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21화. >
록펠러 저택 내부에는 나와 루시가 신혼을 꾸릴 별관이 따로 존재했다. 모든 가구와 살림살이들이 충족된 공간, 사용인들이 항상 관리를 해주니 당연히 깨끗했고, 나는 그 공간으로 안내받았다.
킹사이즈보다 더 커다란 침대는 나를 품기에 매우 커다랬다. 침대가 너무 넓고 옆자리가 허했을까? 잠이 오지 않아 발코니에 나가 시가를 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계속 이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나의 누이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 로스차일드를 어떻게 요리해야 잘 요리했다고 소문이 자자 할까 하는 생각, 지금 루시는 잘 있을까 하는 생각.
생각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시차 적응이란 핑계도 우습다. 이미 미국에 온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으니까.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누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줄도 모를 정도로, 깊게 생각에 잠겨있었나 보다. 반가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휙 하니 옆으로 돌렸다.
“루시!”
“허니가 이럴 줄 알고 내가 바로 날아왔다는 말씀!”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등장한 루시가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어찌 이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낭군이 걱정되어 이역만리를 건너오는데.
“학교는 어쩌고?”
“괜찮아, 3일 정도는.”
3일.
로스차일드를 공격하기 위한 설계를 짜는데 충분한 시간이다. 딱 적당한 시간을 비웠지 싶었다.
“수 할아버지에겐 연락 해 봤어?”
“아니.”
루시가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 허니의 시스터를 찾았는지 궁금하지 않아?”
“먼저 연락하실 거야, 연락이 없다는 건··· 아직 찾지 못했다는 얘기겠지.”
“괜찮아 허니?”
“고작 하루가 지났는데 뭘, 지금은 아침이니까, 아마 한국의 해가 떨어지기 전에 찾아내지 않으실까 싶네.”
“그때까지 자지 않는 건 시간 낭비야 허니, 듣기로는 내일 체이스와 삭스가 이곳에 온다며?”
“맞아, 아마 런치타임 전후로 올 거야.”
“그때까지는 잘 쉬어두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피식 웃으며 아직 반절이나 남은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글쎄, 과연 루시랑 있는 게 쉬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뭐어? 꺄악!”
굳이 방안에 훈풍을 불어오는 이유는 내가 발정 난 미친놈이어서가 아니었다. 학업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굳이 내가 걱정돼 워싱턴까지 날아온 루시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제 내 가족, 내 사람들은 확실하게 챙기며 살아야 하니까, 그러기 위해 여의주를 사용하는 것이니까.
***
같은 시각 한국.
엉덩이가 무거워야 할 천혁수는 직접 발로 뛰고 있었다. 물론 아랫사람들을 부리면서 자신도 직접 손녀딸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파는 중이었다.
안산의 시곡중학교에 도착한 그는 가장 먼저 ‘양우희’의 ‘생활기록부’를 확인했다.
샤락, 샤락.
한 명 한 명, 때 묻지 않은 소년 소녀들의 얼굴을 확인하다 멈칫, 하나의 생활기록부에 덜컥 손이 멈추었다.
조심스럽게 프린팅된 사진을 쓰다듬고 옆에 쓰여 있는 이름을 확인한다.
[ 양 우 희 ]
자신과 천우진, 그리고 아들 천수혁과 몇 번 살갑게 불러보지 못한 며느리를 꼭 닮은 소녀의 얼굴.
“확실하구나.”
천혁수의 말에 백철웅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못나··· 아가씨를 챙기지 못했습니다.”
“되었다··· 이건 그놈이, 강영우 그놈들이 이리 악독한 술수를 부렸을지 나는 알았더냐.”
“아가씨는 반드시, 오늘 내로 찾을 것입니다.”
“그래야지. 그래야만 하고.”
중학교 상담실을 거의 점령하다시피 한 천혁수는 뚫어지게 손녀의 사진을 바라보다 시선을 옮겨 창밖의 은색 차량을 쏘아보았다.
“아까부터 따라붙었다는 차가 저 차지?”
“예, 백부님.”
“어디서 온 놈들이더냐?”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김장원이는 일본에 있고?”
“그렇습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생활기록부를 천천히 읽기 시작하는 천혁수.
[ 활달한 성격으로 교우관계가 완만하며 학업 성취도가 높은 바른 학생이다 그러나, 가정형편에 의하여 조금씩 성적이 하향되는 모습을···]
“하, 내 손녀가··· 원하는 공부도 하지 못할 만큼, 어렵게 살았던 모양이구나.”
“······”
“우리 아이들에게 모두 미행이 붙었다고?”
“예, 백부님.”
“놈들이 살기를 포기했으니, 자비를 두지 말아라.”
