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13화. >
돈도 제법 벌었는데.
우리의 술자리는 소박했다.
연탄불에 구워먹는 뒷 고기에 소주가 오늘의 메뉴였다. 한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가게 전체를 빌렸다는 것, 가게 내부에 있는 사람 모두가 SKY의 사람들이었다.
아쉬운 것은 ‘백철웅’이 빠졌다는 것.
아직은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었다.
“자~ 건배~”
신이 난 김장원을 따라 부어라 마셔라 했더니 어느새 제법 알딸딸 하게 취기가 올라온다.
“크으~!”
글라스에 반이나 채운 소주를 마신 김장원의 맛깔난 탄성에 피식 웃으며 오이를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정말 꿀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느끼한 뒷고기의 지방이 싹 씻겨 나가는 그런 맛이었다.
“회장님.”
“네, 김 사장님.”
“요즘 쪼까, 서운 합니다.”
피식 웃으며 김장원을 쳐다보았다.
“뭐가요.”
“아따, 요즘은 우리 아그들 말고 SKY PMC쪽만 챙기시는 것 같다, 뭐··· 그런 야그입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충분히 그가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사채시장 관리 재미가 없어요?”
“아따 관리를 지가 합니까? 박 사장이 허지.”
“하하하, 그 박 사장을 김 사장이 관리하잖아요?”
“나가 영··· 숫자 놀이에는 젬병이다 이말입니다.”
그의 빈 잔에 소주를 따라주며 물었다.
“그래서 일을 좀 달라?”
그가 두 손으로 술을 받으며 말한다.
“흐흐, 그라지요.”
“이왕이면 거칠고 터프한 그런 일로?”
“아따 여윽시 회장님은 도사십니다.”
“목숨도 막 왔다갔다 하고 스릴 넘치게?”
“캬~ 디져붑니다.”
맛깔난 표현에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피식’거리며 웃는다. 난 고개를 돌려 찰리 박을 쳐다봤다.
내 눈을 읽었을까 찰리 박이 김장원에게 묻는다.
“일본의 조폭은 뭐야, 야쿠자? 그렇게 부르던가요?”
“잉~ 쪽빠리 넘들은 그리 부릅니다. 주먹은 약헙니다. 대신 칼을 제법 잘 쓰죠잉. 거 뭐시야 사무라이인지 지랄인지 해가지고요.”
“일본쪽에 인맥좀 있으세요?”
“아따, 나가 옛적에 일본이랑 한국이랑 예? 무역을 했지 않겄습니까? 야쿠자 놈들이 뒤져불지만 않았으믄 아직도 연이 좀 닿습니다.”
찰리 박이 내게 고개를 돌린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김장원 사장, 적당히 쓸만한 아이들이랑 같이 일본으로 들어가세요, 오랜만에 옛날 동료들이랑 인사도 좀 하시고, 술도 한 잔 하시고.”
“아따 원정경기라니 벌써부터 솔찬이 설렙니다?”
짠~
잔이 부딪히고 차가운 소주가 뜨겁게 목을 넘어 식도를 질주한다. 알맞게 익은 항정살 부위를 맛있게 씹어 넘기고는 말했다.
“그, 이재형 그 친구도 같이 가세요.”
김장원이 히죽 웃는다.
“아따 벌써 피냄새가 진동을 허네요잉.”
제법 살벌한 멘트에 강기태를 제외한 모두가 히죽 웃는다. 강기태만 어깨를 한번 움찔 하며 몸에 돋아난 소름을 털어낸다.
“자자, 회장님, 김 사장님 우리 밝은 얘기 합시다 밝은 얘기, 가령 월드컵 같은?”
“아따 우리 강 본부장님도 인자 이 싸나이의 세상에 발을 디밀때가 되었는디 말입니다.”
“됐습니다. 저는 가늘고 길게 살거에요, 돈 펑펑 쓰면서 아직 벌어둔 돈 다 쓰지도 못했는데 무슨. 그나저나 회장님은 이번 월드컵 어떻게 보십니까?”
한때 대한민국을 광란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축제를 언급하는 강기태 본부장. 나는 그의 질문에 자신있게 말했다.
“대한민국은 4강 이상 갈 겁니다.”
별 뜻 없이 뱉은 말이지만 모두가 내게 주목했다.
“예? 제가 잘못 들었나요?”
“허어, 4강? 최소 4위?”
“워따, 우리 회장님 뽈 좀 차시더만, 시야는 영···”
“그··· 4강은 힘들지 싶습니다.”
나는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내기 하실래요?”
강기태가 날 똑바로 쳐다본다.
찰리 박과 정호석, 김장원도 마찬가지.
“이번 2002년 월드컵 성적으로요?”
찰리 박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기태가 묻는다.
“회장님은 4강 안착에 거시는 겁니까?”
“네, 확신합니다.”
