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29화. >
“그 꿈, 내가 이뤄드리리다.”
“앜, 그게 뭐얔 무슨 오빠가 도사님이야?”
확실히 어색함이 많이 풀렸다. 서슴지 않고 내게 농을 건네오니, 오히려 이런 모습의 우희가 난 더 좋았다.
“오! 우진 잘 됐다. 마침 허니는 아주 큰 유치원을 여러 개 가지고 있잖아?”
어색한 발음의 우희의 영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얘기하는 루시. 그녀는 내 뜻을 완벽하게 이해한 모양이다. 나는 정말 커다란 유치원을 가지고 있었다. 콕 집어서 내 소유라고 하긴 조금 그렇고, 할아버지와 공동 소유라고 보는 것이 옳다.
‘천가 키즈’ 프로젝트로 출발한 사업.
이제는 정말 커다란 규모가 되었고 그 프로젝트의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시기.
루시의 말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 재단 이사장이 인숙이였던가?”
“예, 정인숙 이사장이 관리 중입니다.”
“좋구나, 이참에 우희가 정 이사장에게 일을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정인숙 이사장은 본래 화류계 출신이었다.
화류계 출신답게 그녀의 인생도 다사다난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악착같이 버티고 버티다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사채시장으로 흘러들어온 부류였다. 강한 여자니까 우희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희만 괜찮다면 얼마든지요.”
지이이잉, 지이이잉.
때마침 우희의 휴대폰 진동 소리가 울린다.
인상을 찌푸린 우희가 휴대폰과 우리를 번갈아 쳐다본다.
“누군데?”
“회사.”
“아아.”
그러고 보니 아직 사직서도 제출하지 않은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회사라면 언제든 그만두어도 된단다. 우희야, 네가 할 일은 많아, 하고자 하는 일을 결정만 하거라.”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우희.
나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말했다.
“오늘은 좀 그렇고, 내일은 같이 네가 다니던 회사를 가 볼까?”
“오빠가?”
“응, 사직서도 낼 겸 뭐, 겸사겸사. 너도 오빠가 같이 가는 게 든든하지 않겠어?”
일부로 좀 과장되게 팔뚝에 힘을 주며 말했다.
피식 웃는 우희.
“그래, 같이 가자 오빠.”
할아버지가 잠시 날 빤히 바라본다.
‘이놈아, 같이 가서 뭘 하려고?’
‘글쎄요?’
‘우희 놀랄라, 살살 하거라.’
‘봐서요.’
나와 할아버지의 눈빛 대화를 눈치채지 못한 우희와 루시는 방긋방긋 웃으며 대화를 이어 나간다.
나는 솔직히 궁금했다. 과연 우희는 자신을 괴롭히던 직장동료들에게 어떻게 할지가.
나와 할아버지를 닮았다면.
우희도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의 여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감이 절로 끓어올랐다.
할아버지도 궁금한지 잠시 망설이다 말한다.
“흐음, 나도 같이 갈까? 그 회사에 말이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할아버지는 장관으로서 일하셔야죠.”
“매정한 놈.”
“가족 단위로 몰려가는 건 좀··· 짜치잖아요?”
“쯧. 내 몫까지 하고 오거라.”
“옙!”
***
천가 키즈 교육원의 널찍한 운동장.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어! 언니 움직였어요!”
“아니야! 나 가만히 있었어!”
“거짓말! 움직이는 거 다 봤거든여!”
“정말인데? 안 움직였는데?”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아주는 우희와 루시.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두 여인과 많은 수의 아이들은 티 없이 맑은 것이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우희와 루시, 그리고 아이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세속의 찌든 때가 씻겨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평화롭구나.”
“네, 그렇네요.”
“우희가 재단 일에 흥미를 보이는 것 같으니 좋구나, 우리같이 닳고 닳은 어른보다는 진심으로 아이들을 위하는 어른이 좋지.”
구구절절 옳은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와서는 할아버지도 나도 시가를 입에 물지 않았다. 기본 매너같은 것이다.
대신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또래의 여아가 건네준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네 놈은 언제 아이를 낳느냐? 아까 사탕을 준 여아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더니.”
“별을 봐야 달을 따든, 별을 따든 할 것 아닙니까?”
