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31화. >
어딘가 굳은 결심이 보이는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우희.
“그래, 가야지.”
나는 최대한 믿음직한 모습으로 말했다.
“준비하고 나와, 천천히.”
루시가 불쑥 끼어들며 말한다.
“아가쉬! 내가 도와줄게!”
“루시 언니가?”
“웅!”
어색한 한국어로 대답하며 비장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 루시, 둘의 모습이 퍽 귀여워 나도 모르게 ‘풋’하고 웃어버렸다.
“루시 나는? 나는 준비 안 해도 돼?”
“우진은 알아서 입어, 원래 옷 잘 입잖아.”
고개를 끄덕여주며 나는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하고 샤워를 했었으니 치장만 하면 될 일이었다.
치장도 사실 별 게 없다. 포마드 기름을 발라 머리를 넘기고 수트를 입고 전투에 나서는 만큼 새로 산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를 찬다. 차가운 메탈이 내 피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다.
준비하는데 걸린 시간은 약 20분.
천천히 움직이며 했기에 그렇다. 급하게 준비했다면 5분이면 충분했을 터. 계절과 날씨에 따라 이미 준비되어 있는 수트들이 즐비한 드레스 룸, 권위 있는 디자이너가 손수 몇월 며칠날은 어떻게 입으라고 권유해주고 난 그대로 입으면 된다.
아마 여자들은 준비시간이 긴 만큼 제법 시간이 남았을테다. 자연스럽게 마당에 나가 시가를 입에 물었다.
호석이 내미는 서류를 받아들고 한참을 읽어갔다.
서류는 대양실업에 관련된 것이었다.
“플라스틱 시사출, 이건 뭐, 기술력도 없고 인맥만 있으면 되는 그런 회사네요.”
정호석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우리 SKY자동차에도 납품하고 있었네요? 속 범퍼류나 엔진룸 배터리 트레이같은 것들을.”
“예, 그렇습니다.”
“자동차 부품팀에 대양실업 부품들 전부다 대양실업으로 보내라고 하세요, 부품별로 각 3개씩 샘플링 확실하게 해서, ‘양품’으로 보낼 필요 없고 바로 라인에 들어가는 놈들로요 품질 검사좀 해봅시다.”
“예, 회장님.”
“퀵으로 보내서 최대한 빠르게. 내가 우희와 대양실업에 도착했을때 바로 볼 수 있게 처리하세요.”
“예!”
잠시 호석이 전화를 하기 위해 멀찍이 떨어지고, 나는 홀로 시가를 태우며 한참을 기다렸다. 90분짜리 시가의 끝이 보일때 쯤.
“오빠.”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와.”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꾸미지 않았던 우희도 예뻤다. 내 자랑이 아니라 우리 핏줄은 아름다운 어머니와 남자답던 아버지 덕분에 제법 외모가 출중한 편이었다. 당장 나의 할아버지도 훤칠한 180cm가 넘는 키를 뽐내시니까. 얼굴도 남자답게 강인하게 생기신 편.
그러니 그런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받는 우희도 자연스럽게 예뻤다.
오늘 꾸민 모습을 보니 연예인도 부럽지 않을 외모였다. 게다가 제법 비싼 옷을 입었을테니 그 태가 남달라 보였다.
“예쁘네, 내 동생.”
“정말?”
난 웃으며 루시에게 엄지를 척 들어올려보였다.
“내 솜씨 괜찮지?”
“응, 최고야.”
정호석이 눈치껏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차 준비하겠습니다.”
“네.”
루시가 내게 다가와 따뜻하게 포옹했다.
그러고는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나쁜놈들, 혼내주고 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이지.”
***
같은 시각 대양실업.
임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공장 청소 및, 사무실 청소를 진행하고 있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회사의 인상을 청결에서 결정되는 거야!”
사원 중 하나가 뒷짐을 지고 소리나 치고 있는 부장을 아니꼽게 바라보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곧 대양실업의 중역들이 속속들이 회사로 출근했다. 본래의 출근시간은 오전 9시지만, 중역들은 언제나처럼 늦은 출근이었다.
아니, 오늘은 제법 이른 출근이었다. 간혹 출근하지 않는 날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출근한 이유.
“SKY그룹의 회장이 온다고?”