강기태가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리더니 말한다.
“드디어 제가 내기에서 회장님을 이길 날이 도래한 것 같습니다. 장가는 먼저 가셨어도 이번 내기는 이기기 힘드실겁니다.”
모두가 제법 자신감을 내비치며 날 쳐다본다.
“자신들 있으신 모양이에요?”
““예!””
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들에게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4강에 안착한다에 내 돈 모두와 손 모가지를 걸겠습니다.”
강기태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한다.
“예? 돈 모두와 손 모가지라니요? 왜 갑자기 장르가 그쪽으로 튑니까 회장님.”
“하하하, 그만큼 자신있다는 얘깁니다.”
“현실적으로 걸어주세요, 현실적으로.”
“좋습니다. 그러면 한달 휴가.”
한 달 휴가라는 말에 모든 직장인의 눈이 돌아갔다.
“콜!”
“좋습니다!”
“아따, 또 공식적인 휴가는 다르지라?”
정호석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저도 휴가입니까?”
“그럼요, 책임지고 보내드립니다. 단, 내기에서 이겨야겠죠?”
강기태가 눈치를 보다 묻는다.
“회장님도 휴가 가십니까?”
“예, 신혼 즐겨야죠.”
“윽, 갑자기 명치라도 맞은 느낌이네요, 하아··· 나는 언제 장가가나.”
“아아, 그라고 본게 본부장님도 아직 솔로지요?”
강기태가 제법 날카롭게 날 한 번 쏘아본다.
“예, 회장님이 치사하게 먼저 가셨네요.”
“흐흐, 나가 참한 처자 하나 아는디, 워츠케 연결 해 볼까요?”
눈을 빛내는 강기태.
“크흐흠!”
찰리 박이 김장원 사장이 들으라고 제법 크게 헛기침을 내뱉는다.
“잉? 워따! 나가 우리 짜리님을 깜빡 혀불었네! 워츠케 짜리 대표님도 다리좀 놔 드립니까?”
“영, 옆구리가 적적해서.”
“아따 걱정을 말어부쇼, 진짜 참한 여자들이 쎄고 쎘으니께.”
여느 술자리가 그렇듯.
역시 남자들만 모인 술자리의 끝에는 ‘여자’얘기를 빼 놓을 수 없는 모양이다.
***
외교부에서 오랜만에 국민들이 좋아 할 만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일본 오사카 경시청의 발표는 근거 없는 혐한 발언으로 느껴지며 오사카 초등학교 난입 사건의 범인은 재일교포 3세가 아닌 일본인으로 밝혀졌음에도 이를 쉬쉬하고 언론을 통제하고 있는 일본 정부는 만천하에 사실을 밝히지 않은 타당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으며, 국가적 차원의 사과를 함이 옳다고 여겨집···
언론의 분위기와 여론의 분위기 모두, 외교부의 의견에 적극 박수를 보내는 한 편, 우습게도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은 외교부 장관도, 현 대통령도, 집권여당의 인물도 아닌 나의 할아버지 천혁수 복지부장관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오늘은 바깥에서와 전혀 다른 얼굴로 내게 물어온다.
“아이디를 적어라?”
“예.”
양 손의 검지를 쭉 펴고 힘겹게 힘겹게 키보드를 두들기시는 할아버지. SKY SOFT의 마이홈피 계정을 만드는 중이었다.
“그냥 제가 해드린다니까요.”
“됐다, 필요할때 마다 네놈한테 해달라고 부탁을 해야잖느냐?”
“대비 할아버지도 루시한테 부탁해서 해요.”
“거긴 손녀고, 나는 손자 잖냐, 손자랑 손녀랑 같더냐? 냄새부터 틀린데.”
“거 듣는 손자 서운하게 만드시네요.”
“자, 다 적었다.”
SKY1004라는 아이디를 적는데 2분이 걸렸다.
“마우스를 움직여서 여기 옆에 중복확인 버튼을 눌러보세요.”
“음? 이미 있는 아이디라는구나.”
“예, 그럼 다른걸로 바꾸셔야되요.”
“난 이 아이디가 좋은데?”
“바꾸세요.”
“이게 좋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젠장.”
“아이디는 제가 만들어드리면 안 될까요? 그 다음에는 할아버지가 하셔도 되잖아요.”
“이놈 벌써 할애비랑 시간이 싫증난게냐?”
“저도 바깥에서는 회장님 소리 듣는 사람입니다만.”
“됐고, 아이디 바꿨다.”
결국 회원가입만 총 40분이 소모되었다. 하루 종일 이러고 있어야하나 싶은 마음에 벌써부터 현타가 오는 것 같은 찰나, 마침 품 속의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린다.
“아, 루시네요. 철웅 삼촌!”
내 부름에 순식간에 나타난 백철웅.
