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08화. >
기자회견을 마치고 다시 호텔 방에 올라갔다.
루시가 제법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굳이 신혼여행에서 일을 했어야 해?”
“미안해, 할아버지가 홀로 너무 외롭게 싸우시잖아, 도와드리고 싶었어, 우리 할아버지라서가 아니야, 아마 대비 할아버지에게 같은 일이 생겼다면, 나는 당장이고 도움을 드렸을거야.”
내 진심이 닿았을까?
루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아, 그냥 장난 해 본거야. 우리 여행이 길긴 길었지?”
모든걸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내게 안겨오는 루시.
이러니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너무 짧은데?”
“뭐?”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 루시를 침대에 제법 거칠게 밀었다.
“허니문 베이비까지 만들고 갈까?”
“꺄악! 안돼! 나 아직 대학생이라고!”
“대학교 졸업장은 별로 필요가 없어, 루시 앞에 있는 나도 겨우 고졸이거든.”
“그거야 우진은 회사일이 바빠서고!”
“주부도 직업이야 왜 이래?”
“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별로 없거든? 한가롭게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놀고먹는 줄 안다고! 난 그런 여자가 될 생각이 없어!”
“노노, 루시. 그건 역차별적 발언이야, 남자들도 가사노동도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왜냐면 그들의 어머니는 모두 여자니까.”
루시가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됐어, 그래도 난 아직 내 커리어를 망치고 싶지 않아, 꿈이 많다고!”
“얼마든, 루시가 하고 싶다면 무엇이든 해 봐, 내가 도와줄게.”
“정말이지?”
“그럼, 정말이지. 그 정도 능력은 된다고. 자, 그럼 허니문 베이비를 만들어 볼까?”
“꺄악!”
***
6월 3일.
영원했으면 좋았을 허니문, 신혼여행이 끝이났다.
사실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루시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고, 제법 지루하기도 했다.
여유도 하루 이틀이지, 태생이 일 복이 터진 놈이라 그런지 두달 째 부터는 부쩍 일이 하고 싶어졌다. 가만히 상념에 잠겨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미래의 기억이 차곡차곡 떠오르는 기분은 퍽 생소했다.
오늘은 4월 말에 했던 기자회견에서 얘기한 ‘역사 바로 알기’재단의 설립일이기도 했고, 설립행사가 있는 날이기도 했기에 부러 어제 귀국을했다.
루시는 아쉽게도 미국에 남았다. 다행이라면, 마지막 여행지가 미국이었기에 그녀와 내가 따로따로 비행기에 오르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이었다.
어제 늦은 밤에 도착했기에 나를 보지 못했던 할아버지가 막 거실로 나온 내게 말했다.
“이놈, 살이 제법 빠졌구나 밤이 고달팠더냐?”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할 얘기는 아닌듯 하나 제법 수위 높은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루시도 젊어서요.”
“파하하핫, 한 마디를 안 지는구나 이놈.”
“잘 지내셨죠?”
“오냐, 멀리 타국에서도 매일 기사를 챙겨본다 들었다.”
“예, 정보화시대니까요.”
“그래, 한국의 정보화 시대는 우진이 네가 만들었지.”
“와우, 아침부터 칭찬이 과하신데요?”
피식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던 할아버지가 말했다.
“역사 바로 알기 재단이라, 훌륭하다.”
“그렇죠? 할아버지가 차려놓은 밥 상에 숟가락 좀 디밀어 봤습니다.”
“오냐, 잘 했다. 덕분에 SKY 분기 매출이 국내시장에서 20퍼센트나 상승했다지?”
“예, 애국심인가봐요? 일본의 쏴니전자 제품보다 SKY전자 제품을 선호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끌끌, 품질 면에서도 SKY 제품이 더 훌륭하니 당연하지.”
“가격도 훌륭합니다.”
“오냐, 금칠은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오랜만에 먹는 아산댁의 들깨미역국은 정말이지 죽여줬다. 6개월간 쌓인 여독이 말끔하게 날아가는 기분이랄까?
밥을 반공기쯤 먹었을 때.
“재단 자금은 어디서 가져오느냐?”
“보통 기부금 위주로 가져와야죠, 그리고 이 참에 ‘패션’사업도 같이 진행할 예정입니다.”
“패션사업?”
“재단의 심벌을 만들고, 그 심벌을 브랜드화 시켜서 수익금을 다시 재단에서 사용하는 ‘선순환’방법을 고려중입니다.”
“어쨌든 스타트 할 자금은 필요할 게 아니냐?”
누가 어두운 사채시장의 돈 귀신 아니랄까봐, 벌써 곳간에 대한 걱정을 하고 계셨다. 어차피 재단에서 사용할 돈은 푼돈이지만, 할아버지는 10원 한푼도 허투로 쓰실 분이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기부자 모집합니다!’하고 공개적으로 외치는 순간, 밀물처럼 들어올테니까요.”
대답을 끝내고 다시 크게 밥을 한 숟가락 푸는 그 짧은 시간동안, 잠시 말 없이 가만히 계시던 할아버지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하하, SKY의 애국적 이미지에 숟가락 얹을 놈들이 쌧다는 얘기구나.”
