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35화. >
다음날 공항.
“녀석,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네~ 할아버지.”
“멀쩡한 놈이 내미는 술 마시지 말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랑 꼭 붙어 다닐게요.”
“루시 말 잘 듣고.”
“네~”
“자나 깨나 남자를 조심해야 해! 남자는 다 짐승이야 짐승!”
“네~”
“네 오빠도 믿지마! 썩을놈, 이 할애비는 일을 시키고 제 놈은 오붓하게 오누이랑 마누라랑 여행을 가!”
“네~”
“우희 너도 프랑스 다녀와서는 제법 바쁠 거야, 내가 정인숙 이사장에게 특별히 빠르게 일을 배울 수 있는 코스로 준비해달라 했으니 그리 알거라.”
“네~”
나는 할아버지 뒤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밥 잘 챙기고, 백인 놈들이 그 썩어빠진 백인우월주의로 널 무시하거든 뺨을···”
“자자, 할아버지 늦겠습니다. 그만하고 들어가세요, 아무리 전용기라지만 이건 좀 예의가 아닙니다. 승무원들 벌써 수십 분 전부터 대기 중일 거예요.”
할아버지의 서릿발 날리는 두 눈이 날 훑는다.
“썩을놈.”
“에헤이~ 동상 설립으로 바쁘실 분이 왜 이러실까요.”
“이놈이 이러려고 내게 감투를 씌웠구나.”
“놀러 가는 거 아니라니까요?”
내 복장을 위아래로 훑는 할아버지.
참고로 난, 반바지에 하와이언 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놈아, 아직 한국은 덥지도 않은데 벌써 여름이더냐?”
“7월 초면 여름이죠.”
“프랑스는 추워!”
“선선하니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일 겁니다.”
나는 뒤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는 백철웅에게 손짓했다.
“자, 백 대표님, 빠르게 짐 옮겨주시고, 우희랑 루시도 이제 할아버지한테 인사하고 들어가자.”
몇 년은 손녀를 유학 보내는 사람처럼.
할아버지는 한참을 우희를 껴안고는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입을 여신다.
“내 듣기로는 몽마르뜨 언덕에 가면, 이상한 흑인 놈들이 주는 팔찌가 있다더구나, 그걸 조심해야 해.”
“할아버지! 우리 경호원들 따라다녀서 그럴 일 없다니까요? 대원들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얼른 가세요.”
“매정한 놈.”
아빠는 딸 바보, 할아버지는 손녀 바보라더니, 딱 그쪽이다. 어거지로 루시와 우희를 먼저 게이트 안으로 보내고, 나는 할아버지를 마주 보고 섰다.
“위험하진 않겠느냐?”
우희를 상대할 때와는 천지 차이의 얼굴로 내게 묻는 할아버지, 이제야 좀 내 할아버지 같았다.
“예, 대원들이 철저하게 조사해 놨으니 괜찮습니다.”
“굳이 네 놈이 가느냐?”
“이제는 할아버지의 사돈이 된 록펠러가의 70년대 재산 규모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할아버지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많겠지, 검은 기름으로 벌어들인 돈일 테니까.”
“예, 그때 당시에 우리나라 돈 1경이 넘는 자산규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살짝 ‘호오’하고 입을 벌리신다. 어지간한 규모의 돈에는 놀라는 법이 없던 할아버지가 놀랄 정도로 ‘역시 미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규모였다.
“물론 그 이후 쇠퇴를 거듭했겠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로스차일드 놈들은 대단하겠구나.”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독일계 유태인들의 자본금.
“주식이란 개념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어마어마한 부를 쌓은 놈들입니다. 전쟁으로 만든 부죠,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제 놈들은 철저한 분석으로 ‘예’라고 했으니까요, 속임수일수도 있고, 과거의 일이니까 잘은 모릅니다.”
“역사를 가르치느냐? 대충 알고 있다.”
“하여간 14세기, 15세기부터 고리로 돈을 벌던 놈들입니다. 지금 놈들의 곳간에 얼마나 많은 부가 쌓여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곳간은 반드시 있다더냐?”
“없어도 그만이죠, 있으면 좋고.”
분명, 언젠가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 전체의 자산규모가 6경이 훌쩍 넘어간다는 뉴스를. 그건 전 삶에서고, 현재는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로스차일드 가문 전체를 상대하는 것도 아니다. 미국에 있는 놈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놈들이다. 우리나라처럼 종친회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의 시작이 보르도인 것은 일견 수긍할 수 있는 부분.
