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24화. >
공단지역이기에 공기가 신선하다고 얘기 하기 어려운 그 곳의 작은 회사 하나. 자동차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부품의 시사출 업체인 대양실업은 철저한 가족경영 회사였다.
초대 회장이란 사람이 운 좋게도 대현자동차의 설립자와 ‘동창’이었고 그 인맥을 통해 1차 하청업체가 되었지만 사업 규모는 그리 커지지 않았다. 매년 500억에서 600억 사이의 연매출 규모를 가지고 있으니 오너 일가가 먹고 살기에는 충분하다면 충분했다.
직원수 120명의 작은회사지만 IMF도 이겨냈다. 물론 IMF를 이겨내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었다. 직원들의 임금을 동결하고 50퍼센트나 삭감하는 강수를 두었으니까, 그러나 오갈데 없는 직원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경영자의 말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중소기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스펙이 나빠서이기도 하지만 줄도 빽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크다. 당장 생계를 위해서 앓는 소리를 낼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나 죽었소’하고 오너일가의 만행도 웃어 넘길 수밖에 없었다.
샤락, 샤락.
서류를 넘기면 넘길수록 천혁수의 표정은 좋지 못하게 변했다.
“거지 똥구멍에서 콩나물을 뽑아 먹을 놈들이구나.”
적절한 비유에 백철웅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얘기나 들어봤지, 정말 중소기업들이 다 이렇더냐?”
백철웅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모두가 이렇겠습니까? 다 오너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일이지요.”
“평균적으로 봤을땐 어떻지?”
“반수라고 얘기하겠습니다.”
“쯧, 둘 중 하나라는 얘기구나, 뭣같은 회사이거나, 좋은 회사이거나.”
“예.”
“하필이면 내 손녀가 뭣 같은 회사에 들어갔어.”
“기업들 입장에서도 고졸 사원은 싸게 부려먹을 수 있어 좋은 먹잇감입니다. 게다가 고등학생의 경우 성인보다 더 인건비를 아낄 수 있고요.”
신경질적으로 차량 바닥에 서류를 흩뿌리고는 품에서 시가를 꺼내 무는 천혁수.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놈들이··· 비열하고 저열한 십상시같은 놈들이··· 감히 내 손녀를 울렸구나.”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내비치거나 길게 말하는 법이 없는 천혁수가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치며 대양실업의 오너일가를 욕했다.
백철웅은 그의 비유 ‘십상시’같은 놈들이라는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야근은 당연하다는 듯이 하고, 성인이 되었음에도 고등학교 실습생 월급을 받고 있다?”
“예.”
“개같은··· 내 손녀는 그 돈을 아끼고 아껴 보육원을 후원하고 있고?”
“가정 보육원이라고 작은 크기의 집입니다. 지금도 그곳에서 숙식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약 1평남짓한 방 안에서 지내고 계십니다.”
“후우··· 이 놈에 나라가 어찌되려고··· 우진이 놈이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이유에는, 이런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을까?”
“뿌리를 튼튼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했으니, 같은 맥락이 아니겠습니까?”
“쥐뿔 가진 것도 얼마 되지 않는 놈들이 이리 악독할 수가 있더냐?”
“배경없는 자의 서러움이지요.”
천혁수가 시가를 태우는 사이, 해가 떨어지고 밤이 찾아왔다. 하나 둘 대양실업의 사람들이 퇴근을 시작했고, 차량내부에서 천혁수는 혹여나 자신의 손녀딸이 퇴근할까 싶어 회사의 출입구를 뚫어지게 쳐다보지만 손녀는 퇴근하지 않았다.
“쯧, 아무래도 우진이가 서운하게 생각하겠구나.”
백철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예? 어떤의미에서···”
“같이 가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먼저 가야겠구나.”
***
로이드 로스차일드의 오른팔 테드.
그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제기랄! 윌리 이 개새끼가!”
CIA한국지부장은 연락이 되질 않았다. 어제부터 로이드에게서 계속 전화가 왔지만 테드는 받을 수 없었다. 뭐라 보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들어온지 벌써 이틀째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후우.”
크게 한숨을 내뱉고 볼품없이 분리된 휴대폰을 주섬주섬 주웠다. 다행히 푹신한 카펫 위에 내던졌기에 휴대폰은 멀쩡하게 전원이 들어온다. 테드는 여기서 더 시간을 낭비한다면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전원이 들어온 휴대폰에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국제전화.