“할아버지랑 마이 홈피좀 개설해주세요, 저는 통화좀.”
“그래, 알았다.”
발코니로 나가 제법 긴 시가를 입에 물었다.
긴 시가를 입에 물었다는 뜻은 다시 집 내부로 들어가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할아버지와 함께 ‘컴퓨터’를 하는 일은 내게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응, 루시.”
-허니~ 뭐하고 있었어?
“할아버지가 마이 홈피를 개설하고 싶으시다네.”
-헉, 허니 스트레스 받았겠다.
“하하하, 다행히 루시가 날 구원해줬어.”
-그랬어? 나 잘했지?”
“응, 잘했어.”
-난 이제 들어왔어, 오늘도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공부하느라 너무 지루해, 허니가 너무 보고싶다.
“조만간 갈게, 조금만 참아. 미국은 지금 몇시지?”
-오후 11시.
“별 일 없지?”
-매일 수십통씩 전화하는데 무슨 별일이 있겠어, 아~ 로이가 사교 파티에 초대했더라.
“아아, 로스차일드의 망나니?”
-풋, 표현이 너무 정확해.
한 동안 별 얘기가 들려오지 않던 캐릭터가 갑작스레 등장했다. 그러고 보니 슬슬 모기지론이 폭발적으로 상승할 시기가 되었다.
“아~ 대비 할아버지랑 얘기 할 것도 있는데, 전화로는 좀 그렇네.”
-뭔데? 내가 얘기 전달해줄까?
“하하, 아냐 지루한 얘기니까 루시랑은 일 얘기 하고 싶지 않아.”
-뭐야~ 은근히 로맨틱해.
“하여간 딴 놈들 보지 말고, 다른 남자는 다 돌이다 그렇게 생각하라고.”
-세상에 누가 우리 허니 만큼 날 만족시켜줄 수 있겠어?
루시의 코맹맹이 애교소리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전 삶에서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평안함. 이 달콤함이 내 하루를 더욱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달릴 수 있는 연료를 채워주는 느낌이다. 아마도 이런게 ‘힐링’이라는 것이겠지.
제법 긴 통화를 끝내고 다시 할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갔다. 백철웅과 할아버지가 열심히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하세요?”
내 질문에 둘 다 시선을 회피한다.
뭔가 싶어 모니터를 쳐다보는데, 모니터 가득 서양인과 동양인 할 것 없이 아름다운 여인들이 헐 벗고 야릇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들이 가득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둘을 쳐다보는데, 할아버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게··· 아무리 눌러도 사라지지 않는구나.”
시선을 옮겨 백철웅을 쳐다보았다.
“크흠··· 미안하다, 사실 나도 컴퓨터는 영···”
나는 바로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네 회장님! 전화받았습니다.
옥구슬 굴러가듯 맑은 목소리.
전화를 받은 주인공의 SKY그룹의 제 1 비서실장 김윤주였다.
“김 실장님.”
-네, 말씀하십시오.
“사내 공지 하나 올리십시오.”
-네.
“40대 이상 임직원들 1일 2시간 이상 의무적으로 컴퓨터 사용법 교육 받을 것.”
-아, 네!
“월말 인사평가에 컴퓨터 사용능력 시험 따로 있을 거라는 공지도 같이요.”
-네, 회장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예.”
전화를 끊고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작해 모든 사진을 처리한 나는 두 분을 쳐다보며 말했다.
“같이 배우세요.”
“오냐···”
“그래···”
***
일본 도쿄의 외곽.
찰리 박과 김장원이 멋들어진 선글라스를 끼고 멀리 한 공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가 첫번째 목표입니까?”
“예, 일단은 제일 탄탄합니다.”
“오호, 첫 목표를 딴딴한 놈으로 고른 이유가 있습니까?”
“기선제압?”
“오호라, 선빵필승.”
김장원의 말에 찰리박이 피식 웃는다.
“모리타화학이라고 제법 역사가 긴 회사입니다. 아주 집착적으로 한가지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아따 복잡한 야그는 잘 모르는디요.”
“우선 돈으로 때려볼테니까, 안되면 다음 일은 그 다음에 진행하기로 하시죠.”
“흐흐, 워쩐지 잘 진행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찰리 박이 히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래야 재미있잖아요?”
“잉, 그라죠잉.”
찰리박이 잘 정돈된 계획서를 김장원에게 건넸다.
샤락, 샤락.
빠르게 서류를 넘긴 김장원이 마지막 날짜에 집중했다.
“2002년 6월이 마지막이네요.”
“월드컵은 회장님이랑 같이 봐야죠? 무려 한 달짜리 휴가인데요.”
“흐흐, 알겄습니다. 오늘 밤부터 저도 쪼까 바빠불겁니다. 미리미리 인맥들이랑 한잔 꺾어 놔야죠잉.”
“알겠습니다.”
< 제 113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