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25화 (125/458)

< 제 125화. >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아까 비품실에서 미처 다 울지 못했던 눈물이 남았을까? 아니면 노인의 표정이 오묘해서였을까? 아니면, 노인의 감정이 그녀에게도 전달되어서일까.

“우희··· 네가 우희니?”

“네··· 누구세요?”

“우희야 내가 네 할애비다.”

“네?”

“내 새끼··· 금쪽같은 내 새끼··· 이 할애비가 미안하구나, 이제야··· 이제야 와서 정말 미안해.”

당황과 함께 덜컥 굳어버린 양우희를 할아버지라 말한 노인은 품에 꼬옥 안아주었다. 노인답지 않게 큰 키와 믿음직스러운 단단한 품에서 양우희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을 느꼈다.

스륵, 스륵.

등을 쓰다듬는 그 거칠지만 부드러운 손길에 양우희의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목이 메 무어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 우희, 내 손녀. 아주 예쁘게 자랐구나, 이제 고생은 그만하고 할애비랑 같이 살자. 이 할애비가 우리 손녀 그간 못 해준 것들 다 해주마.”

“정말··· 정말 제 할아버지세요?”

“오냐, 내가 네 할애비 천혁수다.”

“천··· 혁수?”

양우희는 그제야 자신이 품에 안겨있는 노인이 누군지 깨달았다. 현 대한민국의 복지부 장관 천혁수.

그런 대단한 사람이 자신을 품에 안고 위로해주고 있었다.

천혁수는 양우희를 품에서 살포시 떼어내고는 그녀의 두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할 얘기가 많을 것 같구나. 자리를 옮길까?”

“아···”

양우희의 머릿속엔 고민이 스쳐 갔다.

자신은 아직도 일을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천혁수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일이 걱정이더냐?”

“네···”

“내가 우희 네 할애비다.”

“네···”

“아직 모르겠더냐?”

“네?”

“내가, 이 천혁수가 네 할애비다. 이 할애비는 아주 부자고, 힘도 있는 사람이다. 네가 다니는 이런 회사 수백 개는 살 수 있는 재산도 있지.”

“아아.”

양우희는 그제야 천혁수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고작 이런 쥐꼬리만 한 회사의 월급 때문에 걱정 따위 할 필요 없다는 그 말에.

이런 회사 수백 개는 살 수 있다는 그의 재력에 다시 한번 눈앞의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네게는 오빠인지, 동생인지 모를 우진이가 있다. 너희 둘은 남매야, 친남매.”

“아아아!”

입을 떡 벌린 양우희.

그녀는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처, 천우진··· SKY그룹의 회장.”

“그래, 그놈이 우희. 천우희 너의 핏줄이고 가족이다.”

“오빠로 할래요.”

갑작스러운 당찬 말에 천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로 하겠다?”

“네, 저기 저 자리에 앉아서 맨날 잔소리만 하는 오 대리가 그랬어요, 돈 많으면 오빠고 하느님이라고.”

“뭐라? 하하하, 그래. 우희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그럼 이 할애비랑 같이 가자.”

“네!”

천혁수가 손을 뻗어 손녀 천우희의 손을 꼬옥 잡는다. 천우희는 천혁수의 거칠고 뻣뻣한 손을 마주 꼬옥 잡았다.

느껴지는 촉감은 거칠고 따갑고, 뻣뻣한 손이지만 세상 더없이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흠, 우진이 놈이 서운해할 것 같으니, 선물을 주어야겠구나.”

“네?”

천우희는 천혁수의 뜻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하, 네 오빠는 아마 좋아할 게다. 직접 처리할 것들이 생겼으니까.”

천혁수는 살벌하게 빛나는 눈으로 허름한 사무실을 한 번 훑어보고는 미련 없이 우희를 데리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대양실업 건물을 나오니 여러 대의 검은색 차량이 그 둘을 반겼다.

“우리 직원들이니 놀랄 것 없다.”

긴장 때문인지 우희는 천혁수의 손을 꼭 잡는다.

“동생들이 기다릴텐데···”

“한마음 보육원 얘기니?”

“네.”

“걱정하지 말거라, 사람을 보내두었다. 내일 좋은 얼굴로 찾아가자꾸나.”

