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20화. >
전용기 내부에서 난 어려운 통화를 해야만 했다.
“루시.”
-허니~ 목소리가 별로네?
정말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내 목소리에서 감정의 일부를 읽은 모양.
“티가 나?”
-뭐야, 무슨 일이야? 항상 자신감 넘치던 내 남자 어디 갔어?
피식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지만 참았다.
지금의 나는 웃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아쉽게도 예정대로 루시와 시간을 보내기 어려울 것 같아.”
-무슨 일인데? 목소리에 너무 힘이 없다.
“내가 쌍둥이래.”
-··· 잘못 들었나?
“나도, 할아버지도 몰랐던 사실이야.”
-일란성? 이란성?
“이란성.”
-여자 형제?
“응.”
-바로 한국으로 가?
“아니, 대비 할아버지와 함께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아아, 누가 우리 허니를 건드렸나 보구나··· 기운이 없는 게 아니라 화내고 있는 거였어.
여자의 직감이 무섭다고 하더니, 이게 그런 것일까? 루시는 지금 나의 심리상태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맞추고 있었다.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목소리를 통해서 말이다.
“맞아, 너무 신사답게 행동했달까?”
-쯧, 누군데? 나도 조금 화가 나는걸?
“음, 루시도 아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이 허니를 건드렸어? 그것도 허니의 가족을?
전화기 너머 루시의 목소리도 좋지 못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붉게 달아올라 도끼눈을 뜨고 있는 루시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루시도 내가 보는 루시의 환영처럼, 내 목소리를 통해 내 얼굴의 환영을 보고 있으리란 걸.
“로이드 로스차일드.”
-로이? 그 양아치?
“응, 내 부모를 죽인 원수를 이용하려고 하고 있더라.”
-하!
“루시까지 나서지는 마, 모양새가 좀 그러니까.”
-···그래, 대신 한 대 때릴 거 내 몫까지 두 대 때리고 와?
“하하하, 알겠어.”
-허니의 쌍둥이 얼굴은 꼭 보여주고, 허니와 얼마나 닮았을까 궁금하다.
“그래, 이해해줘서 고마워.”
-뭘, 당연하지, 세상에 가족만큼 소중한 건 없어 허니.
“그래, 이제 루시도 내 가족이고.”
-파이팅.
“고마워.”
***
1년 전.
데이비드 록펠러, 록펠러의 현 가주와 그의 손녀 루시가 다정하게 티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루시야.”
“네, 할아버지.”
“나는 너와 우진이 결혼했으면 좋겠구나.”
“네에? 우리 이제 막 시작하는 사이에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면 되었지 뭐가 더 필요하더냐?”
“그가···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세상 전부를 가지겠다고 말하는.”
록펠러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우진은 그런 사람이지. 그렇기에 더 포기하고 싶지 않구나.”
루시가 짐짓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록펠러를 쳐다본다.
“할아버지는 지금 손녀를 이용하시는 건가요?”
“어떻게 이용이니? 네 마음을 이뤄주고 싶은 것이지.”
“치, 만약 내가 우진을 사랑하지 않았다면요?”
“글쎄, 과연 내 손녀 루시가 그럴 수 있었을까? 입버릇처럼 말하던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이 등장했는데?”
“할아버지는 날 너무 잘 알아.”
“허허허, 루시야··· 이 할애비는 록펠러의 ‘대’가 끊기는 게 너무도 싫구나.”
“나와 우진 사이의 아이가 록펠러를 취하길 바라나요?”
“네게 남자 형제가 있다면 좋겠지만, 네 어미와 아비가 그럴 마음이 없으니··· 별수 있느냐?”
루시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결혼도 안 했는데 벌써 아이 얘기라니···”
“루시, 네 말처럼, 우진은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아마 너와 결혼하고 나서도, 이 록펠러의 힘을 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야, 록펠러의 재산도 탐내지 않을 사람이다.”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래, 난 확신한다. 우진의 할아버지 쑤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탐내지 않아. 진짜 ‘친구’처럼 생각하지, 그리고 우진은 굳이 ‘혼맥’을 만들면서까지 날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그에게는 내게 소원을 빌 수 있는 소원권 2장이 있으니까.”