미국의 로스차일드 놈들이 보르도 지방을 방문하고 나면 뭔가 대단한 자본을 가져오는 데는 필시 이유가 있을 터.
“하여간, 사설이 길었다. 너도 철웅이도, 호석이도 몸조리 잘하고, 대원들도 너무 상하지 않게 조심하거라 큰돈이 걸려있다면 네 놈이 생각하는 것 보다 경계가 삼엄할 수 있다.”
“예, 우리 대원들 만만한 친구들 아니잖아요?”
“그렇지. 모쪼록 별 탈 없이 다녀오거라,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울 순 없잖으냐?”
나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그 유명한 로스차일드가 우리 할아버지에게는 고작 ‘빈대’로 보였나보다.
“그렇죠,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울 순 없죠.”
“그러니 조심하란 얘기야. 애초에 돈이 목적이 아니었던 만큼, 흔들리지 말란 말이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작전명은 무엇이더냐?”
“불빠따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쯧쯧, 네 놈이 지었구나.”
“별로예요?”
“다녀오거라.”
더 볼일 없다는 듯 차갑게 돌아서시는 할아버지.
“예, 다녀오겠습니다.”
할아버지의 등에 꾸벅 인사를 하고는 망설임 없이 뒤 돌아 출국 게이트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등 뒤에서 뜨겁게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시선이 있지만 굳이 뒤돌아보지 않았다.
***
같은 시각, 워싱턴의 야심한 밤.
데이비드 록펠러.
천우진의 처조부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조심스럽게 현 미국의 대통령 부쉬와 만났다.
“부탁하실 것이 있으시다고요?”
“이거, 바쁠 미스터 프레지던트께 미안할 따름입니다.”
“하하, 아닙니다. 최대 후원자께서 긴히 할 말이 있다니 열 일을 제쳐두고 와야지요.”
“감사합니다.”
반갑게 악수하고는 마주 보고 앉은 둘.
“부동산 가격이 계속 상승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부쉬.
“그러나 이것은 기존의 기득권들에게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어진 말에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록펠러의 말이 꼭,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니 주의해야 하지 않겠냐는 듯 들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면 대통령의 반응은 달랐을지도 몰랐다. 지금 록펠러 가문은 금융업과 자선사업을 병행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들은 ‘돈 귀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득권이, 기득권 배불리기에 우려를 표한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깊게 뿌리내린 미국에서는 제법 이상한 일이었다.
“예, 그걸 예측하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대출 규제 완화와 사설금융업체들을 용인하고 있는 형국이고요, 특히 뉴욕에서는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록펠러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 선을 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선을 넘는 사람들이요?”
“소득이 전무한 사람들에게도 대출을 내주고 있습니다.”
“어차피 부동산으로 이득을 취하면 된다는 논리겠군요.”
“정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빈부의 격차는 앞으로 더욱 크게 벌어지겠죠.”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부쉬.
도대체 부탁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그. 크게 규제하지 않겠다 했을 때는 알겠다고 해놓고 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혹, 규제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록펠러가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상한 말에 부쉬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록펠러는 부드럽고 여유로운 얼굴로 테이블에 준비된 시가를 권유했다.
“아, 감사합니다.”
서로의 입에 시가를 물고, 후우 하고 흰 연기를 내뿜는다.
“부동산 가치를 폭락시킬까 합니다.”
“크흡, 콜록.”
입을 막고 몇 번의 기침을 토해낸 부쉬가 록펠러를 바라본다.
“손해가 막심하지 않습니까? 당장 가치가 폭락한다면.”
“당연히 서서히 진행해야겠지요.”
부쉬가 빤히 록펠러를 쳐다보았다.
“흐음··· 로스차일드와 사이가 틀어진 것입니까?”
“이미 그들이 알 구어를 지지할 때, 예정된 일 아니었겠습니까?”
갑작스런 패배자 알 구어의 이름에 부쉬의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주억거린다.
확실히 지금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자신에게 반대하던 로스차일드 놈들은 막대한 부를 쌓게 될 터.
‘돈 귀신’들이 모종의 이유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 미국을 넘어 세계를 움직일 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움직일 힘이 있다 해서 쥐락펴락한다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할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게다가 ‘로스차일드’라는 성 아래, 무수한 유태인 부자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그들의 힘은 막강하다. 음모론자들이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등 괜히 이상한 단체의 수장이 ‘로스차일드’라 말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부동산 가치를 떨어뜨리면, 로스차일드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적어도 미국에서는.”
