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18화 >
테드를 잡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은 로스차일드와 전면전이 부담스러운 것은 며칠전과 비교해도 같으니까.
펑! 펑!
정말 밝은 빛이 호텔 안에서 터져나왔다.
호석이 얘기했던 섬광탄인 모양이다.
섬광탄이 터지는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대원들이 속속들이 호텔 내부로 진입했다. ‘끄으’, ‘크윽’과 같은 간헐적인 신음소리만 들릴 뿐, 총 소리와 같은 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3분이 지나지 않아, 다가온 호석이 내게 말했다.
“들어가시죠, 회장님.”
“벌써 끝났습니까?”
“예.”
“대단하네요.”
어째서 정호석이 그렇게 자신만만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권총을 무장한 십 수명의 무장경호원을 제압하는 것이 말이다.
좁디좁은 호텔 복도를 걷자 군데군데 혈흔이 보였다. 시체나 쓰러져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이 이미 대원들이 그런 것들 마저 치워놓은 모양이다. 뒷처리까지 깔끔하니 박수를 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모든 방의 문이 닫혀있었는데 딱 하나 문이 열린 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방에는 나체의 이건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반가워, 미국에서는 처음이지?”
한쪽 눈에서 피를 흘리고 있던 이건이 내 목소리에 반응한 듯 했다.
“크으으, 크으으으.”
성난 개새끼같은 울음소리에 뺨을 툭툭 건드리다 말했다.
“우선 바로 데리고 나갑시다. 한국으로 데려갈테니까 준비해주시고, 우선은 조용한 장소하나 물색해주세요.”
“예, 회장님. 외곽의 산장 하나를 매수해놓았습니다.”
“좋네요, 그리 옮기죠.”
“예!”
***
테드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여인과의 뜨거운 정사를 몇 번이고 즐겼다는 이건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거의 일기장이라 보아도 무방한 분량의 정보를 토해냈다.
로이드 로스차일드는 아직 그 정보를 읽지 않았지만 테드의 얼굴만 봐도 제법 좋은 정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엔 확실한 모양이죠?”
“우선은 확인절차를 밟아야겠지만, 세세하게 풀어낸 것이 사실로 보여집니다.”
로이드가 천천히 테드가 내민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 당시에 천혁수의 힘은 어지간한 기업가들을 웃돌았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우리 삼현은 많은 자금이 필요했고 당시 한국에서 현금유동량이 가장 많았던 천혁수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굳이 저리의 이자로 우리에게 돈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던 거지. ]
“일기야 뭐야.”
투덜거리면서도 읽기를 멈추지 않는 로이드.
[ 해서 천혁수의 약점을 쥐려고 움직이던 도중, 놈의 수하중에 욕심이 많은 놈을 알게 되었지, 마침 그 놈도 천혁수의 재산을 노리는 바, 뜻이 맞아 놈의 계획을 조금 돕기로 했지, 그 계획은 천우진의 애비, 애미를 죽이는 일이었다. 비오는 날, 교통사고로 위장한 그 사고에서 우리는 만삭의 천혁수의 며느리를 마주 할 수 있었다.]
“잔인한 새끼들이네.”
[ 천혁수의 아들 천수혁은 몸을 날려서 만삭의 아내를 보호했고, 아내는 의식은 없었지만 숨은 쉬고 있었다. 우리는 천혁수의 수하 놈 몰래 그 임산부를 빼돌렸고, 임산부는 끝내 죽었지만 뱃속의 아이들은 무사히 살려낼 수 있었지. ]
“내가 제대로 본 게 맞아요? 아이들? 복수형태인데, 둘 이상이란 뜻인가?”
“예, 보스. 더 읽어보시면 나옵니다.”
[ 이란성 쌍둥이로 여아, 남아를 뱃속에서 꺼냈고, 여아와 남아를 각각 다른곳으로 보냈다. 우리입장에서 여아는 필요가 없었어, 남아만 있으면 되었거든. 어쨌든 천혁수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제1상속자는 남아였으니까. 그러니까 천혁수 그 사채업자 놈도, 천우진 그 망할 놈도 아직 자신의 핏줄이 더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만약 그 여아를 찾아 낼 수 있다면 네놈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 어때? 이 정도면 약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 ]
히죽 입꼬리를 들어올리는 로이드 로스차일드.
