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28화. >
테드가 명동의 주택가에서 천혁수 장관의 집을 한 번 올려다본다.
“후우.”
초인종을 누르려 손을 뻗는데 뒤쪽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테드는 본능적으로 그들의 목적이 자신이란 것을 깨달았다.
“뭡니까?”
“테드 존스, 맞습니까?”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사내의 질문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테드.
“우리와 함께 가시죠, SKY에서 나왔습니다.”
그 순간 테드는 이미 자신이 SKY에 의해서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질 싸움을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자신들이 이건에게 접촉했을 때, 그리고 자신의 직원 중 하나가 행방불명되었을 때, 그때 느꼈던 이상함을 해결하지 못한 패착.
그것이 지금의 패배란 결과로 돌아온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원래의 그였다면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넜을 텐데, 로이드 로스차일드가 하도 재촉하니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쯧, 누굴 탓해···”
스스로가 병신이었는데 누굴 탓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테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갑시다.”
“예.”
차량 뒷자리에 올라 조수석에 타 있는 사내에게 묻는 테드.
“천우진 회장을 만나러 가는 겁니까?”
“가시면 압니다.”
날카롭지만 정중한 태도.
직원들의 태도로 보아 테드는 제 뜻을 이룰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천우진.
어린 나이에 코딱지만 한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글로벌 세계기업을 만들어낸 입지전적인 인물. 그런 사업가라면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포지션을 취하지 않을까? 현재 테드가 가지고 있는 로스차일드의 많은 정보를 제값을 주고 구매할 유일한 사람. 총기까지 사용해 공격했으니 그로서도 로스차일드가 아니꼬울 테니 성공적인 거래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 테드.
“아침을 걸렀더니 배가 고프군요, 가는 길에 식사 정도는 괜찮겠습니까?”
조수석에 앉은 인물이 모호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하는 표정이다.
“뭐라는데 인상을 구겨?”
“밥 먹자는데?”
“또라이 새낀가?”
“그러니까 우리한테 총 지랄했겠지.”
운전하는 이와 조수석에 앉은 이가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데 그 분위기가 가벼웠다. 자연스럽게 테드는 제 생각이 어느 정도 맞아 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도착하면 밥 준다고 그래, 식당은 아니지.”
“쯧, 그러지.”
이내 조수석에 앉은 이가 테드를 바라보며 영어로 말했다.
“도착하면 따로 식사를 마련하죠, 우선 이동을 먼저 합시다.”
테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속이 좋지 못하니 편안한 음식으로 준비해주세요.”
조수석 사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OK. 속을 게워내는 걸 보는 것도 좀 별로니까.”
‘OK’란 말 이후로는 한국어였기에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테드, 그러나 알겠다는 대답을 들었으니 만족스럽게 웃으며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고는 눈을 감는다. 마치 편안한 여행을 하는 사람처럼.
***
아산댁 아주머니의 요리는 언제나 일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조금은 의기소침하던 우희도 바쁘게 젓가락을 움직일 정도로 모든 반찬이 맛있었다. 할아버지가 버섯볶음을 우희의 밥 위에 얹어주며 말했다.
“자연산 표고란다.”
“자연산 표고버섯이요?”
“그래, 먹어본 적 있느냐?”
고개를 젓는 우희.
당연히 먹어봤을 리 없다.
상당히 귀한 식자재 중 하나니까.
그러나 할아버지에게는 일상과도 같았기 때문인지 인지하지 못하신 모양.
우물우물 버섯을 씹던 우희가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와, 꼭 고기를 씹는 것 같아요.”
“맛있다니 다행이구나.”
난 피식 웃으며 루시의 밥 위에 표고버섯을 올려주었다. 루시가 밝게 웃으며 윙크하고는 맛있게 먹는다. 사실 식탁 위에 어지간하면 자연산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건강을 생각하는 아산댁 아주머니는 식재료 하나도 신중하게 고르는 분이니까.
“우희는 오늘 뭘 하고 싶어?”
내 질문에 잠시 말똥말똥 날 바라보던 우희.
“딱히 뭘 해야 할지 모르면 오늘은 같이 움직일까?”
“네.”
“말 편하게 해 우희야 이제 우리 식구잖아.”
“응···”
아직은 어색하지만, 차차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뭘 할 생각이더냐?”
“우선 우희 호적에 올려야죠?”
