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26화. >
이곳은 한국이기에 총기를 사용하던 놈들도 권총이 한계였던 모양이다. 백철웅은 천우진이 굳이 방탄 차량을 준비하는 것을 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역시나 그의 선견지명은 혀를 내두르게 하기 충분했다.
어떤 일이든 이유 없는 일이 없었다. 사소한 지시 하나라도 분명한 이유가 있고 확실한 대처가 된다. 굳이 지뢰도 버틴다는 차량을 한국에서 사용한다는 게 비용 낭비 같아 말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백철웅은 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때 말리지 못한 것을, 말리지 않은 것을 말이다.
퓩, 퓩.
계속 소음기 달린 총으로 천혁수가 앉아있는 자리에 총알이 박히지만, 전혀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고작 9mm탄으로는 절대 저 유리를 뚫을 수 없을터, 적어도 5.56mm 철갑탄 정도는 돼야 할테다. 그것도 단발이 아닌 연사가 가능한 소총이 필요하다.
부아아아아앙!
오토바이 3대가 양쪽과 뒤쪽까지 계속 권총질을 하지만 차량은 끄떡없다.
끼이이이익 콰앙!
그리고 뒤쪽에서 쫓아오던 놈들의 SUV 두 대는 이미 전복되었다. 모든 게 다 PMC정예대원들이 의도하는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새 차량은 고가도로에 진입하고, 뒤쪽에서 바짝 따라오기만 하던 대원들의 차량이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바이크를 타던 놈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액셀을 밟기 시작한다.
고가 아래로 밀어버릴 기세로 달려드는 커다란 SUV들, 그리고 그 차를 피해 달아나려는 오토바이.
자연스럽게 천혁수의 차량과 놈들의 오토바이는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운전기사는 능숙하고 부드럽게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멀쩡하다고 볼 수 있는 차량 앞 유리로 전방의 풍경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고가 아래를 통제하고 있는 PMC대원들의 차량, 그리고 바닥 여기저기 쓸리고 널브러져 있는 오토바이와 정체불명의 공격자들.
탁.
정호석이 차량에서 내려 천혁수가 앉은 자리의 문을 열었다. 뚜벅뚜벅 차량의 헤드라이트 빛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놈들에게 다가간 천혁수.
복면을 벗긴 놈들 모두 히스패닉계 외국인들이었다. 정확히 어느 나라의 놈들인지 모르고, 그딴 것이 중요하지도 않은 천혁수.
백철웅에게 손을 내미니 어느 새 천현수의 손에 군용대검을 들려준다.
오른손에 대검을 꽉 쥐던 천혁수가 이내 뒤쪽의 자동차를 힐끗거리고는 다시 대검을 철웅에게 건넸다.
“쯧, 인천창고로 보내거라, 나중에 하지.”
“예, 장관님.”
천혁수는 미련이 남는 듯 못내 입맛을 다시다 다시 뒤돌아 차량에 올랐다.
“이제 다 끝났다 우희야, 정말 오늘은 편안하게 집에서 쉬자꾸나, 내일 네 오라비를 봐야지.”
“네···”
아직은 정신이 없던 천우희는 그저 알겠다는 대답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한국 땅에 발을 딛자마자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온몸을 질주했다. 기대감 설렘, 그리움 슬픔.
“댁에 계신다고 합니다.”
오전 6시.
당연히 집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각.
나는 정호석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차량에 올랐다. 물론 루시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용기 내부에서 푹 쉬었기 때문에 컨디션은 더없이 좋다.
“오늘 새벽, 습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CIA한국지부장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뭐 하는 놈들이던가요?”
정호석이 루시를 힐끗거렸다.
괜찮았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믿고 신뢰해줄 사람이니까 상관없었다.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예, 회장님. 아직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현재 인천창고에 놈들 중, 여섯을 데리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나온 정보는요?”
“우선 남미 쪽 용병들 같았습니다. 모두가 히스패닉계였으니··· 아마 멕시코에서 활동하던 놈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용인을 알고 있으니 놈들의 입이 딱히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호석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잇는다.
“장관님께서 처리하지 말라 하셨기에 대기 중입니다.”
대충 알만했다.