“여아의 정보는요?”
“더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놈의 요구조건이 있습니다.”
“요구조건?”
[ 5천만 달러, 그리고 파나마에 살기 좋은 집, 새로운 신분증. 그걸 준다면 여아의 이름과 여아를 맡겼던 보육원이 어디인지 말해주지.]
“들어주세요.”
“예, 보스.”
“그리고 정보를 받는 순간, 알죠?”
비릿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린 로이드 로스차일드를 바라보며 테드도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죠.”
“진행하세요.”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나는 먼저 워싱턴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처리하고 돌아오세요.”
“예, 보스.”
***
플로리다의 고급 호텔에서 다시 외곽의 러브호텔에 도착한 테드. 복도에 들어섰는데 보여야 할 경호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들이 다 어디갔어?”
찌걱.
인상을 찌푸리며 걷는데 바닥에 끈적하고 불쾌한 무엇인가가 밟혔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테드의 표정이 일변했다.
끈적하게 굳어가는 혈흔.
그것은 이곳에서 분명 무슨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자신에게 보고할 시간도 없이 다급하게. 문득 한국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아끼던 수하 하나가 행방불명된 그 사건.
걸음에서 뜀박질로 바뀐 그가 이건이 여인과의 정사를 즐기고 있을 방문을 열어젖혔을 때, 이건은 온데간데 없고, 나체의 여인 둘이 손과 발이 묶이고 눈이 가려진 상태로 침대에서 버둥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벌써부터 로이드 로스차일드의 잔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정말 신뢰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로이는 이미 이건이 던진 미끼를 목구멍 깊이 삼켰으니까, 그 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싱그럽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던 로이의 표정이 생생한 테드.
침대위에 묶여있는 여자들 따위는 중하지 않은지, 담배를 꼬라물고 의자에 앉은 테드가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전화받았습니다.
“지부장, 나 테드입니다.”
-아이, 또 무슨 일이요 테드?
“부탁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CIA가 당신들 하청업체야?
“미안합니다··· 내 모가지가 걸렸어요 도와주세요, 꼭 보답하겠습니다.”
-쓋··· 인사청탁 3개.
“콜.”
-뭡니까?
“SKY그룹과 관련된 일입니다.”
-······
CIA한국지부장 윌리가 대답이 없자 테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부장도 SKY그룹의 눈치를 봅니까?”
-록펠러의 사위 아니요? 다 같이 죽자는 겁니까?
“그들도 모를 정보입니다. 사람 하나 찾는 거예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천우진 회장의 핏줄.”
-천우진 회장은 4대 독자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랍니다.”
-흐음, 당신이 준 정보가 사실이라면 CIA쪽에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는 거군, 좋습니다. 알아보죠 어차피 내 임무와 같으니까.
“고맙습니다.”
-인사티켓 3장은 준비해놓으시고, 난이도에 따라 조건도 달라집니다. 가릿?
“가릿.”
***
러브호텔에서 차로 2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산장은 어디서 코요테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비쥬얼이었다.
“와, 좋은데요? 사람하나 죽기 딱 좋은 곳이네.”
내 농담에 정호석이 피식 웃는다.
허름한 산장, 그리고 그 산장의 허름한 지하.
작은 형광등 불빛 하나로 어느새 정신을 차린 이건이 보였다. 섬광탄의 후유증을 이제야 벗어난 모양.
의자에 묶여있는 이건의 맞은편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자리에 앉았다.
“자, 이제 얘기를 좀 해볼까?”
잔뜩 반항기가 묻어있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준비가 덜 됐네.”
각종 연장들이 준비된 테이블로 가 제법 마음에 드는 너클을 꼈다. 해골이 양각되어 있는게 제법 촌스러웠다. 이상하게 촌스러우니 더 마음에 든다.
