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19화. >
이건의 모든 것을 빼앗았을 때.
난 모든 점에서 이건에게 우위에 있다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치명적이었다.
과연 이건이 끝까지 함구했었던 이유, 그리고 지옥보다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을 감빵생활을 버티게 만들어 준 원동력.
나는, 나와 할아버지는 그것을 우리가 잘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교도관들을 통해 자살을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었었고, 미국에서는 내가 아니더라도 로스차일드 쪽에서 손을 대고 있기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로스차일드와 이건을 동시에 마킹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결국은, 나는 오만했다.
만약, 방만하지 않게 제대로 맺고 끊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터. 할아버지가 이건의 이빨을 모조리 뽑아 버릴 때 단 한 번이라도 물어봤다면,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 정말 벼랑 끝까지 이건을 몰아붙였다면 달랐을까?
심기가 어지러움을 정호석이 느꼈을까? 열심히 펜을 놀리는 이건을 바라보던 정호석이 내게 시가를 건넨다.
“후우, 감사합니다.”
“회장님의 오누이는···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예, 정보부를 풀 가동해 주시고, 국정원 쪽과 행정부 쪽에도 사람을 써주세요. 최대한 빠르게.”
“예, 회장님, 로스차일드와 테드라는 놈은 어떻게 할까요?”
한창 펜을 놀리던 이건이 움찔 몸을 떨었다.
이빨이 있었으면 조금 더 빠르게 대답을 들었을 건데, 괜히 뽑았나 싶기도 하지만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빨리 써, 아직 물어볼 게 남았으니까.”
이건은 빠르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계속해서 펜을 움직였다. 어느 순간 펜이 멈추고, 정호석이 쏜살같이 메모지를 내게 건넸다.
[ 당신의 어머니 아버지를··· 죽이고··· ]
첫 문장부터 나는 손이 덜덜 떨렸다.
[ 그래서 당신은 삼현 산하의 보육원으로, 그리고 당신의 오누이는 다른 보육원으로 보냈고 15살 이후 마킹을 거뒀습니다. 당신의 오누이의 이름은 양우희가 되었고, 15살 때는 안산의 시곡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이후로는 알 수 없습니다. ]
메모지를 꽉 움켜쥐고, 이건을 쳐다보았다.
“로스차일드 쪽에는 어디까지 정보를 줬지?”
[ 쌍둥이 여아가 있다는 것까지만 알려줬습니다. ]
“그 이후는 모르고?”
[ 돈과 집을 요구했고,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
녹색 연기.
이건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이건의 허벅지에 시가를 비벼끄며 말했다.
“무릎 아래, 팔꿈치 아래는 잘라요, 그리고 치료해서 한국으로 넘깁니다.”
“예, 회장님 어디로 옮길까요?”
“작은 규모의 목장 하나 구입하세요, 수컷 맛에 길들여진 놈이니까, 이번에는 짐승 맛에 길들여 봅시다.”
대원 중 하나가 흠칫 놀라지만 이내 ‘예!’하고 크게 대답했다. 막 지하실을 벗어나려던 찰나.
아쉬움이 남아 뒤 돌아 말했다.
“혀도 뽑고, 눈깔도 파버리세요. 귀는 멀쩡하게 두세요, 발정 난 숫소나 숫말들의 거친 숨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게.”
“으으으! 으으아으으!”
이건의 몸부림 따위는 상관없다.
내가 아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고통을 놈에게 안겨줄 테니까,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게 아닌, 암흑 속에서 몸속을 들락거리는 짐승들의 양물만 평생을 느끼다 천천히 자연사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
CIA 한국지부장과 통화를 끝낸 테드는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을 확인하고 빠르게 창문을 통해 호텔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언제 다급했냐는 듯 천천히 걸어 경찰들을 마주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테러 신고가 있었습니다. 가급적이면 이곳은 피하세요, 근처의 러브호텔들도 마찬가지고.”
“예, 고맙습니다. 고생하세요.”
“수고하십시오.”
척 봐도, 딱 봐도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테드가 이런 곳에서 이상한 짓을 했을 것이라고는 일말의 의심도 없어 보이는 모습. 성공한 백인에게 경찰들은 함부로 하지 않는다.