“쯧, 2년은 기다리란 소리구나.”
“그렇죠? 루시도 학업을 끝내야 하고요.”
“1년 1년이 다르다 이놈아, 할애비 목 빠지기 전에 만들어 와.”
“하하하, 뭐 물건도 아니고 쉽게 말씀하시네요.”
“우희가 오면서 느낀 거지만, 역시 집은 북적북적해야 집 같더구나, 식구 하나 늘었다고 집에 훈내가 진동해.”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사이, 정호석이 조용히 다가왔다.
“회장님, 포도밭에 대원들이 도착했습니다.”
“주변 정찰 확실하게 하고, 로스차일드 놈들이랑 관련된 곳은 빠짐없이 조사하라고 일러두세요.”
“예, 회장님.”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도착한 천가 키즈 교육원.
벌써 슬금슬금 해가 떨어질 기미가 보였다.
“제법 오래 있었네요.”
“그래, 슬슬 일어나자꾸나.”
나와 할아버지의 말에 백철웅이 손으로 신호를 주자 곧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러나온다.
-운동장에 있는 어린이들은 이제 저녁 식사를 준비합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운동장에 있는 어린이들은 이제 저녁 식사를 준비합니다.
아이들은 아쉬운 얼굴을 하고는 하나둘, 수돗가로 모이기 시작했다. 루시와 우희도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섞여 수돗가로 가 손을 씻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우희는 제대로 손을 씻지 않는 아이들을 도와준다.
루시도 열심히 바디랭귀지로 손 씻는 법을 교육해준다.
이윽고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아이들과 일별한 루시와 우희가 나와 할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잘 놀았더냐?”
루시도 우희도 행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더냐 우희야, 가정보육원 아이들이 좋아하겠지? 이곳에서 생활한다면 말이다.”
“네, 아이들이 하나같이 모난 곳 없이 행복해 보였어요.”
“제법 큰 아이들도 있더구나.”
우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은 늦었으니 다음에는 중, 고생들이 교육받는 교육원에 가자구나.”
“그런 곳도 있어요?”
“그럼, 원한다면 대학까지 교육원에서 생활할 수 있단다. 대부분 공시생이나 고시생, 의과대학이나 석, 박사를 준비하는 아이들이 머무는 곳이지.”
“와아.”
듣기만 해도 놀라운지 나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던 우희가 말한다.
“돈이 엄청 많이 들겠네요··· 학비가 비싸잖아요.”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같이 열정적인 친구들이라 학교에서도 장학금을 받는 아이들이 많아. 그리고 SKY그룹으로 취업 연계도 되고, 교육원 출신 아이들의 월급 일부는 다시 교육원 후원에 사용돼, 물론 동의를 받고 이루어지는 거고, 요즘은 부쩍 후원해주는 다른 기업들도 많아, 좋은 마음을 가진 독지가들도 많고, 아마 할아버지가 복지부 장관이라서 그럴 거야.”
“이놈이 굳이 할애비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구나.”
우희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 우리 오빠는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거네?”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이제 네가 해줄 일이지, 미래에 우리 SKY와 이 대한민국의 기둥이 될 아이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게 재단 일을 열심히 해 봐.”
“응! 내 적성에 맞을 것 같아.”
“다행이네.”
루시가 불쑥 끼어들었다.
“자~ 이제 한국말 다 했어요?”
우희도, 나도, 할아버지도 피식 웃어버렸다.
“자 그럼 이제 두 남자는 먼저 집으로 가시고~ 나와 우희는 쇼핑하러 갈 거랍니다!”
“쇼핑이요?”
우희도 몰랐는지 화들짝 놀란다.
“그럼! 아가쉬도 앞으로 재단을 맡아야 하고, 또! 내일 전 직장에 사표도 던져야 하고! 그리고 원래 살던 곳에 좋은 선물도 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는 여자의 생필품이 없다.
이런 부분을 세심하게 챙겨주는 루시.
마침 나와 할아버지도 따로 갈 데가 있으니 잘됐지 싶었다.
“그렇게 하시죠. 할아버지? 마침 우리도 잠시 볼 일이 있잖아요?”
“그러자.”
나는 백철웅을 쳐다보며 말했다.
“루시와 우희를 부탁드릴게요. 대표님.”