“어금니 꽉 깨물어, 아아 이빨이 없던가?”
빡, 빡, 빡.
이건의 코에서 붉은색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끄으’하는 신음을 흘린다. 허리를 숙여 눈을 마주쳤다. 아직도 반항기가 남아있다. 호흡이 제법 거칠어지도록 나는 양 손을 번갈아 휘둘렀다.
처음엔 제법 버티는 것 같더니 이내 모가지에 힘이 풀렸는지 축 늘어지는 이건.
정호석은 센스있게 미리 준비해둔 냉수를 이건의 면상에 뿌렸다. 다시 이건의 눈을 쳐다보았다. 넋이 나간 동공. 이제 조금 얘기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자, 메모지 준비해주세요.”
“예, 회장님.”
다시 이건의 앞에 앉았다.
“오른손 풀어주세요.”
“예.”
정호석은 묶여있던 이건의 오른손을 풀고 놈의 검지에 코와 입에서 흘러나온 피를 묻혀주었다.
“그래서, 로스차일드 놈들한테 얘기한 내 약점이 뭐야?”
[ 살려줘. ]
“그러니까 대답을 해 봐, 내 약점이 뭐냐고.”
다시 눈에 반항기가 들어차기 시작하는 이건.
뒤로 손짓하니 대원 둘이 다가온다.
“고문도 배웠습니까?”
““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들을 데리고 연장이 올려진 테이블로 다가갔다. 적당한 줄 톱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걸로 합시다.”
톱을 들고 이건에게 다가가자 이건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정호석은 풀린 오른팔을 꽉 쥐었다.
“왼팔은 글자 쓰는데 필요 없으니까, 여기부터 썰고 시작합시다. 얘기 할 마음이 생기게.”
대원은 거절하지 않았다. 한 명의 대원은 이건의 왼팔을 고정하듯 꽉 붙들었고 나머지 한 명의 대원은 줄톱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오늘도 제법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왼팔과 왼다리가 없어진 이건에게 물었다.
“내 약점이 뭐야?”
“그아해! 그아해!”
“남은 발 하나 더 썰어요.”
줄 톱이 발목에 닿는 순간.
“마아에! 마아에!”
정호석이 얼른 메모지를 가져간다.
슥슥, 슥슥.
이건이 적는 글자를 확인하던 정호석이 눈을 부릅뜨며 날 쳐다본다.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뭐라고 적혔기에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일까? 이건의 팔 다리가 잘리는 광경에도 눈쌀 찌푸리지 않는 냉혈한을 당황시킨 글자가 매우 궁금했다.
나도 모르게 먼저 손을 뻗어 메모지를 받아 들었다.
[ 쌍둥이 너는 쌍둥이야. ]
“이게 무슨!”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이유.
전 삶에서도 알 수 없었던 핏줄.
이 세상에 내 유일한 혈육은 할아버지 천혁수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이건에게 다가갔다.
“내가 쌍둥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건의 온 몸에서 녹색 연기가 선명하게 피어오른다. 거짓이 없다는 뜻.
“시발 뭣 같은···”
절로 쌍욕이 튀어나왔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가 동생인지 형인지, 오빠인지도 몰랐다.
“성별은.”
“여아, 여아.”
“여자? 누나? 여동생?”
고개를 젓는 이건.
“모른다고? 그럼 지금 어디 있지?”
고개를 젓는 이건.
여전히 놈의 몸뚱이에는 녹색 연기만 피어오른다.
“이 개새끼가!”
나도 모르게 놈의 얼굴을 사정없이 갈겨버렸다.
그러나 녹색연기가 증명하듯, 이건은 정말 내 여형제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진짜 모를테다.
크게 심호흡하고 불과 같이 뜨겁게 올라온 분노를 삼키고.
“펜 가져오세요.”
“예, 회장님.”
정호석은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펜을 잡는 이건의 오른손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놈의 두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적어.”
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절하기 전에 계속해서 모르핀을 투여했기에 피를 꽤 많이 흘렸음에도 이건의 움직임은 빠릿빠릿했다.
< 제 118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