우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천혁수가 열어준 차량에 탑승했다. 이어서 천혁수도 차량에 오르고 부드럽게 세단은 출발했다.

차 안에서도 천혁수는 천우희의 고운 손을 꼬옥 잡고 놓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우진이 놈은 비행기에 올랐겠구나.”

“아, 어디 멀리서 오는 건가요?”

“잠시 일정이 있어 미국에 가 있었단다.”

“바쁘군요, 오빠는.”

오빠라는 소리에 피식 웃은 천혁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욕심이 많은 녀석이라 그렇다. 아,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녀석의 욕심은 재산 같은 것이 아니니까.”

의미 모를 말에 천우희는 눈치껏 고개를 주억거렸고, 천혁수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얼마나 눈칫밥을 먹고 살았다면 이렇게 의기소침한 처세술을 가지게 되었을까? 보통 또래의 재벌가 여식들이 안하무인의 태도로 행동하는 것을 자주 봐왔던 천혁수의 눈에는 그런 것 하나하나가 다 안타깝게 느껴졌다.

“음?”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백철웅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천혁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묻는다.

“무슨 일이야?”

“흠, 벌레가 꼬인 것 같습니다.”

백철웅의 눈은 오른쪽 사이드미러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방음 처리가 잘 된 차 안에서도 시끄럽게 들리는 엔진 배기음과 함께 검은색 SUV차량 두 대와 오토바이 3대가 천혁수가 타고 있는 차량 근처로 빠르게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부아아아아아아앙!

차값만큼 비싼 바이크 한대가 빠르게 천혁수가 탄 차량에 접근했다. 바이크를 타고 있는 인물은 둘이었는데 둘 다 검은색 가죽자켓등으로 완벽하게 몸을 가리고 있어 얼굴이나 피부색을 식별할 수 없었다.

운전을 하는 놈 말고, 뒤에 탑승해 있던 놈이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소음기가 달린 총구에 시뻘건 화염이 내뿜어진다.

푹! 푹!

“꺄아아아악.”

천우희의 비명이 차 안에 메아리쳤다.

***

루시가 책을 읽어주는 소리에 기분 좋게 눈을 감고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루시의 살결을 느끼며 전용기 내부의 침실에서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감았던 눈을 뜨고는 말했다.

“예.”

-회장님, 전화를 받으셔야겠습니다.

정호석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대충 가운을 둘러 입고 침실을 벗어났다.

전용기에 비치되어 있던 커다란 위성전화기를 내미는 정호석.

“여보세요.”

-천? 나 CIA한국지부장 윌리요.

“왜 전화했지?”

-당신이 들으면 좋아할 정보를 입수했소.

“뭔데?”

-우리 직원들은 안전합니까?

“적어도 숨은 붙어 있을걸?”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에게 CIA 직원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묻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내 예상이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무나 쉽게 죽이는 사람이 아니니까, CIA직원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 숨을 마냥 가볍게 여기지는 않았을 테다.

-··· 불확실한 겁니까?

“정보나 말해, 확실하게 시체가 되어서 본국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로이드 로스차일드의 오른팔, 테드라는 놈이 있습니다.

“알아.”

나는 이제 한국지부장 윌리를 존대하지 않았다. 완벽한 하대였다. 어쨌든, 놈은 나와 우리 천가를 이용해먹으려 한 놈이기에 예를 보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테드란 놈이 용병을 고용했소.

“한국에서?”

-그렇소.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CIA에게 내 누이에 대한 정보를 부탁할 정도였으니 로스차일드 놈들도 이 일에 진심인 모양.

“그게 뭐?”

-놈들이 넘버가 없는 총기를 무장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피식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내게 경고를 해주며 칭찬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게 어떻다고?”

-네? 미스터 천! 그들이 총기를 사용할 수도 있단 얘기를 하는 겁니다. 지금.

“놈들이 총을 들고 있으니 내 할아버지 천혁수 장관님이 위험하기라도 하다 뭐 그런 얘기인가?”

-그렇습니다.

“걱정은 사양하지, 당신 부하들 모가지나 걱정해.”

-크음.

“그것보다, 테드라는 놈이 우리 할아버지의 동선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뭐지?”

-나보다 더 상부에서 입을 연 것 같습니다.

“로이드 로스차일드의 압박 때문에?”

-그렇소.

“이만 끊지, 바빠서.”