할아버지가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들어 올리신다.
“좋은 생각이다. 그다음은?”
“듣기로는 가정보육원에서 생활했다는 것 같은데, 그 보육원 아이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줄까 싶습니다. 어쨌든 우리 우희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냈을 아이들이니까요.”
할아버지가 잠시 기특하게 날 바라보다 우희에게 시선을 옮겼다.
“우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음··· 워낙 예민할 나이의 아이들이라···”
“그러니 우희 네가 먼저 보거라, 아이들이 지낼 장소를 우리 천가는 정말 많은 교육시설과 보육시설을 운영하고 있단다 따로 재단도 있어.”
“아, 뉴스에서 봤어요.”
“그래, 오늘 그쪽을 한 번 살펴보고 그다음에 우희 네가 생활했다던 가정보육원에 가보자꾸나.”
“네, 할아버지.”
***
SKY라인 인천 물류창고.
전 세계로 뻗어나는 유통회사답게 창고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규모가 형성되어 있었다. 컨테이너들이 마치 미로처럼 쌓여 있는 곳도 많았다.
테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곳이 약속 장소입니까?”
“SKY라인의 물류창고입니다. 당연히 사무실도 많이 있죠.”
“흐음.”
테드가 탑승한 SUV는 빠르게 대단지 창고를 가로질러 겉으로 보기에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운 건물로 진입했다.
어느 순간, 차량이 멈춰서고 운전하던 사내와 조수석에 앉은 사내가 차에서 내린다. 테드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따라오시죠.”
조수석 사내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테드.
어느새 걷다 보니 어두컴컴한 창고 안 분위기에 절로 긴장되는지 침을 삼키는 그.
차에서 내려 걷기를 10여 분.
다시 환한 불빛이 보이고 커다란 드럼통들이 즐비한 곳에 도착한 그들.
많은 드럼통 중, 비스듬히 뚜껑이 열려있는 드럼통 안을 우연찮게 쳐다본 테드.
“흡!”
그는 순간적으로 온몸의 털이 쭈뼛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드럼통 안, 분명한 인간의 두 눈이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뭡니까!”
운전을 담당하던 사내가 피식 웃으며 드럼통 하나의 뚜껑을 완전히 열었다. 그 안에는 깨 벗고 피 흘리고 있는 히스패닉계 사내가 온몸이 결박된 채 쪼그려 앉아 있었다.
당연히 일어설 수는 없었다. 온몸이 결박되었으니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눌 수 없을 테니까.
“네가 보낸 새끼들이잖아.”
침을 꿀꺽 삼킨 테드.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테, 테스트군··· 내가 가진 정보를 싼값에 뽑으려는 테스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테드의 어깨를 툭 치는 사내.
“흐헙!”
테드가 화들짝 놀라며 사내와 거리를 벌린다.
“저기 간이 사무실에 들어가 있으시면 됩니다. 회장님은 해 떨어져야 뵐 수 있을 테니, 얌전히 기다리세요.”
피식 웃으며 돌아섰던 사내가 다시 테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아직도 식사를 하고 싶으신가?”
테드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히스패닉계 사람들의 몸뚱이의 시퍼런 멍과 아직도 흐르는 핏물을 보니 입맛이 싹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
여자들은 항상 외출 준비를 오래 한다.
평상시 검소하게 생활했을 우희는 외출 준비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루시의 손에 이끌려 거울 앞으로 끌려간 상태였다.
나는 먼저 외출 준비를 끝내고 마당에 앉아 잠시 볕을 쬐며 앉아 있었다.
“회장님, 테드 존스 인천창고에 도착했습니다.”
호석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우리 정예 대원중에 우희와 함께 다닐 사람이 있을까요?”
“김소영 대원과 이아영 대원이 적합하리라 생각됩니다.”
“어째서요?”
“김소영 대원은 침착하고 운전 능력에서 최고점을 받았습니다. 이아영 대원은 최고의 연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 다 어떤 상황에서도 준수한 대처 능력을 보입니다.”
김소영이 운전을 맡고 이아영이 밀착 경호를 맡는다.
“괜찮네요, 오늘은 아니고 조만간 인사시켜주세요.”
“예, 회장님.”
“그 밖에 따로 4인 3개 조로 24시간 경호 붙여주시고요.”
“예, 조치하겠습니다.”
