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15화. >
내 미국행이 예정되자 록펠러가에서 전용기를 준비해주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그 편이 대비 할아버지가 더욱 편하다고 하니 나도 겸허히 받아 들였다. 사실 전용기를 몇 번 타보니 퍼스트 클래스의 서비스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어서 빨리 SKY항공우주기술에서 내 전용기를 만들어줄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샴페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가장 좋은 점은 긴 비행시간동안 태울 수 있는 시가였다. 아무래도 여객기에서는 좀 어려운 일, 주변에 폐를 끼칠 수 있으니 자제하는 편이 좋았다. 물론 미래에서의 삶을 살았던 나이기에 가능한 생각일지도 몰랐다.
아직도 금연이 기본 매너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지 않은 상태니까, 어느 국적기에서는 흡연을 허용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것도 곧 다가올 9월의 충격적인 테러사건 이후에는 잠잠 해 질것이다.
샴페인에 안주삼아 시가를 태우다보니,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에 빠져 들었다. 그만큼 전용기는 안락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승무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게 안전벨트를 채우고 있었다.
“음, 벌써 도착했습니까?”
“예, 회장님 뉴욕입니다.”
“고마워요.”
자리에 제대로 착석하고 앉으니 어느새 정호석을 비롯한 정예 대원들이 모두 바른자세로 착석 해 있는 상태였다.
마음이 급했을까? 전용기를 타고 왔기에 입국 수속도 편했지만 그래도 나는 1분이라도 빨리 게이트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 여자 루시를 보기 위해.
지이이잉.
양 옆으로 문이 열리고 나는 고개부터 바깥으로 내밀어 루시를 찾았다.
“허니!”
정말 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소음속에서도 루시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귀에 박혔다. 자동적으로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가고 발걸음은 이미 다급하게 변해 있었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루시를 꽉 안았다.
달려와 내 품에 안긴 루시는 까치발을 들어 내 얼굴에 마구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이건 때문에, 신제품 때문에 반도체 때문에 일본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들이 모두 한 순간에 날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보고 싶었어 루시.”
“나도.”
공항에서부터 영화를 한 편 찍고, 우리 일행은 루시가 머물고 있는 아파트로 향했다. 고층 아파트, 한 채에 수백억을 호가아는 초호화 아파트였다. 내 돈으로 마련해 준 것이 아닌, 본래 루시가 가지고 있던 자산이었다.
넓다란 침실에 뜨거운 훈풍이 불어 왔다 옅어지고.
“이제 정말 한 학기만 남았어 허니.”
“그래, 할아버지도 루시를 보고 싶어 하시더라.”
“우리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야, 엄마랑 아빠는 얘기 할 것도 없고.”
“하하하, 롱디는 역시 힘들어, 그렇지?”
“응,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던데, 우리는 이상하게 몸이 멀어져서 그런가 마음이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
“그럼 계속 롱디 하자고?”
팔에 기대어 누워있던 루시가 짝! 소리가 나도록 내 가슴을 때렸다.
“상상만 해도 끔찍해.”
“하하하, 그런데 루시, 정말 한국에 와서 할 일이 있겠어?”
“응, 내가 말했잖아? 요새 미국 사교계에서 한복 스타일이 유행중이라고, 물론 섬유만 가져다 쓰는 경우도 많지만, 그 자연친화적인 컬러는 사람을 고귀하게 만들어주는 마력이 있어.”
난 패션은 잘 모른다.
아무래도 패션을 전공하는 루시가 이쪽에는 나보다 더욱 식견이 있겠거니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하고 싶은일은 뭐든지 해 봐, 적극적으로 지원해줄게.”
“말만 들어도 든든해 허니, 이번 SKY의 폴더 폰, 출시되면 내가 1등으로 구입할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풀어헤쳐진 짐가방에서 곱게 포장된 휴대폰을 가져왔다.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하겠다 루시. 이미 내가 준비 해 왔거든.”
“와아, 아직 출시일이 1주일이나 남았는데!”
역시, 나와 루시는 아직 젊었다.
이런 새로운 기기를 보면 설레는 마음이 들 만큼.
루시가 얼른 침대맡에 기대어 휴대폰을 조작한다. 나는 슬그머니 내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같은 색깔이네?”
“응, 한정판이야. 전 세계에 딱 2대만 있는 색깔.”
“정말?”
“응, 루시와 나, 그 이외에 누구도 이 색의 휴대폰을 가질 순 없어.”