-미, 미스터······

전화를 끊고 바로 다시 다이얼을 눌렀다.

-우진이냐?

전화를 받은 사람은 대비 할아버지였다.

“로이드 로스차일드쪽에서 자꾸만 CIA쪽 정보를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 할아버지의 위치를 특정하고 있는 것 같네요.”

-으음, 쑤가 위험하더냐?

대비 할아버지의 걱정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할아버지의 경호 수준은 일국의 대통령을 뛰어넘을 겁니다. 무장 수준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정예 대원들이 총기 소지자에 대해 방비도 하고 있을테니 걱정할 게 없습니다. 또, 장관 경호는 38구경을 무장하고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너는 걱정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대한민국 내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걱정은 필요가 없죠.”

-알았다. CIA라··· 확인해보마.

“예, 부탁드립니다.”

-오냐.

받은 만큼 돌려준다.

단순히 그런 것으로는 부족하다.

1을 받았으면 10, 100은 돌려줘야 한다. 솔직히 그래도 부족할지 모르겠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이 가슴속 분노에 대한 화답이 뭐가 적당할까 싶었다.

“정 대표님.”

“예, 회장님.”

“지금 우리 PMC정예 대원들, 얼마나 남아있죠?”

“이 비행기에 32명, 장관님 경호로 64명이 투입되었습니다. 장관님 경호는 교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최대 128명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또, 현재 일본에 찰리 박 대표를 경호하기 위해 24명이 투입된 상태입니다.”

“나머지는 프랑스로 갑시다.”

정호석이 히죽 웃으며 묻는다.

“작전 목표는 어떤 것으로 할까요.”

“불장난. 포도밭 좀 태우고 오라고 해주세요, 로스차일드의 캐시카우 중 하나를.”

“예! 회장님.”

일단 잽부터 한 방 날려줘야겠다.

***

천혁수가 손을 뻗어 다리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머리를 감싸 쥔 천우희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주었다.

“괜찮다, 괜찮다. 이것 보거라, 방탄유리야. 권총으로는 절대로 우리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다.”

부들부들 떨던 모습 그대로 고개를 옮겨 천혁수가 앉아 있는 쪽 창문을 확인하는 천우희.

“왜, 왜, 우리한테?”

부들부들 불안에 떠는 천우희의 등을 계속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말을 잇는 천혁수.

“저런 놈들이 사방에 널려있어, 이 할애비가 우리 귀한 손녀딸을 이제야 찾은 것이다.”

“왜요? 왜 우릴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거죠?”

“이 할애비가 가진 것이 많아서 그런 모양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적’도 많이 가지는 법이지.”

“저 사람들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걸까요?”

“총질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살기는 포기한 듯싶구나.”

다시 허리를 펴 시트에 몸을 기댄 천우희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전혀 놀라지 않으셨어요?”

천혁수가 여유롭게 웃으며 답한다.

“하하, 이런 일에 놀라기에는 내가 살아온 삶이 녹록지 않구나.”

“네?”

그저 빙그레 부드럽게 웃어준 천혁수가 고개를 돌리며 싸늘하게 변한 표정으로 말했다.

“철웅아, 손녀딸이 불안해하니 속히 치우거라. 몇 놈의 혀는 필요하겠지.”

“예, 장관님.”

철웅은 믿음직스럽게 대답하고는 정장 상의 옷깃에 입을 가까이하고 무엇인가 작게 속삭였다. 아마도 SKY PMC의 정예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았다. 이미 경호를 담당하는 대원들이 움직이고 있지만 따로 지시할 것이 있었던 모양.

아마도 천혁수의 마지막 말.

‘몇 놈의 혀’를 만족시키기 위함일 터.

“우희야, 걱정하지 말거라 대한민국에서 이 천혁수를, 그리고 네 오라비 천우진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이제 너도 마찬가지, 대한민국에 감히 내 손녀 천우희를 건드릴 미친놈도 없을게다. 나와 네 오라비 천우진이 그렇게 만들게야.”

이상한 얘기지만 어쩐지 천우희는 할아버지의 말에 숨쉬기가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담담한 모습에 천혁수가 흐뭇하다는 듯 웃었다.

“역시, 네게도 우리 천가의 피가 흐르는 모양이구나, 금방 놀란 마음을 정리하고.”

< 제 125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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