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34화 (134/458)

< 제 134화. >

차량에 오르니 호석이 갈색 서류 봉투를 건네준다.

“프랑스에서 대원들이 보낸 보고서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받아들고는 바로 확인했다.

A4용지 사이즈로 인쇄된 로스차일드가의 별장 설계도와 여러 개의 사진들.

행여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할까 호석이 첨언을 더 한다.

“확실히 별장의 구조가 이상했다는 보고입니다. 겉에서는 티가 나지 않지만, 수리공으로 위장해 안으로 들어가니 어색한 공간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어색한 공간이요?”

“벽장 안쪽에 비밀공간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로스차일드 놈들은 확실히 1년에 두 번씩 보르도지방을 방문했고요?”

“예, 로이드 로스차일드는 아직 방문하지 않았지만, 놈의 아비는 확실히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1년에 두 번이 아니라 서너 번 방문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물고기 밥이 되었을 테드 존스의 말이, 정확히는 그가 알고 있던 소문이 ‘사실’에 가깝다는 신빙성을 더해주는 상황.

“방문하고 오면 확실히 뭔가 플렉스를 했겠군요?”

“예, 자본의 증가와 신규사업 진출 등, 다방면에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뭔가가 있다는 얘기네요.”

“예, 더 제대로 된 조사를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있어 이 정도가 한계라고 전해왔습니다.”

매우 흥미를 자극한다.

씨익,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재밌네요.”

정호석도 마찬가지인지 입꼬리를 쓰윽 들어 올린다.

“포도밭 규모는요, 모두 불태워버리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와인창고의 경우 5곳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등급별로 공간은 분리한 듯했습니다. 포도밭은 주변 동네에만 도착해도 포도 향을 맡을 수 있는 정도라고 했습니다.”

“엄청 넓은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네요.”

“예.”

“잿더미로 변하면 속 좀 쓰리겠어요.”

“하하, 예.”

“화재 발생 시, 소방관 출동까지 경로와 시간은 파악했습니까?”

“화재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 아니기에 제법 먼 거리에 있습니다. 대규모 화재의 경우 그 반응속도가 더욱 느리다는 판단입니다. 화재 진압은 불가할 테지만, 소방차 출동의 경우 28분을 데드라인으로 잡고 있습니다.”

역시 우리 SKY의 대원들답게, 일 처리가 깔끔하다. 아주 디테일한 분 단위의 보고도 마음에 들었다.

“만약 소방차의 이동 경로를 방해한다면?”

“신분이 드러나지 않는 방법일 경우 최대 41분, 신분을 드러내면 주변 군경의 출동까지 1시간 22분을 예측하였습니다.”

“보물창고 하나 털기에는 넉넉한 시간이네요?”

“그렇습니다. 막대한 양의 재산이 숨겨져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이동하는 것이 가장 관건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생각이 있습니다.”

정호석이 날 빤히 바라본다.

어서 그 방법을 말해달라 재촉하는 것 같았다.

“다 알면 재미가 없죠?”

“흐음.”

“작전지시는 대기하라고 해 주세요, 며칠 준비하는 데 걸릴 것 같으니까. 그동안 최대한 확실하고 안전한 침입 루트와 잿더미 루트를 확보하라고 하시고, 작전명은··· 불빠따 어떻습니까?”

정호석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왜요?”

“불빠따··· 크흠.”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닙니다.”

“아닌게 아닌 것 같은데요?”

나는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대원에게 물었다.

“별로예요?”

“좋, 좋습니다.”

아무래도 작명센스는 신이 내게 주지 않으신 모양이다.

***

강기태 본부장이 기지개를 켜며 보드라운 호텔 이불을 들추고 피곤한 눈을 부릅뜨며 호텔 거실로 나갔다. 어젯밤 광란의 파티를 증명이라도 하듯, 사무엘은 거실 소파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죽은 듯 잠자고 있었다.

“이봐, 사무엘.”

흑인 특유의 쭉 뻗은 다리와 기다란 팔을 움직이며 허리를 세우는 사무엘.

“으음, 벌써 아침인가?”

“그래, 오늘부터 바쁘게 움직여야지?”

“그래야지, 의뢰주님 말씀인데.”

“이제는 보스라며.”

“파하, 내가 어제 그랬어?”

“그래.”

“봐서, 아직은 의뢰주를 잘 모르니까.”

“입에 지퍼 채우는 건 잊지 않았겠지?”

“세탁기는 떠버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믿어보지.”

허리를 움직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으로 한쪽 욕실을 가리키며 묻는다.

“난 저쪽, 캉은?”

“편한 대로 해, 알아서 할 테니 40분이면 충분하겠지?”

“물론이지.”

