거든.”

분명 나도 실수했던 순간이 있다.

죽이면 사라지는 입을 굳이 놔둘 필요가 없다.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이건 놈을 확실하게 처리하지 못해서 이런 일까지 벌어진 게 아닌가? 그러니 앞으로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더욱더 견고하고 확실하게, 사소한 것 하나도 잊지 않고 제대로.

피가 낭자하고, 질척이더라도 그래야 내가 원하는 대계, 철혈의 제국, 철혈의 재벌이 될 수 있을테다.

“아닙니다! 나는 잊지 않아요!”

“뭐를, 원한을?”

“아니요! 은혜를 말입니다!”

“네놈에게 내가 베풀었던 은혜가 분명 있었다. 그래도 너는 결국 로스차일드와 붙어먹었지.”

“오햅니다! 상부의 지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께 알리지도 않았겠죠.”

“헛소리 하지마 윌리. 애초부터 우리 대원들에게 네놈의 부하들이 잡히지 않았다면, 알릴 생각도 없었잖아?”

입술을 달싹거리며 뭐라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CIA입니다! 나는 CIA에요! 날 죽이고도 당신이 무사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까?”

철혈의 제국을 세워야 할 내가 고작 CIA에게 고개를 조아릴 순 없는 노릇, 어차피 부딪히게 될 놈들이다.

“정보국 요원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일은 비일비재 한 일이지.”

“CIA전체를 상대하기라도 하겠단 겁니까!”

“못할 것도 없지, 어차피 로스차일드를 부수려면, 네놈들과도 지긋지긋하게 역일 것 같으니까.”

“시발 살려줘!”

무슨 말을 해도 제 놈이 살아갈 방법이 보이지 않으니 이제는 이성을 잃고 욕설을 남발한다.

“절대 아무에게도 이 일을 전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살려주십시오.”

“내가 왜? 굳이 그런 위험한 방법을 택하지?”

“······”

“죽은자는 언제나 말이 없지.”

나는 정호석을 힐끗 쳐다보았고, 고개를 주억거린 정호석이 검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방아쇠를 당겼다.

“안돼에에에!”

퓩.

< 제 138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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