조심스럽게 휴대폰의 외곽을 살피는 루시.
“그러고 보니 조금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
“알루미늄이야, 특별히 주문제작했지, 장인은 아니지만 연구원들이 한땀한땀 공들여서 만든 제품이니까 굳이 가격을 붙이자면 한 200만 달러쯤 될 것 같은데?”
혀를 빼꼼히 내미는 루시.
가격을 듣고 제법 놀란 듯 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뒤에 숨기고 있던 SKY팟 3세대 한정판을 내밀었다. 전 세계의 딱 1대만 생산된 디자인이었다.
“이것도, 같은 거야.”
“와아.”
화면 터치 기술도 넣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 기능은 보안상에 문제로 넣지 않았다. 그것도 그렇지만 아직 구현하기 어려운 점도 이유로 꼽을 수 있었다. 많은 문제들이 산재하고 있으니, 그것들의 해결이 먼저라는 연구원들의 간청을 무시할 순 없었다.
아마도, 매년 출시 될 스카이폰과 스카이팟 5세대쯤이 되면, 터치 폰도 꿈은 아닐것이다. 이미 터치 방식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특히나, 나는 충격식 터치가 아닌 정전식 터치를 원하고 있었다. 전 삶 사과사가 전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그 기술을 말이다.
선물을 툭 내려놓은 루시가 말했다.
“벌써부터 뇌물을 주는게 허니, 바쁘구나?”
“이런, 걸려버렸네?”
“며칠있다 갈 건데?”
“3일만 푹 쉬다가 시차 적응하고 잠시 다른 주를 좀 둘러봐야 돼, 부쉬 대통령과 대비할아버지와 약속도 있고.”
“아쉽다.”
“일정 끝내고 일주일 정도는 푹 쉬다가 일본으로 넘어갈 것 같으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마.”
“미국 일정은 며칠이나 걸려?”
“길면 이주정도가 소요될 것 같은데?”
“흐음··· 꿈 같은 3일이겠다. 안아줘, 허니.”
양팔을 활짝 벌린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 다시 침대에 눕혔다.
우리는 젊고, 밤은 길었으니까.
***
시간을 잡을 수 있다면 멱살을 잡아 바닥에 메다 꽂고 싶을 만큼, 루시와의 달콤한 4일은 훌쩍 지나갔다. 첫날은 빼고 3일을 얘기했기에 하루 더 행복했다는 루시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나와 정호석, 그리고 우리의 정예 대원들은 록펠러가 상주하고 있을 워싱턴으로 향했다.
부쉬와는 대통령 당선 이후 처음 만남을 가지는 것이었다. 과연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할지 기대가 되었다. 나는 바라는게 딱 하나 있었다.
당연히 가질 수 있다면 가장 큰 것을 가지고 싶지만, 부쉬가 쉽게 허락할리 없으니 작지만 알짜배기인 것들 위주로 얘기를 던저야 했다. 물론 그 속에 속임수도 섞어야 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얘기한다면 내 의중을 간파할지도 모르니까, 아직 미국 시장을 잠식해나가고 있다고 얘기하기 뭐하지만, 나는 더 먼 미래에 결국 SKY와 공존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을 구성하려 한다.
압도적인 기술격차로 적어도 3, 4차산업 혁명은 우리 SKY가 전 세계를 주도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철옹성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 정도 부탁은 아마 큰 무리 없이 들어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SKY라인은 이미 미국의 유통시장을 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의 월마트의 유통 중 일부분을 가져 올 정도로 SKY net SHOP은 큰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가볍게 주문하면, 다음날, 늦어도 다다음날이면 물건을 받을 수 있으니 요즘은 식료품도 제법 많이 팔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일 현금 유동량이 어마어마하단 소리였고, 나는 미국에도 세금을 많이 내는 제법 건실한 사업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말인 즉, 세금 많이 내고 있으니 부쉬도 쉽게 건드리지는 않을 거란 얘기였다. 물론 록펠러가가 내 뒤에 굳건하게 버티고 있으니 당연히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도 힘을 쓰기 위해서는 건드리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
공항에서부터 날 맞이하러 나온 대비 할아버지와 장모님, 장인어른. 나는 환하게 웃으며 얼른 장모님부터 꼬옥 안아드렸다.
“오느라 힘들진 않았어요?”
“전혀요, 장모님 뵐 생각에 진짜 날아왔습니다.”