잠시후 피곤한 얼굴이었던 강기태와 전날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던 사무엘은 누가 봐도 멀쩡한 비즈니스 맨과 같은 모습으로 호텔을 나섰다.

준비된 차량에 올라 그들이 향한 곳은 허름한 사설금융업체.

손톱을 정리하던 금발의 여인이 둘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런 곳에 어울리는 복색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곳에는 허름한 복장을 입은. 그러니까 노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사람들이 드나드는 그런 곳이었다.

신용도 CC이하의 인물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기에 그들의 행색이 좋을 리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모기지 때문에요.”

강기태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무리 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출은 필요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고객은 고객일 뿐.

그는 사무실 안쪽에 손님이 왔음을 알리고, 사무엘과 강기태는 나무 문을 열고 사무실 내부로 들어갔다. 제법 엔틱하게 꾸며진 사무실에 앉으니, 느끼하게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백인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한다.

“어서오십시오 고객님!”

강기태는 자연스럽게 뒤에서 살짝 고개를 숙이고 서고, 사무엘은 준비된 의자에 앉는다. 그러더니 거만하게 뒤쪽으로 손을 뻗자, 강기태가 얼른 서류 가방을 열어 서류 봉투를 전달한다.

“모기지 말이에요, 우리는 그게 망할 것 같아서, 옵션을 좀 개설하고 싶은데, 어때요? 생각 있습니까?”

올백 머리의 백인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제 귀를 의심하는 표정.

“모기지가 망한다고요? 이런 선진국형 대출이요?”

“뭐, 우리 생각이 그렇다 이런 거죠, 망하지 않으면 결국 손해는 우리만 보지 않겠습니까?”

“흐음··· 일단 서류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서류는 드리고 갈 테니 확인하고 연락해주세요, 여기 내 명함입니다.”

“그러죠.”

사무엘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강기태가 살짝 고개를 숙이다 그를 뒤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그렇게 작은 금융사를 시작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강기태와 사무엘은, 같은 날 총 17곳에 똑같은 서류와 명함을 돌렸다.

***

로이드 로스차일드가 서류를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매튜.”

“예! 보스.”

“내가 읽고 있는 서류가 제대로 된 게 맞아? 어떤 미친놈들이 부동산 폭락에 베팅해?”

“뉴욕이잖습니까? 한방의 벼락을 노리는 미친놈들이 넘치는 곳.”

“쯧쯧, 아무리 그래도 뭔가 이상한데?”

매튜가 부드럽게 웃으며 서류를 건넨다.

“명함을 건넨 사무엘이란 놈을 뒷조사한 서류입니다..”

샤락샤락.

로이드가 바쁘게 서류를 넘긴다.

“구린내를 풍기는 돈이네?”

“예, 흑인 인권 사업 재단의 기부금을 빼돌렸을 확률이 높습니다.”

“제 돈이 아니니 도박에 베팅한다?”

“그렇습니다.”

“미친놈이란 소리고.”

“예.”

“그런데 CC등급부터 B+까지 베팅했어? 놈들이 원하는 파생상품은 어떨 것 같지?”

매튜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100퍼센트, 놈들은 단 1센트의 돈도 찾아가지 못할 겁니다. 가주께서 직접 핸들링하는 사업입니다. 절대 실패할 수가 없는 사업이에요.”

“흐음, 역시 그렇지?”

“굳이 CCC-등급에도 대출을 내주고 있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계속해서 가파르게 부동산값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돈 놓고 돈 먹기, 절대 실패할 리 없습니다. 보스.”

“그럼 이놈들 옵션을 받아들이면?”

“부수입이 늘어나는 것이죠.”

만족스럽다는 듯 히죽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로이드. 매튜도 덩달아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덧붙인다.

“현재는 우리가 차명으로 돌린 사설업체들에 돌리고 있지만 예상하기로는 곧, 은행까지 가져올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예.”

“흑인 인권 재단이 그렇게 돈이 많나?”

“어차피 구리게 출발했을 돈입니다. 아마 다른 곳에서도 자금을 받아오고 있겠죠.”

“어쨌든 바보 같은 베팅이란 얘기구만.”

“예, 과거 로스차일드가 영국에 베팅해 승리를 쟁취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승리할 것입니다.”

“좋아, 진행해.”

“예, 보스!”

***

김장원과 찰리 박이 허름한 라멘집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돈코츠 라멘에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후루룹, 쩝, 아따~ 우리 회장님이 겁나게 바쁘신 모양이오, 별말씀이 없고잉?”

김장원의 말에 찰리 박이 맥주를 홀짝이고는 말했다.

“쯧, 우리를 믿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흐흐, 그랴도 우리도 놀지마는 않았소잉?”

찰리 박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렇죠, 그래도 플루오린폴리이미드는 제대로 확보했으니, 회장님도 잘했다 하실 겁니다.”