오 상무의 말에 오 부장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예, 삼촌.”
“왜?”
“아마도 SKY자동차에서 이번에 신차를 개발중이라더니 우리 부품이 필요해서가 아닐까요? SKY SORT랑, 타타다우, 그리고 카이자동차에 우리가 납품하고 있던 부품들이 제법 많았잖습니까?”
“호오, 벌써 회사가 커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오 상무가 고개를 돌려 정말 오랜만에 출근한 회장을 처다 보았다. 회장이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으로 보건데 홀로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무실 책상을 열심히 닦던 여직원이 걸레를 키보드 위에 던지는 내려놓는다.
“아오! 양우희 이년은 어디가서 나오지도 않는거야?”
대양실업의 모든 임원들이 다 들리게 얘기하는 여직원은 오부장의 딸, 오 대리였다.
“이 자식이, 어른들도 계시는데.”
“아오! 할아버지, 손녀딸이 걸레질까지 해야겠어요?”
회장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오늘만 참거라 이제 회사가 커지면 아랫사람들을 많이 뽑아줄테니.”
“정말이죠?”
“오냐, 이제 우리 민희도 대리 말고 과장 해야지?”
“오예! 월급도 올려주시고요?”
“그럼~ 누구 손녀인데.”
“그리고 양우희 그년은 짤라요 할아버지! 벌써 며칠째 무단결근이에요!”
“쯧쯧, 요즘 것들은 근성이 없어 근성이.”
한참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는 회장.
“오, 오십니다!”
한 사원의 외침에 그들이 군단장이라도 영전하듯, 우르르 회사 마당으로 쏟아져 나갔다. 검은색 SUV차량 두대가 먼저 들어오고, 이어서 검은색 세단이 부드럽게 들어온다. 그리고 그 뒤로도 검은색 SUV가 2대 더 들어오더니, 세단의 조수석과 운전석에서 내린 사내들이 뒷자석의 문을 연다.
“어?”
오 대리가 당황한 음성을 내뱉는다.
“야, 양우희?”
***
대양실업 마당에 차량이 멈춰서고.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우희에게 말했다.
“왜 긴장을 해?”
“모르겠어···”
“자신있게 해, 넌 내 동생이야.”
“응··· 자신있게.”
“너는 이곳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어, 네가 화낸다고 잘못이 아니야, 천가의 핏줄은··· 원한을 잊지않아.”
다소 거친 말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어젯밤, 루시에게 들은 말을 통해 난 조금이나마 더 확신할 수 있었다. 틀림없는 같은 핏줄임을.
그러니 우희에게도 나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 지금 삶, 내가 성장했고 제법 성공한 삶을 살고 있기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난 삶 천애고아 흙수저로도 어지간한 대기업 임원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분명 우리 가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 어떤 사회집단보다 정치질이 심한 곳이 ‘회사’다.
그리고 그런 약육강식 운빨존망게임에서 나는 제법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사람이었다. 물론 일반인을 기준으로 한다.
“원한?”
“그래, 그것만 명심해 네가 대양실업에서 겪었던 모든 일을 훌훌털어버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딱 그것만. 앞으로 이깟 회사가 네 인생에 트라우마를 줄 수 없게. 네가 그들보다 우위에 서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할 수 있게.”
그러니 우희도 아무리 일반인이었다고 해도, 흙수저 천애고아로 힘들게 살았다고 해도, 분명 요 며칠 깨닫는게 있을 것이고 우리 핏줄이 주는 강단을 가지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대충이나마 내 말 뜻을 이해했을까? 우희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때마침 호석과 운전기사가 뒷자석 문을 열어주었다. 나와 우희가 동시에 양 옆에서 내리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있는 사람들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인사는 신경쓰지 않고, 내 동생의 이름을 말했던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당황했는지 인사도 제대로 못하던 여자. 그녀의 얼굴엔 욕심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한 눈에 보고서 속, 오민희 대리라는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하고 서 있어 오 대리! 회장님한테 인사 올리지 않고!”
직함을 알 수 없는 사내의 말에 오민희라는 여자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올려 우희를 가리킨다.
“아빠! 저기 양우희 안 보여?”
“이 자식이 회사에서는 부장님이라고 하라니까!”