“호호호, 우진은 참 말을 예쁘게 해요, 우리 루시에게도 항상 그렇게 달콤한 말 부탁해요.”
“네 장모님!”
장인어른과는 좀 드라이하게 인사했다.
워낙 이 쪽으로는 젬병이인 사람이니 그러려니 했다.
“오느라 고생했다.”
“예, 장인어른.”
“이 놈아 왜 나는 맨 마지막이냐, 벌써 뒷방 늙은이 취급이더냐?”
“하하하,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서는 법이죠.”
“하여간 그 혓바닥은 쉬질 않는구나, 세일즈를 했어도 크게 성공했겠어, 로비스트도 마찬가지고.”
“로비스트라면 지금도 관심이 있습니다만? 우리 SKY항공우주기술의 무기기술도 곧 발전할 예정이라.”
“총알이나 생산하는 주제에 무슨.”
제법 삐치셨는지 훅이 제법 매섭다.
너무 팩트를 얘기하니 꽤 아프게 맞았다.
“그러니까 이번 부쉬와의 만남에서 예? 이 손녀 사위 회사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말씀좀 해주십쇼 대비 할아버지.”
“네 놈 하는거 봐서.”
“제가 잘되야 루시도 잘되고, 미래에 볼 증손자, 손녀도 잘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이 놈이 아직 생기지도 않은 증손자, 손녀를 인질로 딜을 치는구나.”
“확실히 로비스트로 재능이 있죠 장모님?”
“호호호, 얼른 가요, 공항이 복잡하니.”
“넵.”
***
록펠러 저택에 도착해 잠시 짐을 풀어 놓는 사이, 정호석이 내게 전화기를 들고 다가왔다.
“회장님, 일본에서 찰리 박의 전화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받아 들었다.
“전화받았습니다.”
-미국엔 잘 도착하셨습니까? 회장님.
“예,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 도착했습니다.”
-하하, 다행입니다.
“일본에서 일 처리가 쉽지만은 않은 모양입니다.”
-첫번째 타겟을 모리타화학으로 잡았습니다.”
모리타화학.
미래의 불화수소 가공, 공급의 핵심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일본의 반도체 소재기업이었다.
“아, 가장 탄탄한 곳을 먼저 고르셨군요.”
-예, 부채도 없고 전통도 있고.
“단단한 벽부터 허물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가장 강력한 놈을 무너뜨리면, 나머지는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지니 일의 능률이 올라갑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찰리 박의 얘기는 틀렸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좋네요, 아마 내가 제시한 기업들 모두를 가져오는 것은 어려울겁니다. 사방 팔방으로 일본을 흔들어도 마찬가지겠죠.”
-결국, 김장원 사장의 힘을 조금 써볼까 합니다.
“계획은 충분합니까?”
-이쪽 일은 저보다 김장원 사장과 회장님이 전문이시라···
“몇몇 인물들만 없으면 수월하게 인수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예, 이미 인물들 리스트는 김장원 사장에게 넘겼습니다.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 만큼 회장님의 인가가 필요할 듯 싶었습니다.
나는 잠시 짧게 고민했다.
죽이는 것은 쉽다.
찰리 박이 ‘제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만 ‘납치’라는 제법 곤란한 방법도 있긴 했다. 하지만 편한 것은 오히려 ‘죽이는’것이다.
“으음, 잠시 모리타는 두고 다른 곳 부터 만지고 계시겠습니까? 곧 일본을 정신없게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때 한번 더 간을 보지요.”
-음, 그게 좋겠습니까?
“벌써부터 최후의 수단을 쓰기엔 좀 짜치니까요.”
잠시 말 없이 짧은 침묵이 수화기 너머에 감돈다. 이내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는 찰리 박.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편한길을 고집했지 싶습니다.
내 의중을 깨달은 것 같았다.
아마 어느순간 찰리 박도 편안한 일에 매몰되었을지 모른다. 일종의 매너리즘일지도 모른다.
바로 곁에 편한 방법이 보이니 가장 먼저 그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 그건 모든 인간의 습성이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그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본다.
김장원과 그에 ‘개’로 새삶을 살고 있을 이재형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은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고, 시작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게 만드면 될 일이다.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분명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우선 그 전에 문제의 요소를 완벽하게 없애는 것이 어렵더라도 현명한 방법이다.
“믿습니다. 찰리 박 대표.”
-예, 성과로 보답하겠습니다.
< 제 115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