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27화. >
인간은 언제나 선택을 강요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무엇을 선택하든 책임은 스스로가 짊어지고 살아간다. 때론 그 책임을 회피하고자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남들에게 ‘성공했다’란 말을 들을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모두가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내 누이, 이제는 내 여동생이 된 우희를 꼭 껴안고 있는 지금도.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품에서 그녀를 떨어뜨려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기쁨과 희열이 가득한 눈동자, 천천히 슬픔은 희석되어 사라지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한 눈을 보고 있자니 차마, 그녀에게 충격적일 수 있는 얘기를 꺼내기 어렵다.
그녀에게 얘기할 것은 당연히, 그녀의 삶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놈들의 처우였다. ‘이건’이야 이미 처리했다고 해도 과언이니 논외로 치더라도, 여태껏 살아오며 그녀를 서글프고 힘들게 했던 것들에대한 처우.
“자, 오늘만 날이 아니니 회포는 천천히 풀자구나, 우희도 아직은 많이 혼란스러울테니 우리가 기다려야하지 않겠더냐?”
시의적절한 할아버지의 끼어들기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고 우희 역시 고개를 주억거린다.
“오늘 아침밥은 진짜 맛있겠네요.”
내 말에 할아버지가 함지박 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그렇지,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는 언제나 만족스럽지.”
할아버지를 따라 나도 빙그레 웃었다.
“가···족···”
작은 목소리로 홀로 읊조리던 우희가 이내 히죽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기대감 가득한 얼굴을 하고는 눈물을 흘렸던게 창피했는지 화장실로 쫄래쫄래 사라졌다.
잠시 우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려 발코니로 나갔다. 태우다만 시가를 다시 입에 무는 찰나.
“이놈아, 얘기하지 않았더냐? 우리와는 다르다고.”
벌써부터 ‘복수’를 물으려 하냐는 꾸짖음이었다.
“글쎄요, 영락없는 천가 핏줄이던데요?”
“파하, 그래도 며칠은 쉬게 둬, 잡놈들을 치우기 어려운 것도 아니니.”
할아버지 말씀이 옳다.
당하는 사람에게는 지옥같은 경험일지 모르나, 상대적으로 뭣같은 꼴을 많이 봐온 나와 할아버지에게는 우희를 힘들게 만들던 놈들은 ‘잡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딱 절절한 표현이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선택하기로 했다.
“우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하죠.”
“굳이 오늘 묻겠다는 것이냐?”
“아뇨, 며칠은 쉬죠? 누구 명이라고 어기겠습니까?”
“그래.”
“대신, 제가 사드린 차를 상처입힌 놈들은 참아주기가 어렵습니다만.”
할아버지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피차일반이다.”
“그럼 오늘 저녁엔 술을 너무 과하게 드시지 않는걸로.”
“오냐.”
***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시끄럽게 울리는 호텔 전화기를 물끄러비 바라보는 테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다크서클은 그의 하얀 피부에 대비되며 더욱 검게 보였고, 붉게 충혈된 눈과 푸석한 피부가 요 며칠 그가 제대로 쉬지 못했음을 여실히 느끼게 해준다.
“후우···”
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시끄럽게 울고 있는 저 전화를 건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철컥.
전화기를 들어올린 테드.
-장난하나?
“죄송합니다 보스.”
-내가 만만해?
“아닙니다.”
-근데 도대체 몇 번이나 전화를 씹는거지? 휴대전화는 왜 연락이 안 되고? 굳이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호텔에 연락을 해야하나?
“면목 없습니다.”
-분명 한국시간으로 금일 새벽에 작전이 끝난다고 하지 않았나? 왜 보고가 없어!
고래고래 소리치는 로이드 로스차일드.
테드도 그 못지 않게 분노했지만 차마 그것을 표출할 순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손아귀에 피가 흐르도록 주먹을 꽉 쥐어보지만 그의 분노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실패한것으로 추측됩니다.”
-머더 퍼커!