크게 호통을 치며 꾸벅 내게 고개를 조아린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우리 딸··· 어?”
부장이 우희의 얼굴을 이제서야 확인했다.
“미스 양?”
나서려면 얼마든지 나설 수 있지만 나서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우희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 곁에 서 있던 우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 성은 ‘천’입니다. 천우희, 그게 내 이름이에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오 부장과 오 대리.
지이익.
우희가 들고 있던 핸드백에서 흰색 봉투를 꺼내더니 망설임 없이 오 부장의 얼굴에 던진다.
턱, 툭.
오 부장의 얼굴에 맞은 흰색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고.
“사직서에요, 이제 이런 거지같은 회사 그만다니고 싶네요, 퇴직금 입금하시는 거 잊지 마세요.”
이어서 곁에 서있는 오 대리에게 또각또각 다가간 우희.
“야.”
“뭐?”
“야, 오민희.”
“이게!”
우희에게 손을 뻗어올리는 오민희.
턱, 우희가 오민희의 손목을 잡아채고는 툭, 핸드백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쫙!
“네가 제일 나빠 개같은 년아.”
내가 알 수 없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둘만의 어떤 갈등관계가 있었나보다 싶다.
우희의 저 작고 고운입에서 욕이 튀어 나올만큼, 그 속에 쌓인 것이 많구나 싶었다.
“네 애비가 내 다리를 더듬는데 그걸 쳐다보고도 네년이 그랬지? 내가 암캐마냥 꼬리를 치고 다닌다고, 같은 여자로서 미안하지도 않니?”
쫙, 쫙.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보고 받은 서류에는 성희롱이나 성추행에 관련해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우희는 참고 견뎠을테다. 이 뭣같은 회사에서 잘린다면 당장 가정보육원의 생활이 위태로워지니까 자신이 아닌 타인을 먼저 챙긴 것이다.
멍청했고, 바보 같은 행동이다.
그러나 난 우희를 욕할 자격이 없다.
그녀의 삶을 힘들게 만든 것엔 내 잘못도 있으니까, 이 멍청한 천우진이 이건이라는 그 버러지같은 놈에게 당했기 때문이다. 전 삶, 과연 우리 우희는 얼마나 지옥같은 삶을 견뎠을까?
내 삶이 지옥이라 생각했었다. 적어도 회귀하기 전, 단두대에 모가지가 뎅강 잘리기 전에는 말이다. 그 전까지 난 제법 성공한 삶이었다.
나도 모르게 오 부장이라는 놈의 손에 시선이 닿았다. 그러나 아직은 내가 나설때가 아니니 참았다.
오민희의 뺨을 두대 더 올려부친 우희가 밀치듯 오민희를 쓰러뜨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오 부장을 날카롭게 쏘아본다.
“오늘 고소장 날아갈테니까, 법정에서 봅시다.”
제법이었다.
귀여운 복수였다.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복수의 한계는 이 정도가 끝인거다. 아직 교육받지 못했고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한계가 지금수준일 뿐이었다.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았을텐데, 그래도 너무 착했다.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지금과 다른 반응이었을테다. 그리고 그걸, 난 오늘 보여줄 생각이다.
우희는 내가 믿는사람, 내 핏줄이니까.
세상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오늘, 오빠로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를 대신해, 얼굴 한 번 뵙지못한 어머님을 대신해, 알려줄 생각이다. 잔인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 좁혀진 나와 우희의 관계가 조금은 어색하게 변할지도 모르지만 보여주어야 한다.
어제, 나는 우희에게 가진바 힘을 이롭게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스스로를 이롭게 만들면서도 세상을 이롭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실제로도 우희는 나와 할아버지에게 ‘좋은 일’한다고 얘기했으니까.
그리고 오늘, 나는 ‘힘’이라는 놈의 다른 사용법도 보여줄 생각이다.
부들부들.
분노로 떨고 있는 우희의 어깨를 부드럽게 부여잡았다.
“다 끝났어?”
콧김을 씨익, 뿜어낸 우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오빠.”
“지금부터 잘 봐, 우리 천가는 원한을 잊지 않으니까.”
“응.”
우희가 뒤로 물러나고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오 부장, 그리고 그를 넘어 대양실업의 임원진과 회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대충 감이 오나?”
< 제 131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