부쉬가 록펠러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어떤 것이 보였다.
“확실하신 모양이군요.”
“같은 유대계 자본이겠지만, JB모간과 골드만글러브도 나와 뜻이 같습니다.”
“호오···”
“우리 계획이 성공한다면, 성공시킨다면, 연임은 수월한 일 아니겠습니까?”
부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패한다면 어려운 재도전을, 성공한다면 안전한 길을. 미국을 움직이는 금융계의 거두들이 같이 움직인다. 거대 유대계 자본에 맞서며.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부쉬는 후자를 선택했다.
이미 한 번 적이 되었던 사람보다는, 처음부터 파트너였던 사람과 함께 하는게 더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계획은 있습니까?”
록펠러가 여유롭게 시가 연기를 ‘후~’하고 내뿜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가가 모자랄지도 모르겠군요, 계획을 떠들다 보면.”
“하하하 파트너와 함께하는 자리는 언제나 즐겁지요.”
***
전용기 내부를 연신 두리번거리는 우희.
“오빠, TV에서 보던 비행기랑 너무 다르다.”
“이건 루시네 집에서 빌려준 전용기라 그래.”
“전용기?”
“응, 아가쉬 이거 내꺼.”
“비행기가 언니거예요?”
“네! 내꺼!”
“와아, 언니도 부자였구나.”
“노노, 나 부자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부자!”
“그게 그거 아니에요?”
“달라요, 나는 내 남편이 부자, 그래서 부자. 이 비행기는 할아버지가 부자여서 비행기.”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말일지 모르나, 의미는 확실하게 전달되었는지 우희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풉 하고 웃어버렸다.
우희는 영어로 말하고, 루시는 한국말로 말하는 재미있는 상황 때문에 더욱 그랬다.
서로가 서로에게 언어로서 도움이 되고 있으니 굳이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프랑스까지 제법 먼 비행을 떠나야 했다. 그러니 나는 슬쩍 움직여 승무원에게 꼬냑을 부탁했다. 유럽에 가는 만큼, 위스키보다는 어쩐지 그놈이 더 땡겼다.
막 꼬냑을 받아 들었을 때.
“회장님.”
날 회장이라 호칭했으니 공적인 얘기란 의미.
자연스럽게 호석을 따라 작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사람 네다섯이 둘러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으니 호석이 보고를 시작했다.
“대원들의 얘기로는 무장 경호원 여덟이 1개조로 총 4개조가 로테이션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무장 수준은 어떻습니까?”
“소총과 섬광탄, 연막탄, 최루탄 등을 무장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침입에 대한 대비군요.”
“예.”
위스키를 홀짝이고는 물었다.
“군이나 경찰과 연관되었습니까?”
“사설 고용이었습니다. 아마 로스차일드에서 직접 키워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도 경호는 물론 심지어 PMC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돈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신뢰할 수 있는 경호원들을 만드는 법이다. 당장 록펠러가도 자체 운용하는 실력 있는 경호원들이 있으니 말이다.
“우리 대원들 무장 수준은요?”
“5일을 주시면 비슷한 수준으로 맞출 수 있습니다.”
“그편이 안전하겠죠?”
“예, 회장님.”
“5일이라, 생각보다 관광할 시간이 더 생겼네요.”
철웅과 호석이 부드럽게 웃는다.
그들의 얼굴에는 전혀 대원들에 대한 걱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대원들의 실력을 확신하고 있으리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철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 전한다.
“누굽니까?”
“CIA한국지부장입니다.”
도대체 언제 연락이 오나 했다.
정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모양은 조금 빠지더라도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다. 나는 놈에게 얻고 싶은 것이 생겼으니까.
“조건은 가져왔나?”
-후우, 미스터 천··· 직원들은 살아 있는 겁니까?
“조건은 가져왔냐 물었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적당한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혹, 혜안이 있다면 내게 알려주시오.
“프랑스 정보총국에 연줄이 좀 닿나?”
-··· 정보총국은 갑자기 왜···
역시 놈도 제법 높은 위치에 자리 잡은 만큼 눈치가 귀신이라 말해도 손색이 없다. 본능적으로 곤란한 얘기가 내 입에서 튀어나올 것을 예상한 것 같았다.
“직원들의 장기가 이 나라 저 나라로 팔려 가는 꼴이라도 보고 싶은 모양이야? 아, 각막 정도는 다시 미국으로 보내줄까?”
-크음··· 말씀하시오, 경청하겠소.
이제 제법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된 것 같으니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제 135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