혐오스러운 쌍욕이 로이드의 입에서 튀어나오지만 인상도 제대로 찌푸리지 못하는 테드. 자신이 로이드와 같은 상황이라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표현이었다.
“사표는 제출하겠습니다.”
-왓더 퍽 디쥬 세이?
“그만 두겠다는 얘기입니다.”
-이 병신같은 게, 네 요구를 들어주느라 사용한 자금이 얼마인지는 알고 얘기 하는건가?
맹목적인 욕설에 테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테드는 어떤 결심이 선 눈이었다. 마치 뒤가 없는 인간과 같은 눈.
“그럼 시발 도대체 어쩌라는 겁니까? 내가 회계사라는 걸 잊은건 아닙니까 보스? 이딴 저열한 짓거리가 내 업무입니까? 애초부터 뭣 같은 일을 시킨건 너 잖아!”
-··· 제정신이 아니군.
“너야 말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더 이상 어린아이 장난 같은 짓거리로 내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그만둔다.”
-네가 로스차일드를 벗어나 하루라도 숨 쉴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나?
테드가 얼굴을 쓰러내리며 말했다.
“지금 바로 SKY로 향할 생각이야.”
-뭐? 무슨 개같은 소리지?
“네가 천우진의 약점을 원했던 것 처럼, 천우진도 너의 약점을 원하고 있지 않을까? 원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적절한 금액에 사 줄수 있을 것 같은데?”
-이 개새끼가! 지구에 로스차일드의 눈을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있을거라고 생각해!
“정신차려 이 멍청한 애송이 새끼야!”
버럭 소리를 질러버린 테드의 목소리에 놀랐을까? 잠깐동안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로스차일드는 아직 네 것이 아니야, 착각하지마 가주께서 두 눈을 부릅뜨고 계시지, 그리고 아직 넌 경쟁자인 네 형을 넘어서지 못했어, 병신같은 망나니 주제에··· 내가 네 놈을 선택한게 패착이야.”
-함부로 지껄이는 군··· 어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봐, 나는 너 하나 죽이는데 10억달러까지 투자할 자신이 있으니까.
쾅!
테드는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어금니를 짓씹었다. 10억달러는 커녕 천만달러만 쥐어주며 자신을 죽이라고 의뢰한다면 당장 죽이겠다고 달려들 놈들이 지구에는 넘쳐흐른다는 걸 결코 모르지 않기 때문이며, 로이드 로스차일드는 진심으로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얼마가 되었든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을 놈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천우진에게 붙어 먹겠단 얘기는 결코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밤새 용병들의 연락을 기다리며 고민했었다. 이번 일이 실패한다면 어차피 로이드 로스차일드에 의해 자신의 인생은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충성심 따위로 이루어진 관계는 아니었다. 고용주와 고용인 그 이상의 어떤 유대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로스차일드의 현 가주가 그를 망나니에게 보낸 순간부터 지금과 같은 일은 시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어차피 같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그였다.
힐끗 시계를 쳐다보니 오전 7시가 다 되었다.
한국은 보통 8시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 샤워하기 시작했다. 로스차일드에서 퇴직금을 입금해 줄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자신의 머릿속 정보의 가치를 제대로 매겨줄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명 뿐이란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으니까.
쏴아아아.
“부디 많이 챙겨주라고.”
그는 머릿속으로 천우진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다 이내 따뜻한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
오전 7시 반.
“킁킁, 맛있는 냄새! 들깨 미역국!”
편안한 옷차림으로 주방 앞에서 오늘의 국을 맞추는 여인. 그녀는 나의 반려 루시였다.
“벌써 일어났어?”
“잠도 안 잤어, 비행기에서 너무 많이 잤나 봐.”
할아버지가 보고있던 신문을 내려놓고 말했다.
“하하, 잘 되었다. 아침부터 식구들이 많으니 좋구나.”
루시의 고개가 슬며시 우희를 향해 돌아갔다.