할아버지도 나처럼, 한 대를 맞으면 수백 대로 돌려주어야 속이 후련하신 분이다. 그러나 어젯밤 내 누이와 함께 있느라 차마 손을 쓰지 못했을 테니, 제법 분이 쌓여 있으실 터.
“알겠습니다. 그, 테드라고 했던가요?”
“예, 로이드 로스차일드의 오른팔 테드 존스입니다.”
“그놈이 머무는 호텔엔 사람들이 가 있죠?”
“예,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놈 인천창고에 포장해 오세요.”
“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운전기사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평소와 다르게 제법 과속하고 있었다. 루시도 나도, 그리고 정호석도 누구 하나 운전기사의 과속을 나무라지 않았다. 지금은 빨리 가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헬기를 이용할까 싶었지만, 집 주변에 마땅히 착륙장소가 없으니 패스했다.
루시와 함께 살면서 이사를 고민했는데,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역시, 이사해야겠단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제는 새로운 식구도 생겼으니 더 큰 집으로 이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6시 40분.
나는 심호흡과 함께 현관문을 열었다.
고요한 실내.
후르릅.
할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고 계셨다.
“쑤!”
루시가 도도도 달려가 할아버지 품에 안겼다.
“루시, 더 예뻐졌구나, 사랑이 좋은 모양이야.”
“보고싶었어요!”
“오냐, 나도 우리 손주며느리가 보고 싶었단다.”
둘의 정다운 인사에도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루시의 등을 몇 번 토닥인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쳐서 잠들었다. 아직은 적응하기 힘든 모양이야.”
고개를 주억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루시는 눈치껏 방긋 아름다운 미소로 인사하고는 조용히 방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 할아버지가 차를 마시는 소리 외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답지 않게 조용하구나.”
할아버지의 농에도 어설픈 웃음이 튀어나왔다.
“뭐라 얘기해야 할지 애매하네요.”
“잘 자랐더구나, 어려운 상황에도 인성이 올곧아.”
“그런가요.”
“가정 보육원이라는 곳에서 많은 소녀를 보살피며 살고 있었단다. 중소기업의 그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찼을 텐데, 어린 것이 벌써 헌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녀의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난날, 나 또한 보육원에 많은 지원을 쏟았으니까. 없이 산 자의 설움은 없이 산 자가 누구보다 깊이 공감해 줄 수 있는 법이다.
결핍.
가정이, 혹은 금전적인 것이, 혹은 사랑이.
보육원에 있던 대부분 아이들은 그 모든 부분에서 결핍을 앓고 있다. 세상에서 그런 우리에게 보내는 시선은 대부분 ‘동정’과 ‘무시’였으며, ‘괄시’였고 종래에는 이용하려는 놈들이 판을 친다.
그런 아이들은 ‘동정’도 ‘무시’도 싫으니 강한 척 삶을 영위하거나, 죽은 듯 조용하게 삶을 영위한다.
후자의 경우는 속으로 곪고, 전자의 경우는 많이 삐뚤어져 꼭, ‘애미, 애비 없는 것들이 그렇지’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게 허다하다.
나의 할아버지 천혁수도 대충은 이해하고 계실 테다. 그러니 그녀가 올곧게 자랐다는 얘기에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없는 이들이 일찍 철이 드는 법이니까.
“걸림돌이 몇 가지 있었다고요?”
할아버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부터 대양실업에서 우리 우희를 종처럼 부리고 있더구나··· 우희는 네 엄마를 닮아 아주 참하더구나, 아마 제법 서러운 일을 경험했지 싶단다.”
함축된 말이지만, 단밖에 할아버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뭣 같은 얘기는 그만하고, 나중에 서류로 보거라, 처리도 알아서 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처리는 누이가 직접 해야죠.”
할아버지가 날 빤히 바라본다.
“녀석, 너무 스파르타야.”
“기회입니다. 알을 깰 수 있는 기회.”
“달라진 삶에 적응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하더냐?”
“예, 제 누이가, 할아버지 핏줄이 남에게 의지만 하는 그런 사람이길 바라지 않으니까요.”
“천천히 하거라 천천히, 우희에게도 분명 내 피는 흐르지만, 우리와는 야망이 다르지 않더냐?”
“알겠습니다. 차차 알아가죠.”
할아버지가 발코니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아침 공기 좀 마실까?”
“예.”