“예, 회장님.”
***
끼이익.
차량이 멈추고, 나와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차에서 내려 천천히 창고 내부로 깊숙하게 들어갔다.
내부의 비밀스러운 공간, 널따란 공터 같은 곳에 즐비한 드럼통들.
“꺼내거라.”
할아버지의 명에 PMC의 정예중 일부가 빠르게 움직여 드럼통 내부에 갇혀 있던 히스패닉계 용병들을 꺼낸다. 이미 대원들에게 마사지를 받았는지 여기저기 몸이 성치 않은 놈들.
“할아버지한테 총질했다는 놈들이죠?”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간이 사무실 내부에서 날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저놈이 테드 존스인가봐요?”
내 질문에 정호석이 ‘예!’하고 대답했다.
“나는 이놈들과 볼일을 볼 테니, 너는 안에 들어가서 볼일 보거라.”
“예.”
끼이익.
조립식 판넬 문을 열고 사무실 내부로 들어서자 테드가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놈은 내게 미국식 인사라도 건네고 싶은지 손을 내밀지만, 난 놈과 악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놈을 지나쳐 소파 상석에 궁둥이를 붙이며 물었다.
“거래가 하고 싶나?”
놈이 소파에 궁둥이를 붙이며 답한다.
“그렇습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새끼 앉은 위치가 영, 마음에 안 드네요.”
정호석이 빠르게 움직여 놈의 머리끄덩이를 잡더니 소파에서 끌어내 바닥에 무릎 꿇린다.
“이제 좀, 눈높이가 맞네, 그렇지?”
테드라는 놈이 날카롭게 날 쏘아본다.
처음 사무실에 들어왔을 땐 노란색이던 놈의 연기가 이제는 완전히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런 식의 강압으로 내 입을 열게 할 순 없다.”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었다.
역시 교활한 여우 같은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놈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었다. 날 평범한 사업가 나부랭이로 봤다면 큰 오산이다. 로이드 로스차일드, 그 로스차일드가의 망나니 같은 놈도 누군가를 납치하란 지시를 내리거나 죽이라는 지시를 내린다.
“네가 크게 착각하는 게 있어.”
놈이 날 똑바로 쳐다본다.
“너는 아마도 로스차일드가의 비밀스러운 정보를 내게 거래하려 했겠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놈.
“거래는 말이야, 사이즈가 맞는 상대와 하는 거야, 너와 난 사이즈가 다르거든.”
“로스차일드에게 복수할 생각이 없는 건가!”
발악과도 같은 외침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복수는 당연한 얘기고, 굳이 네놈이 가지고 있는 그 비밀스럽단 정보 따위도 필요가 없어, 난 얼마든 로스차일드를 부숴버릴 힘이 있으니까.”
“너는 로스차일드를 모른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날 잘 모르는 것뿐이야. 네 그 가벼운 주둥이를 열게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거든.”
“허튼수작이야, 난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놈이니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서져 정호석이 얼른 품에서 군용대검을 꺼내 내게 건넸다. 그리고 난 그것을 오른손으로 받아들어 망설임 없이 무릎 꿇고 앉아 있는 테드의 왼쪽 허벅지를 찍었다.
“끄아아아악!”
“부디 네 주둥이가 무거웠으면 좋겠군, 아직 밤은 기니까.”
“미, 미친···”
“네가 내 동생을 노리는 순간, 네가 로이드 로스차일드의 뒤에서 이건과 협작질을 하려던 순간, 이미 네 운명은 정해져 있었지.”
“······”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너와 로이드 로스차일드의 운명은 같다. 너희들에게 내가 허락한 것은 ‘죽음’ 뿐이야. 애초에 네놈이 가져온 정보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넌 살 수 없다.”
내 눈을 빤히 바라보는 놈의 동공이 흔들린다.
“살려주시오.”
“얌전히 아는 것을 불고 깔끔하게 죽느냐, 끝까지 버티며 고통 속에 정보를 토해내고 죽느냐, 두 가지 선택지 중 골라, 이왕이면 후자였으면 좋겠군.”
-끄아아아아악!
때마침 바깥에서 할아버지가 볼일을 시작했는지 끔찍한 비명이 창고 내부에 메아리쳤다.
< 제 12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