내 옆에서 할아버지가 다 읽은 신문을 읽고 있던 우희의 눈도 그녀를 향한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우희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루시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우희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루시, 여기는 내 여동생. 우희야 루시는 내 와이프.”
루시가 환하게 웃으며 우희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와아 반가워요, 아 영어를 할 줄 아나요?”
“조금, 아주 조금··· 천천히 말해주세요.”
“오오! 발음이 좋아요! 음, 우진의 여동생이니까 어··· 한국말로 씨누! 씨누 맞죠?”
“아, 그··· 미스? 아니 그게 맞나?”
‘아가씨’의 표현이 영어단어로 애매한 모양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루시, 한국말로는 ‘아가씨’라고 해.”
“아하! 아가쉬! 아가쉬 너무 예쁘다! 우진이랑 닮았으면서 안 닮았어!”
“언니도 예쁘세요.”
어딜 가서도 예쁨 받을 스타일인 루시는 미국에서도 유명했던 인싸 답게 오늘 처음만난 사이임에도 우희와 수십번은 만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리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은지 할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으신다.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아산댁의 말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식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 식탁에 앉으려는 내게 정호석이 다가왔다.
“회장님, 보고 드릴게 있습니다.”
“중요한 건가요?”
우희와 갖는 첫 식사를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아이고! 아직 국이 덜 끓었네~ 5분만 대화좀 나누시겠어요 어르신?”
아산댁의 센스있는 말에 할아버지가 여유롭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미안함을 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벗어났다.
“뭡니까?”
표정이 좋지 않았기에 정호석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며 예를 표하고는 보고를 잇는다.
“로이드 로스차일드의 오른팔, 테드라는 놈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도피인가요?”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예상밖의 전개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우리 집으로요?”
“예.”
잠시 짧은 생각에 잠길 수 밖에 없는 보고였다.
로스차일드의 유능한 회계사로 불리던 테드 존스.
그 놈이 굳이 호랑이굴에 제발로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아.”
짧은 생각 끝에 놈의 생각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여우같은 놈이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싶은 모양이네요.”
“예?”
호석은 내 말을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
“놈은 똑똑합니다.”
“예, 그런 것으로 추측됩니다.”
“살고 싶은 모양이네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호석.
“놈이 용서라도 빌 것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피식.
똑똑한 미국놈이 그럴리가 있나.
“아뇨, 놈은 내게 거래를 요구하려는 겁니다.”
“아아.”
그제야 내 생각이 무엇인지 깨달은 호석,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며 ‘확실히’하고는 작게 읊조린다.
굳이 놈이 찾아오지 않아도 오전중에 놈을 인천창고로 포장해 놓을 생각이었다. 이미 놈의 호텔에서부터 마킹이 붙어 있었으니 정호석은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을테다.
언제든 ‘잡아오세요’하면 인천창고로 배달되었을 몸뚱이었다.
“적당히 인천창고로 보내세요, 놈이 무엇을 말하고 싶던 지금 시간은 아닌 것 같으니까, 놈이 원하는게 ‘삶’이라면 순순히 따라갈겁니다.”
“예··· 혹시 거래가 만족스럽다면··· 그놈을 살려주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정호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떨것 같습니까?”
내 눈을 잠시 빤히 바라보던 정호석이 히죽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눈을 바라본것 만으로도 내 뜻을 이해한 모양이다.
막 현관문쪽으로 움직이려는 호석을 불렀다.
“아, 삼촌.”
뒤를 돌아보는 호석, 어느새 아랫사람이 아닌 내 삼촌이 되어 인자하게 웃으며 말한다.
“왜?”
“직원들 시키시고, 오늘은 삼촌이랑 철웅삼촌까지 같이 아침드시죠? 가족 식사인데 삼촌들 빠지면 좀 그렇잖아요? 우희랑도 좀 친해지셔야죠.”
가족 식사라는 말에 호석 삼촌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밝게 웃는다.
“음··· 그럴까?”
“예, 철웅삼촌 모셔오셔요 수저 놓고 있을게요.”
“그래, 고맙다.”
< 제 127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