발코니로 나가 시가에 불을 붙이는 할아버지.
“차를 봤습니다. 수리해야겠던데요?”
“놈들이 로스차일드라는 그 망나니가 보낸 것들이더냐?”
“예.”
“나와 내 손녀에게 총질했다.”
나는 말없이 할아버지가 내미는 시가를 받아 고개를 돌려 한 모금 빨아들였다.
“쉽게 넘어가고 싶지 않구나.”
할아버지는 지금, 내 방식의 복수 말고 자기 방식의 복수를 얘기하고 계셨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쉽게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할아버지.
“미국은 곧, 무장단체에 대한 커다란 트라우마를 갖게 될 겁니다.”
“또 예언가처럼 얘길 하는구나.”
“아쉽게도 로스차일드 전체를 피 흘리게 만들기는 어렵지 싶습니다. 당장 미국의 총구가 우리에게 향할 수 있거든요.”
“시간은 얼마나 있더냐?”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속에 품고 있는 조용한 분노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로스차일드의 망나니를 요리할 시간은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제 겨우 7월이니까요.”
9월.
내가 준비하고 있던 또 하나의 기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지금은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적어도 할아버지가 바라는 피의 복수에는 말이다.
할아버지가 바라는 피의 복수는 당연히 총탄과 피가 흐르는 것일 테니까, 9월 이후 잔뜩 예민해져 있을 미국을 건드리는 것은 옳지 않았다.
또, 무차별적인 ‘살인’ 따위를 바라는 게 아니다. 나는 히틀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니까.
“어쨌든, 우리에게 직접 총질을 명령한 놈은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렷다?”
“예, 우선은 그 정도에서 만족하시죠 할아버지.”
“후우, 오냐··· PMC 아이들 몇이 프랑스로 간다고?”
“예. 로스차일드가 가지고 있는 포도밭에서 불장난이 좀 하고 싶어서요.”
“흐음, 제법 좋은 포도주를 만들던 곳인데 아쉽구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에 피식 웃어버렸다. 굳이 굳어있는 내 표정을 풀어주고 싶으셨던 모양.
“그래, 그런 얼굴로 누이를 맞이해 주거라 얼마나 떨리겠더냐?”
밝은 얼굴로 누이를 맞이하라는 말.
맞는 말씀이니 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할아버지가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셨다. 응원의 손길 같아 어색하던 얼굴이 제법 편안하게 풀렸다.
“마저 태우고 들어오너라.”
“예.”
툭툭.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주신 할아버지가 다시 발코니 문을 열고 집안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음? 벌써 일어났더냐?”
“네, 할아버지.”
덜컥.
처음 듣는 목소리.
그러나 어쩐지 들어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오는 목소리.
“여기 천우진, 네 오라비도 와 있다. 네가 보고 싶었는지 일찍도 왔구나.”
“오, 오빠가요?”
“그래.”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씹었다.
이번 생에서는 정말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긴장감이었다. 허공에 입에 머금고 있던 시가 연기를 내뱉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
“아아.”
그녀와 나는 동시에 탄성을 뱉었다.
곱디고운 하얀 얼굴.
적당하게 짙은 검은 눈썹.
맑고 커다란 눈.
총기가 흐르는 눈동자.
코와 입은 조금 달랐지만 나와 그녀의 눈매와 눈썹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누가 보아도 서로가 서로의 핏줄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그리고, 쌍둥이기 때문일까? 어쩐지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우던 시가를 대충 재떨이에 올려놓고,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벅저벅.
우희의 동그랗고 커다란 예쁜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린다.
와락.
그녀를 품 안 가득 안았다.
이내 왼쪽 어깨춤이 뜨뜻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정말, 정말 내 오빠에요?”
“누가 먼저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네가 원하면 내가 오빠 할게.”
“왜··· 왜 이제···”
“미안해, 몰랐어. 나도, 할아버지도.”
어느새 코가 시큰거리더니 목이 메기 시작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녀가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내 동생이 슬프고, 기뻐하고 있었다.
서럽고, 서운해하고 있었다.
유전자 검사 따위는 필요 없을 만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우희는 분명한 내 핏줄, 내 동생이 맞다고.
우희도 분명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제 오빠가 자신의 핏줄이 맞다고.
우리는 쌍둥이니까.
< 제 12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