테드는 기사가 문을 열어준 차량에 올라 잠시 고민했다. 로이드 로스차일드에게 어떤 소리를 들어야 할지 벌써부터 짜증이 치솟았다.
“쯧.”
전화를 걸면서도 혀를 차다,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온다.
-테드?
“예, 보스.”
-벌써 정보를 다 받았나?
“그, 이미 이곳은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무슨 뜻이지?
한숨과 함께 말을 고르다 그냥 다이렉트로 내지르는 테드, 자신의 보스 로이드 로스차일드는 자신의 시간을 끔찍하게 아끼니까, 여기서 더 마이너스적인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후우··· SKY인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을 빼앗겼습니다. 우리 경호팀은 모두 불구가 되었거나 죽었습니다.”
-··· 열댓 명의 훈련된 경호원들을?
“예, 어디서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매우 전문적인 것 같습니다.
-후우···
크게 한숨을 내뱉는 로이드 로스차일드.
-요즘 부쩍 테드를 신뢰하기 어렵네, 내가 알던 테드가 맞나?
“죄송합니다. 보스.”
-그딴 건 필요 없고, 그래서 해결책은.
“CIA한국지부장 윌리에게 정보를 요청해 놓은 상태입니다.”
-이건을 SKY가 데려갔다면 그들이 우리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을 텐데?
입술을 한 번 꽉 깨문 테드가 말했다.
“오늘 바로 한국으로 출발하겠습니다. SKY쪽 인물들에게 미행을 붙이고 그들이 먼저 찾는다면 중간에 가로채도록 하겠습니다.”
-실패하면 돌아오지 마, 그냥 어디 편한 곳에서 사세요, 로스차일드에 루저의 자리는 없으니까.
“··· 명심하겠습니다.”
***
아침부터 걸려 온 손주의 전화.
반갑게 시작된 통화는 천혁수가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듣게 되면서 전혀 반갑지 않은 통화가 되었다.
“내가 잘 못 들은 것이냐?”
-아뇨···
“그러니까 우진이 네 말은 네가 이란성 쌍둥이고, 누이가 있다?”
-예,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천혁수가 물었다.
“어찌 확신하느냐?”
-이건 놈에게 거짓은 없었습니다.
“우리를 흔들려는 계책이 아니고?”
-절대 아닙니다. 확신합니다.
잠시 고민하는 천혁수.
그가 알기로 자신의 손자 천우진은 헛말을 내뱉는 인물이 아니었다. 손자가 확신하는 일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어났다. 한도가 무너지고, IMF가 찾아왔다.
그리고 삼현을 삼켰고, SKY는 계속해서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무엇하나 손자가 뱉은 말 중,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없으니,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건의 말을 확실하게 믿고 있는 손자.
그 손자가 충격적인 얘기에 평소의 총기를 잃었을까 걱정되는 한 편, 만약 손자에게 들은 얘기가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쉽사리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어찌해야겠더냐?”
-우선 PMC쪽에서 사람을 풀었습니다. 제 누이의 이름은 ‘양우희’ 15세까지 안산의 시곡중학교를 재학했다는 정보입니다.
“쌍둥이라면··· 너와 나이가 같겠구나.”
-예, 보육원에서 장난질을 쳐 놓은 게 아니라면, 같을 겁니다.
천혁수는 수화기 너머에서 손자의 ‘불안’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치 떨리는 ‘분노’ 역시 느낄 수 있었다. 행여나 손자가 ‘일’에 있어 감정 때문에 그르칠까 염려되었는지 부드럽게 말했다.
“이 할애비가, 적어도 한국 땅에서는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람을 잘 찾는다.”
-그렇죠.
“걱정할 것 없다. 네 누이, 내 손녀는 반드시 찾아낼 터이니.”
-믿겠습니다.
“오냐, 나도 네놈을 믿으마, 흔들리지 말거라 네 놈이 노래를 부르던 철옹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니 절대 흔들리지 말거라, 차가운 피가 흐르는 그 길을 꿋꿋이 걸어가거라, 머리가 흔들리면 몸통이 고달파, 팔다리는 힘을 잃어.”