어느새 할아버지도 외출 준비를 끝내셨는지 내 앞에 앉아 시가를 입에 물며 전화기를 꺼내 드셨다.
“복지부장관 천혁숩니다. 내가 잃어버린 손녀딸을 찾았는데, 오늘 중으로 호적에 올리고 성을 바꾸고 싶습니다. 지금 양씨성인데 우리 ‘천’씨 성으로요.”
복잡한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함이었던 모양.
“예,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좋습니다 언제 한 번 식사같이 하지요.”
아주 짧은 통화가 끝나고.
“뭐래요?”
“서류만 작성해서 올리라는구나, 동네 동사무소에서 올리면 다이렉트로 처리 될 게다.”
“따로 방문할 필요도 없는 거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네놈도 우희가 직접 ‘천우희’라 적 길 바라는 것 아니었느냐?”
역시 식탁에서 했던 말의 진의를 알고 계신 할아버지. 히죽 웃는 사이 기다리던 여자들이 나타났다. 둘 다 어디 내놓아도 빼어난 미모였다. 지나가던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마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면 많은 차가 빨간불에도 정차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가죠.”
“그래.”
***
프랑스 보르도의 북서쪽.
로스차일드 가문이 14세기부터 소유하고 있던 커다란 농장지대와 양조장. 전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의 와인을 만들어내는 곳답게 근처에만 가도 포도 향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드는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 야음을 틈타 작은 집에 모여들었다.
농장지대가 많고 가옥과 가옥의 거리가 제법 멀리 떨어져 있기에 그들의 특이함을 눈치챈 인물들은 없었다.
관광객으로 위장해 집을 하나 통째로 빌린 그들은 SKY PMC의 정예 대원들이었다.
“모두 모였나?”
“예, 2시간 전, 모든 대원이 모였습니다.”
“좋아, 아직 작전지시가 없으니 작전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대기한다. 실전이야, 항상 경계를 최상으로 하도록.”
““예””
***
독일의 유명 브랜드 15인승 차량.
물론 보통 출시되는 차량과는 차원이 다른 차였다. 방탄 시설도 개조되었고 차량 시트도 리무진 시트로 개조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편안한 이동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우희가 동사무소에서 가져온 가족관계증명서를 손바닥으로 슥, 슥 쓸어낸다.
“녀석, 먼지 하나 없는데 자꾸만 쓸어내느냐.”
우희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냥··· 더러워지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언제든 뗄 수 있다, 전화 한 통이면 당장에라도 가족관계증명서를 가지고 올 놈들이 쎗어.”
“그래도요··· 이상해요 막, 그래요.”
동사무소 내부에서도 ‘천우희’라는 이름을 적으면서 루시와 함께 눈물바다를 만들더니, 또 그럴 기미가 보였다. 그런 모습들이 마냥 귀엽고 뿌듯하게만 느껴졌다.
“차에서 활자를 보면 멀미한다, 그만 가방에 넣거라.”
“네~”
갈 길이 제법 머니 우희에게 질문을 건넸다.
“우희야, 하고 싶은 거 있어?”
“하고 싶은 거?”
잠깐 사이에 부쩍 반말이 편해진 모양. 이제는 자연스러운 반말로 대꾸한다.
“응, 꿈 같은 거.”
“음··· 난 꿈이 현모양처였는데.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거든.”
녀석은 말을 꺼낼 때마다 자꾸만 코를 시큰하게 만드는 신기한 재주가 있다.
“그런 거 말고, 해보고 싶었던 직업이라던가, 돈이 생기면 꼭 사고 싶었던 게 있다던가.”
우희가 해맑게 웃으며 말한다.
“벌써 다 생겨버렸어, 가족도, 가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도.”
또, 또.
또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대답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지 할아버지도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루시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억울해서라도 빨리 한국어를 배워야겠어,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덕분에 할아버지와 내가 피식 웃으며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아 언니 미안, 최대한 영어로 얘기해 볼게.”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더니, 제법 영어가 자연스러웠다. 물론 발음 자체는 전형적인 콩글리시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의사소통이 된다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 나는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오빠.”
“유치원?”
마침 그런 거라면, 내가 제법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유치원을 말이다.
“응, 아이들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정말 좋았거든.”
히죽 웃으며 일부러 도사 같은 느낌으로 과장되게 말했다.
“그 꿈, 내가 이뤄드리리다.”
< 제 128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