살벌하게 번들거리는 눈을 한 천혁수.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본 백철웅이 굳은 다짐이 보이는 표정으로 답했다.
“예!”
“이건 그놈은 언제 오느냐?”
“미국에서 선적한 컨테이너에 있으니, 최소한 20일은 지나야 할 것입니다.”
“알았다. 가자, 여기 선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고 나오는구나.”
“예.”
***
한국의 한 호텔에서 테드가 CIA한국지부장 윌리를 초조한 얼굴로 맞이했다.
“얼굴이 왜 그렇게 핼쑥합니까?”
“잠을 좀 설쳐서 그렇습니다.”
“아, 시차 적응?”
“뭐, 그런 것도 있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정보는 좀 있었습니까?”
윌리는 피식 웃으며 대답은 하지 않고 에스프레소를 홀짝였다. 여유를 보이는 윌리가 꼴 보기 싫지만 어쩔 수 없는 상대적 약자 테드는 인상하나 찌푸리지 않고 거듭 묻는다.
“정보, 없습니까?”
“있죠.”
윌리기 서류 가방에서 3개의 서류를 꺼내어 내민다.
테드는 협상의 기본인 현재의 상태나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뭡니까?”
인상을 팍 찌푸리는 테드.
급하게 집어서 확인했지만, 영양가 없는 인사정보가 들어있었다.
“인사청탁부터.”
“하아.”
“뭐, 여유 있으시면 천천히 하시고.”
윌리는 테드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미 협상테이블에서 자신이 테드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신하는 눈치였다. 그제야 마음이 급해 자신이 한 행동이 패착임을 깨닫는 테드,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어, 난데. 오늘 중에 팩스 하나 보낼 거야, 확인하고 바로 적당한 부서에 배치시켜.”
전화를 끊은 테드.
윌리가 활짝 웃으며 다른 서류철 하나를 내민다.
샤락, 샤락.
“왜 천우진의 할아버지 사진만 있습니까?”
“당신은 이 세상에서 사람을 제일 잘 찾는 부류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이봐요 지부장, 내 목줄이 달렸어요. 자꾸 장난칩니까?”
“진심으로 묻는 겁니다.”
“후우··· 바람피운 애인을 찾는 여자?”
“오, 제법 좋은 대답입니다만 틀렸습니다.”
“부모의 원수를 죽이려는 복수자?”
“그것도 좋지만 땡.”
“파파라치?”
윌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쿵!
결국 참지 못한 테드가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덕분에 호텔 라운지의 손님들이 그들을 쳐다본다.
“워워, 당신들이 하는 일 아닙니까?”
“뭐?”
“당신들, 돈 빌리고 갚지 않는 사람들, 죽을 때까지 쫓아가잖아요?”
“아아!”
테드가 제 뜻을 눈치챈 듯 싶으니 히죽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윌리.
“적어도 한국 땅에서는, 한국의 사채업자들이 사람을 제일 잘 찾습니다. 경찰? 범죄자들도 못 찾는 놈들이 범죄자 팬티 한 장도 놓치지 않는 사채업자들을 이기진 못해요.”
“이해했습니다. 천혁수 이 노인네가 사채업자 출신이니까··· 이 사람만 따라다녀도 내가 찾는 인물을 찾을 수 있다?”
“그겁니다.”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 올리던 테드가 덜컥 굳었다.
“잠깐, 그럼 어떻게 천혁수의 손아귀에서 그 여자를 빼 오지?”
어깨를 으쓱이는 윌리.
“그건 당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나는 정보를 준다고 했지, 납치하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습니다.”
테드가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SKY의 천우진은 뛰어난 인물이지, 방심하지 마세요,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나는, 고작 CIA한국 지부장인 나는 그 대단한 록펠러가의 사위와 척지고 싶지 않습니다.”
윌리는 못을 박았다.
테드가 찾는 인물의 소재 정보까지가 그가 해줄 수 있는 선이라며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할 일,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천혁수 장관은 오늘 내로 자기 손녀를 찾을 것 같으니까.”
“제기랄!”
테드는 다급하게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바로 사람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지금부터는 1분 1초, 시간 싸움이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
체이스와 삭스, 그리고 대비 할아버지와 내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 간단한 위스키와 시가가 그리고 종이 뭉치들이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역시 지금 로스차일드가 집중하고 있는 건 금융업이죠, 물론 와인도 못지않게 대단한 캐시카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삭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와인이야 현실적으로 포도밭을 불태우기라도 하던가, 주류창고를 불태워야 하겠지만, 이건 우리 방식이 아니고, 그렇다면 남은 방식은 역시 금융업이겠죠.”