“아아.”
루시가 잠시 회상에 잠겼다.
대단한 회상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곁에 접근하는 많은 남자가 그녀의 아름다움과 그녀의 배경에 그녀를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놈들이었다. 당장 계속 파티 초대장을 날리며 자신에게 추파를 보내는 로이드 로스차일드와 같이 말이다.
“이 할애비도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알고 있지?”
“네, 욕심이 없었다면, 록펠러 가문의 ‘부’는 설명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그래, 나는 내 할아버지가 쌓은 부를 다시 쌓고 싶단 욕심을 포기했었다. 그러기에는 권력이 가진 힘이 두려웠지, 지금 내가 다시 도전한다면 ‘패망’을 각오해야 해.”
루시는 가만히 할아버지의 말을 경청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록펠러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우진을 보는 순간, 이제 뒷방 늙은이나 해야겠다는 내 생각이 확 변했단다. 그와 싸워보고 싶을 만큼 호승심이 생겼어, 하지만. 나도 늙었기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그를 가지고 싶단 생각이 앞서더구나, 그러던 차 루시 네가 눈에 띄었단다.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내 소중한 손녀딸.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우리 손녀딸, 그런 아이의 ‘사윗감’이 나타났다고 말이야.”
진심이 느껴지는 할아버지의 말에 루시의 입꼬리는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우진이 말하길, 자신의 꿈은 세계정복이래요.”
피식 웃은 데이비드 록펠러가 말했다.
“가능할 게다. 지금의 욕심을 조금 버린다면.”
“네? 욕심을 버려야 세계정복이 가능하다고요?”
할아버지의 말이 모순된다 생각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시. 록펠러는 부드럽게 웃으며 루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우진은 지금 어마어마한 욕심쟁이란다.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오직 제 손으로만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고 싶어 하지, 바로 곁에 내가 있고, 자신의 할애비가 있고, 루시 네가 있는데 도움을 바라지 않아.”
“아아, 그 마음이 욕심이라는 건가요?”
“그래, 그리고 그 욕심을 깨 버리고, 주변의 모든 것을 이용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순간, 우진은 자신이 뜻한 바를 더욱 빠르고 쉽게, 이룰 수 있을 거란다.”
이제야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한 루시.
“그러니 루시 너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꿈을 이룰 수 있게, 곁에서 큰 힘을 주며 그가 욕심을 버리기를 기다려주거라.”
“네··· 여자가 먼저 청혼하는 건 모양 빠지는 일이지만, 멋있을 것 같네요.”
“좋지, 아마 그런 여자라면 나는 지금도 결혼을 꿈꿀걸?”
***
데이비드 록펠러.
대비 할아버지는 갑작스러운 나의 방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일정이 끝나고 루시와 뉴욕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아니었나?”
“일이 있어서 다시 왔습니다.”
잠시 날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여는 그.
“흐음, 욕심을 버렸더냐?”
그가 얘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역시 세월과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일까?
내가 당신의 힘을 빌리러 왔다는 걸 순식간에 눈치채버렸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그저 사라질 뿐.”
“파하, 갑자기 명언? 내가 본모습을 드러냈다고 느끼더냐?”
“전쟁해야겠습니다.”
웃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우진이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정도면, 상대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구나.”
“예.”
“누군들 어떻더냐? 손녀사위가 힘을 내주라는데, 주어야지.”
든든한 대답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대는 로스차일드입니다.”
대비 할아버지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불쾌한 표정과 설렌다는 표정이 공존하고 있었다.
“로스차일드라··· 명분은?”
“자유롭게 돈을 벌더라도 최소한의 도덕은 갖추어라.”
“파하하하, 아담이 로스차일드에게 하던 말이구나.”