분명 로이드 로스차일드의 전화일 터.
“예, 전화받았습니다.”
-테드··· 까드득, 미쳤나?
“죄송합니다. 보스.”
-왜, 보고가 없어?
“후우··· 보스의 힘이 필요합니다.”
-하! 잠수타다가 전화 받고 기껏 한다는 말이 내 힘을 빌려달라?
“면목없습니다.”
-말해 봐.
“CIA한국지부장과 연락이 닿질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콜센터도 아니고 중계를 해달란 얘기야?
“면목없습니다.”
-쯧쯧, 네가 어떻게 우리 가문에서 일을 했는지 의문이군.
휴대전화를 들고있는 테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은 금융업이 전문이지 이런 이상한 일이 전문이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개떡같은 일을 받게 되었고 로이드 로스차일드라는 놈의 오른팔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중계를 해 주면 그 다음은.
“용병들은 제가 이미 고용했습니다.”
-용병들로 뭐? 납치라도 하겠다는 얘기야?
“이 일의 여파로 보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성과는 보스의 것이고, 피해는 제 것입니다.”
-호오, 제법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네?
“기회를 주십시오.”
-좋아, 한국지부장과 연결만 되면 되는거야?
“놈이 제 연락을 피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SKY측이나 록펠러 측의 모종의 압력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그냥, 정보만 빼 주십시오.”
-어떤 정보?
“천우진의 쌍둥이의 소재. 지금 쯤 천우진의 할아버지 천혁수 장관이 소재를 파악했을겁니다.”
-바로 알려주지, 10분.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테드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었다. 거실 소파에 대충 널브러져 있던 용병들이 고개를 돌려 테드를 쳐다본다.
“준비해, 10분 안에 바로 움직인다.”
히죽 웃던 백인 사내 넷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무기도 준비해, 만만한 놈들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죠 의뢰인, 멕시코 약쟁이 놈들도 우리 상대는 아니니까.”
“훈련된 경호원 십수명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놈들이야.”
테드의 말에 비웃듯 웃은 머리가 없는 백인이 말했다.
“사람 하나 납치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것도 어린 소녀를?”
“소녀는 아니야 성인이지.”
“어쨌든, 여자 하나 납치하는 일이니 걱정 할 것 없습니다 의뢰인, 그리고 한국은 총기 사용이 금지된 곳 아닙니까?”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던 백인이 품에서 권총을 꺼낸다.
“우린 등록되지 않은 총기를 가지고 있지, 게임은 끝난거 아닌가?”
“좋아, 믿어보지.”
용병들과 대화를 끝내고 다시 방으로 들어오니,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예, 보스.”
-천혁수 장관의 위치는 현재 대한민국 안산의 대양실업이라고 나온다는 군.
“감사합니다.”
-좋은 소식 기대하고 있을게 테드, 제발 실망시키지 말아달라고.
“예, 보스··· 실패하면, 죽었다 생각하십시오.”
-피식, 돈이나 만지던 사람이 무슨 그런 터프한 말씀을.
“까드득, 그럼 미국에서 뵙겠습니다.”
-부디.
***
노후된 사내문화.
남자들은 담배를 꼬나 물고 정리되지 않은 책상위에서 이 서류 저 서류를 쳐다보며 바쁘게 키보드를 두들긴다. 사내 유일한 여직원 양우희는 바쁘게 움직이며 이 재떨이를 비우고, 저 재떨이를 비우고 있었다.
“미스 양! 여기 커피 한잔, 그리고 아까 서류 복사해오라고 한 거 아직이야?”
“지금 가요!”
“빨리빨리 움직여!”
하루종일 하는일은 재떨이를 비우고 서류를 가져다주고, 커피 심부름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자신도 총리실의 ‘경리’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업무를 볼 겨를이 없는 양우희는 오늘도 열심히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야! 양우희! 내가 부장님 커피 심부름까지 해야되니?”
“죄, 죄송합니다 오 대리님.”
“아씨 짜증나! 부사수가 사수 커피 심부를 할때 넌 뭐했는데?”
“그, 쓰레기통을 비우느라···”
“됐고! 오 부장님이 커피 타 오라니까 빨리 타서 가.”
“네.”
“아이씨,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여자들은 커피나 타 오라고 난리야 짜증나게.”
이렇게 욕을 먹었다.
같은 총리실의 ‘경리’를 맡고 있지만 직급은 차이가 났다. 오 대리, 오 부장.