체이스의 말에 대비 할아버지와 삭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까부터 비슷한 말들이 빙빙 돌고 있었다.
“후우.”
난 큰 한숨을 뱉으며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아까부터 자꾸 말이 빙빙 도는데, 나는 이것, 이것을 공격하고 싶습니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제 살 깎아 먹기’라는 생각이 들 테니 무리도 아니었다. 이내 가장 먼저 표정을 푼 인물은 대비 할아버지였다.
“흠, 놈들을 치우고 다시 시작해도 문제는 없겠지.”
평소 솔직하기로 유명한 삭스가 가장 먼저 말했다.
“모기지는 돈 놓고 돈 먹는 사업이죠. 우진, 이걸 우리가 포기하라는 얘깁니까?”
“커다란 이득을 안기는 만큼, 리스크가 큰 사업입니다.”
“절대 아니죠, 그들이 대출을 내고 산 집은 그들의 소유가 아닌 ‘은행’의 소유가 되기 때문에 이자를 내지 못하고 돈을 갚지 못하면 부동산을 처분해 부채를 상환받으면 될 일입니다. 실제로 부동산의 가치는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상승하고 있어요, 꾸준한 우상향을 그리고 있단 얘깁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모두가 그 사업으로 ‘돈’을 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죠. 게다가 이번 대통령이 대출 규제 완화를 묵인해주고 있으니 더 신나게 달려들고 있겠죠, 신용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대출을 내주면서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이건 리스크가 없는 일이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다.
리스크가 없다고? 세상에 그딴 투자는 없다. 리스크가 있는 걸 기득권들이 그 리스크를 배제하는 것이다. 그게 기득권들이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방법이다.
“확신합니까?”
삭스에게 물었지만, 체이스도 삭스와 함께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확신합니다.”
“나도 확신합니다.”
대비 할아버지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체이스와 삭스의 고개가 휙 하니 대비 할아버지에게 향한다.
“록펠러씨, 왜 그러십니까?”
“혹, 우리의 생각이 잘못된 겁니까? 이 돈 놓고 돈 먹기 사업이, 리스크가 없다는 확신이. 틀리기라도 한 겁니까?”
대비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시가를 뻐끔뻐끔 태우기 시작했다. 삭스와 체이스는 눈치채지 못한 리스크. 내가 말하는 핵심을 대비 할아버지는 눈치채신 모양이다.
“후우··· 내 손녀사위의 배포는 정말···”
그의 혼잣말에 삭스와 체이스가 어쩐지 불안한 표정을 내비친다. 슬금슬금, 그들도 눈치채기 시작한 모양.
“우진, 아니겠죠?”
“설마··· 그런 방법을?”
나는 둘의 입에 시가를 물려주고 친절하게 불을 붙여주었다. 그래도 그들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는다.
“미친··· 진짜 하자는 겁니까?”
“어째서 ‘all or not’이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군.”
삭스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는 듯 체이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제길, 제법 노후 대비를 확실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재수 없으면 길거리에 나 앉겠어.”
“쯧쯧, 이제 진짜 뒷방 늙은이가 되어야 할 모양이야.”
“부동산을 폭락시키자니··· 과연 가능하기는 한가?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아.”
그렇다.
내가 말하는 방법.
계속해서 오르는 부동산 가격 때문에 ‘은행’은 어떻게든 손해를 보지 않는 구조. 그 구조의 기본을 비틀어버리는 것이다. 대출 한도나 자격등이 무분별하게 완화되면서 너도나도 집을 사고 있는 형국이다.
집값이 계속 상승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지 않고 정체하고 있거나 하락하고 있다면 무리하게 대출을 내 집을 사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대출을 하는 사람들도 대출을 내주는 은행들도,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고 있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대출받는 사람은 대출금만 갚는다면 부동산 시세차익으로 일확천금을 노리고, 대출 내주는 은행은 ‘이자’수익과 더불어 안전한 자산 밑 이익 노린다.
너도나도 서로의 이익만 바라보고 있었다. ‘리스크’라는 단어는 ‘욕심’에 가려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 그리고 그런 상황을 유도하는 것은 부유층, 기득권, 그리고 금융의 꽃 은행들.
그러니 결론은 부동산 가치가 하락한다면 로스차일드는 아프게 맞을 수밖에 없다.
걱정만 가득한 체이스, 삭스와는 다르게 천천히 눈을 뜬 대비 할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겨우 그 정도 타격으로 로스차일드는 무너지지 않는다. 네가 생각한 계획이 고작 이 정도는 아니겠지?”
뭔가 더 없냐는 질문.
그럴리가.
“당연히 더 있죠.”
< 제 121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