“아따 플루 머시깽이 반도체 뭐시깽이 그거슨 나는 잘 모르겄고, 가네카, 다이낀, 두개 먹었다 이거 아니오?”

“하하하, 맞습니다. 회사 두 개 먹었습니다.”

김장원이 입술을 삐쭉 내밀며 말한다.

“그란디 이거시 뭐십니까? 라면에 맥주? 으디 좋은데라도 가불어야 하는 것 아니오?”

“맛있게 드시고 계시면서 왜 그런 소릴 하세요 또.”

“으따~ 기껏 출장 아니요~ 듣기로는 회장님이 여동생을 찾아부렀다는데, 아따 아가씨도 솔찮이 궁금허기도 하고.”

“우리 일 확실하게 끝내고 얼른 갑시다. 그러니까 술도 좀 자제하고.”

“쯧, 그랴도 저녁에는 쌀밥 먹읍시다. 밀가루만 먹으면 속이 쓰랴서.”

“좋습니다. 장어덮밥 어떻세요?”

“잉? 장어? 아따 그거슨 또 못 참지.”

***

[ 충격! SKY 자동차, 일부 출시차 리콜 선언! ]

[ 중요 결함 아니다. 일부 비양심 업체들의 품질 저하 부품 교체다! ]

[ 여태까지 이런 기업은 없었다. 양심고백 SKY ]

[ 직접 찾아가는 서비스, 카센터가 집 앞에. ]

아침 조간신문 1면에는 모두 SKY자동차에 관한 기사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별거 아닙니다.”

“흠, 돈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당장의 이익보다 미래의 이익을 생각한 일이에요.”

“흠,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슬쩍 아직 거실로 내려오지 않은 우희 때문인지 계단 쪽을 살피더니 말을 잇는다.

“우희가 다니던 회사 때문이더냐?”

“뭐, 그것도 있고, 이참에 SKY자동차는 물론이고 썩어빠진 파트너 업체들도 좀 솎아낼 겸, 겸사겸사 입니다.”

“그렇구나, 철웅이에게 듣기로는 대양실업 놈 중 둘을 보냈다며?”

“예, 그럴만한 놈들이었습니다.”

“우희는 모르게 처리했더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야관문 차를 마셨다.

요즘 부쩍 아산댁이 야관문 차를 자주 내온다.

“잘 했다. 굳이 우리 세상에 우희까지 발을 디딜 필요는 없잖으냐?”

“예,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그래, 우리가 지켜줘야지··· 저 여린 것은 좋은 일만 하고 살 수 있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참으란 얘기는 아니다. 우리 족속은 참 신기해서 참기만 하는 놈은 호구로 보거든.”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설마, 제가 바깥에서 호구 취급당하겠습니까?”

할아버지가 마주 웃으신다.

“그럴리가 없지.”

“요즘 바쁘시죠?”

“바쁘지, 나랏일이 이렇게 바쁜 줄 알았으면 하지 않았다.”

엄살을 부리시지만 그래도 표정은 좋아 보이셨다.

“네놈은 제법 바빠 보이는구나.”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닌데요?”

“아니라고? 신문에서 이렇게 시끄러운데?”

“네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신다.

마침 미인은 잠이 많다더니, 우희와 루시가 다정하게 웃으며 계단을 내려온다.

“쑤! 조흔 아침 인니다.”

“할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오냐, 밥 먹기 전에 안거라, 차 한잔씩 해.”

“네~”

“네.”

할아버지 시선이 다시 내게 옮겨지고.

“어째서 아니더냐?”

“여행가려고요.”

우희와 이제는 제법 한국말 단어를 알아듣는 루시가 휙 하니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다.

여행이라는 말에 흥미가 돋아난 모양.

“여행?”

“불란서.”

“프랑스에는 왜?”

나는 그저 입꼬리만 들어 올렸다.

할아버지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묻는다.

“설마, 우희와 루시도 같이 가느냐?”

“그래야죠? 우희야, 여행 가고 싶지 않아?”

“응, 가고 싶어!”

“나도나도! 허니! 나도나도!”

“아쉽게도 할아버지는 바쁘시다고 하시네?”

“아아! 쑤! 이 며느리가 잘 놀다 올게요, 대신!”

“할아버지는 높은 사람이라 어쩔 수 없구나, 아쉽다.”

할아버지는 입술을 달싹일 뿐, 뭐라 말 못하고 날 차갑게 노려보셨다.

‘고얀 놈.’

난 한껏 승리자의 표정으로 눈으로 말했다.

‘말이 여행이지, 할 일 있습니다.’

‘그래, 로스차일드인지 지랄인지 엿 맥이러 가는 것 아니더냐?’

‘예, 여행 핑계도 좋고요.’

‘쯧, 부러운 놈.’

< 제 134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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