오씨 일가의 친인척들이 주요 직급을 차지하고 있는 이 회사는 전형적인 가족경영 회사였고, 그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회사였다.
오 대리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 오 부장이다.
오 대리는 양우희에게 신랄하게 잔소리를 퍼붓고는 한가롭게 자리에 앉아 손톱을 다듬기 시작한다. 양우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탕비실로 들어가 오 부장의 취향에 맞는 2,2,2 커피를 제조한다.
문득 오 대리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자신도 오 대리와 같은 ‘여자’지만, 오 대리의 머릿속에 양우희가 여자라는 사실따위는 들어있지 않은 모양이다. 사람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럽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없이 산 자들은 없이 사는 자의 설움을 누구보다 쉽게 공감할 수 있었고, 양우희 역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품어준 가정보육원을 버릴 수 없었다.
성적이 나쁘지 않아 수도권 내에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돈이 필요했고 이 이상한 나라는 만18세가 넘어간 아이를 지원해주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학업이 아닌 취업을 택했다.
노크와 함께 부장실로 들어가 커피를 내려놓는데 자신의 허벅지를 더듬거리는 손길에 흠칫 몸을 떠는 양우희.
“그럼.”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나가려는데 자신의 팔뚝을 움켜잡는 머리가 다 벗겨진 오 부장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아이, 잠깐 쉬다가 미스 양, 우리 미스 양은 볼 때 마다 예뻐져?”
“죄, 죄송합니다 부장님, 제가 아직 업무 처리할게 남아서요.”
“업무는 개뿔, 재떨이나 비우고 다니면서, 자자 그러지 말고 어깨나 주물러 봐.”
요즘들어 부쩍 오 부장의 손길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양우희, 이제는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뭔가 시그널을 보낸다고 느껴졌다.
벌컥.
곤란하던차 부장실의 문이 열리고.
“아빠!”
“어허! 오 대리! 사내에서는 직함으로 부르라니까!”
“뭐야, 미스 양 넌 나가, 오 부장님이랑 할 얘기 있으니까.”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내쉰 양우희가 부장실을 벗어나는데 그녀는 언제까지 이렇게 운 좋게 부장의 손길을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단 생각에 치가 떨렸다. 정말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하는게 아닐까란 고민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어 놓았다.
오 대리가 부장실에 들어갔으니 최소한 30분 이상은 아무도 총리부 인근을 기웃거리지 않을 터, 양우희는 아무도 모르게 탕비실 옆 비품실로 들어가 주저 앉았다.
“흐읍.”
그녀의 크고 아름다운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거머리가 허벅지를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촉감이 지워지질 않는다. 처음엔 종아리 무릎 언저리를 만지던 오 부장의 손이 요즘 들어 점점 위로,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순진하지만 바보가 아니었다.
‘용돈 줄까?’라는 질문을 받을때면 어떤 의도로 그딴 거지같은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몇 번 흔들리던 순간도 있었지만 자존심이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가정 보육원을 후원하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부모 없이 힘든 형편에 자라는 어린 소녀들을 지켜주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녀가 돈 몇푼에 몸을 함부로 사용한다면 그 어린 소녀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없이 살아도 배우고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양우희! 할 수 있어! 아자!”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다시 집어 넣고 양우희가 굳센 표정으로 다시 비품실을 나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마침 시계를 보니 퇴근시간이 다 됐지만, 자신은 퇴근 할 수 없었다.
하루종일 헛 일을 하느라 정작 자신이 맡은 업무를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 책상 한 쪽에 수북하게 쌓인 영수증들을 확인하며 ‘후우’하고 한숨을 내뱉은 양우희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열심히 비용처리 업무를 하다보니 어느새 해가 졌고 회사는 죽은듯 고요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업무는 한참이나 남았다.
“으쌰!”
사무실 전등이라도 켜면 밝을까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전기세를 아끼라는 오 부장의 잔 소리에 얼마 안 되는 월급을 쪼개고 쪼개어 산 스탠드의 전원을 올리는 양우희.
딸깍.
조명이 켜지고, 그 빛에 의해 두꺼운 CRT모니터 화면에 자신의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노신사의 얼굴이 비친다.
화들짝 놀란 양우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누, 누구세요?”
주르륵.
노인은 이 세상 더 없이 인자한 표정으로 양우희를 바라보며 웃고, 울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양우희는 자신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어··· 왜 이러지.”
< 제 12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