“놈들은 선을 넘었습니다. 정확히는 로이드 로스차일드, 현 가주의 아들이 선을 넘었죠.”
“우진이 네가 정해 둔 선을 넘었더냐, 아니면 누구나가 다 공감할 선을 넘었더냐.”
“누구나가 다 공감할 선을 넘었습니다.”
흥미로운지 대비 할아버지가 시가를 입에 물었다.
“자세하게 얘기해 보겠니?”
구구절절.
대비 할아버지에게 내가 숨길 정보가 없었다. 이미 나는 대비 할아버지의 사람이오, 대비 할아버지는 내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미 가족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의 원수인 이건에게 복수하고 있는 와중··· 루시의 마음을 사로잡은 나를 질투하고··· 결국 로이드 로스차일드는 선을 넘어 이건에게 저의 약점일 수 있는 혈육의 정보를 얻어내···”
내 얘기가 계속되면 계속 될수록, 대비 할아버지가 시가를 태우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만큼 화가 난 듯 보였다.
“해서, 우진이 네 쌍둥이 누이는 찾았더냐?”
“한국에서 할아버지가 움직이신다고 했으니 금방 찾을 겁니다.”
“확실히 로스차일드의 망나니가 선을 넘었구나, 과연 네 쌍둥이 누이를 찾아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지만, 좋은 일은 아니겠지.”
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약점이라 생각하는 누이를 찾는다면, 결코 그녀에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납치 감금 및 폭행 등.
상상만으로도 울화통이 터질 일들이 가득할 터.
“그간 저는 로스차일드, 정확히는 로이드 로스차일드라는 그 애송이의 공격에도 무시했습니다. 아직은 전면전을 하기에 부담스럽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제 아닙니다. 지금의 저 혼자에게는 부담스러운 상대일지 모르지만, 대비 할아버지와 함께라면 부담스럽지 않으니까요.”
“오냐, 전면전. 시작 해 보자.”
어쩐지 대비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오히려 웃음꽃이 가득했다. 무료한 삶에 한 줄기 빛이라도 만난 것처럼.
“아직 우리 팀이 더 있습니다.”
어느 영화의 대사.
‘아직 한 발 남았다.’
그 대사처럼, 내게는 아직 총알이 제법 남아 있었다.
대비 할아버지가 시가를 태우는 사이, 나는 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체이스, 오랜만이네요.”
-하하, 결혼식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군요 미스터 천.
“체이스에게 이제 소원권을 사용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허허, 소원권은 까마득하게 잊은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무려 J.B모간의 힘을 끌어다 쓸 기회인데 어떻게 잊어버리겠습니까? 돈으로 환산하기 힘든 것을.”
-크흠, 우진이 금칠을 하는 게 벌써 긴장되는군요, 부디 부담스럽지 않다면 좋겠는데.
“all or not.”
-으음!
수화기 너머 체이스의 당황스러운 음성이 느껴졌다. 너무 비장하게 말했기 때문일까?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입니까?
내 말을 조금 오해했다.
얼굴을 보고 있지 않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전제가 잘못되었네요, 나와 함께 하면 모든 것을 얻을 것이고, 함께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란 얘기였습니다.”
-우진··· 미스터 천, 그 말은 지금 나를 협박한다는 얘기로 들립니다.
“소원권이라 얘기했는데도 강제성이 없어 체이스가 나를 돕지 않는다면, 예. 나는 체이스를 적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잠깐의 침묵 사이로, 대비 할아버지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계셨다. ‘과연.’ 하는 표정이었다.
-후우, 우진이 내게 협박을 할 리 없으니, 그만큼 상대가 어려운가 봅니다. 누군지 얘기나 들어봅시다. 누굽니까? 우진이 노리는 상대가.
“로스차일드.”
-하.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질 자신이.”
-all or not. 잘 어울리는 표현이었습니다. 리스크 없는 투자는 없는 법이죠,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좋습니다. 삭스도 우리와 함께하겠죠?
“그가 날 선택한다면.”
< 제 120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