-예, 그럴 겁니다. 저는 할아버지 손자 천가의 핏줄, 천우진이니까요.
“오냐, 우리 손녀는 내게 맡겨.”
수화기 너머 분노를 억지로 삼키며 이를 가는 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까드득, 예. 이건 놈을 한국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오냐, 우리가 너무 오만했구나 이제 우리 품에서 관리하자구나. 다시는 이런 뭣 같은 일이 없도록.”
-예, 그럼 곧 뵙겠습니다.
“그래.”
전화를 끊은 천혁수는 일말의 불안도 보이지 않았다. 이름과 나이를, 그리고 15세까지 살았으리라 추정되는 지명을 알고 있다. 이 정도 정보면 순식간에 손녀를 찾아올 자신이 있었다.
***
할아버지와 전화를 끊고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정호석을 마주 할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아니요, 괜찮지 않습니다.”
“······”
“병신같이 오만하고, 자만했습니다. 제대로 한 방 먹었네요.”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십니까?”
손수 일구는 것이 뭐가 그리 중하다고.
할아버지의 손을 최대한 빌리지 않았고, 지금은 나의 혼맥이 된 록펠러 가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것이 오만이고 자만이었다.
전 삶, 이건 놈은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굳건한 삼현을 만들었다. 난 그것을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제 자식들까지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 같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삶에서 전 삶의 삼현을 훌쩍 뛰어넘는 SKY를 만들고 ‘천 가’를 만들고 싶었다. 다른 누구의 손을 빌려서 가 아닌 오로지 나의 힘으로 나 스스로 힘으로 일구어내고 싶었다. 그래야 전 삶에서 내가 그토록 동경하던 인물 이건을 이기는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할아버지의 힘도, 이제는 나와 혼맥을 맺은 록펠러의 대비 할아버지의 힘도. ‘나의 힘’이라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닐 테지만, 어리석은 나는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고집이고 아집이었다.
이젠 달라야겠다. 내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결과가 찾아왔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는 것이 옳다. 잘못을 고치지 않고 놔둔다면, 지금과 같은 일을 초래할 뿐이니까.
“아.”
난 비로소 내가 용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여태까지는 그냥 여의주를 찾고 있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병신같이 이미 왼손엔 할아버지란 여의주를, 오른손에는 록펠러라는 여의주를 들고 있으면서도, 계속 여의주를 찾기만 했다. 이제 승천할 때가 도래했다.
심지어 지금의 나는 너무 관대했다.
애초에 이건을 타이트하게 옥죄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 손아귀 안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로스차일드의 날파리들이 끼어들 틈이 없었을 테다.
“전용기 준비하겠습니다.”
무언을 긍정으로 이해했을까.
뒤돌아서는 정호석을 불러 세웠다.
“아니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정호석이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본다.
“전용기는 부르세요, 오늘부터 전쟁입니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는 데도 최선을 다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너무 자만한 나머지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해왔던 것 같았다. 이번 삶을 다시 살며 처음 할아버지에게 갔던 날, 그런 ‘불나방’ 같은 모습은 내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호전적이고 뒤가 없던 그런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었다. 잃을게 많아져서, 지금 가진 것이 너무 좋아서, 욕심에 눈이 멀어서.
어떤 이유가 되었건, 이제 그럴 일은 없다.
작은 전투, 작은 싸움, 작은 전쟁에서도 이제 나는 스스로 용이라 자위하지 않고, 흉포한 용이 되어 생명 따윈 도외시한 채 달려볼까 싶다. 여의주를 가졌으니 여의주의 힘을 마구 써 볼까 싶다.
전면전이 부담되어 잠시 기다린다는,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따위의 같잖은 핑계를 둘러대고 싶지 않다.
all or not.
전부가 아니라면 필요가 없다. 날 건드리려 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알게 만들어줘야겠다. 적들에게 확실하게 두려움을 각인시키는, 패도를 걷겠노라.
내 분위기에 뭐라 질문하기 어려웠을까? 정호석이 오랜만에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상대는···”
“로스차일드.”
< 제 11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