“예, 당장 대한민국 재계서열 줄세우는 대기업들이 환장해서 달려들겁니다. 지금 시기가 그러니까요, 물론 일본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던 기업들은 태도가 다를지도 모르지만요.”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는지 할아버지게 제법 사악하게 웃었다. 오징어 젓갈을 떠올리다 그런 할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아아, 지금 그 애매한 기업들 한 방 먹여줄 생각 하시는거죠?”
“하하, 오랜만에 제법 괜찮은 떡밥이지 않으냐?”
“흐음, 친일 기업으로 매도하실 생각이세요?”
“글쎄다, 그건 그치들이 해결하겠지.”
할아버지의 공격에 대한 방어법에 따라 달라진다는 얘기였다. ‘깨겡’하고 고개를 조아리며 재단에 기부금을 넣느냐, 아니면 전면 부인하며 오히려 역공격 하느냐, 그 태도에 따라 할아버지의 칼날 같은 정치인의 혀가 움직일테다.
“제법 곡소리 낼 노친네들 많겠네요.”
“그렇겠지, 실제로 대한민국 있는 놈들 중에 일제 때 안 해 먹은 놈들 찾기도 힘들것이다.”
그 시대야 직접 살면서 겪은 할아버지가 더 잘 아실테니 가타부타 다른 대답을 하진 않았다. 그저 소중한 ‘한식’ 그것도 아산댁이 만든 한식에 집중할 뿐이었다.
***
같은날 오전 10시.
일본 총리 관저.
“이게 사실입니까?”
고이즈미 고키부리 총리의 날카로운 눈총에 한껏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하는 사내.
“하, 하잇!”
“쏴니가 세계시장에서 SKY에게 밀리고있다니··· 하 그 보잘 것 없는 조센징이 만든 회사에, 우리가 쏴니에게 뭐 도와줄 것은 없겠나?”
“SKY전자에 납품하는 반도체 업체 몇 곳이 있습니다, 그 곳들에게 제재를 가하면 당장 제품생산에 차질이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군, 그러고보니 그 우매한 조센징이 오늘 역사바로알기? 뭐 그딴 재단을 설립하는 날이라지?”
“그렇습니다.”
“그놈의 할애비가 그 우리에게 망발을 일삼던 천혁수인가 하는 노인네고?”
“하잇!”
녹차를 홀짝인 고키부리가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우익들은 어떻지?”
“우리쪽에서도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지 않냐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대일본제국이 고작 조센징과의 싸움에서 밀려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충 예상할 수 있었기에 고키부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신사참배를 해야겠어.”
“흐음··· 많은 국가에서 질타를 보내올것입니다.”
사내의 말에 고키부리가 코웃음치며 말한다.
“흥! 감히 대일본제국의 총리인 내 행보에 어느누가 질타를 보내?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들을 기리는 자리이며, 전쟁영웅들을 기리는 자리지! 기자들 불러와, 당장 발표해야겠어 날짜는 최대한 빠르게 잡는다.”
“하, 하잇!”
***
재단 설립이 이루어지는 서울의 광화문.
역사적인 공간이고 가장 한국적인 공간이라고 말 해도 과언이 아닐 그곳을 일부로 선정했다.
역사 바로 알기라는 재단의 이름과도 어느정도 접점이 있지 않은가?
초대장을 거의 뿌리듯 돌렸더니 정말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얼떨결에 경찰들이 도로와 인도를 분리하며 교통통제까지 해야 할 정도로 많은 인파.
정재계의 고위 인사들부터 연예계의 유명인사들까지 자리에 참석했으니 그들을 보기 위한 팬들까지 세트로 몰려왔다.
제법 늦게 도착한 편이 되어버린 나와 할아버지, 아직 식이 시작하려면 30분이나 여유시간이 있음에도, 모두들 사회자의 통제에 따라 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일어나 있으면 소란이 일어나니 어쩔 수 없는 모양.
“흐음, 예상보다 과하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진짜 많이들 화가 난 모양인데요?”
“쯧쯧, 그간 일본놈들의 만행을 참아온 것이 이제 터지는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거기에 크게 일조하셨죠.”
“부인하지 않으마.”
어쩐지 뿌듯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여태까지 할아버지가 철저하게 일본을 이용해 자신의 이미지메이킹을 하고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실제로도 일본이 진절머리나게 싫으신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일제강점기를 두 눈으로 목격하신 할아버지다. 일본놈들 때문에 억지로 말 한마디 통하지 않을 미국에도 건너가셨던 할아버지다.
점점 내 의심은 합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와 할아버지가 등장하자 가장먼저 알은체하는 부류는 정치인이였다. 시류와 눈치가 정치의 전부라 외치던 어느 정치인의 말 처럼 역시 정치인이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처세가 빨랐다.
“아이고, 장관님, 아이고! 회장님.”
대충 악수하고 그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돈 한푼 나올 구멍이 없는 놈들에게 얼굴과 시간을 팔 이유가 없었다. 이어서 인사를 하는 인물들은 제법 오랜 시간을 투자해도 괜찮았다.
대현 그룹의 총수, GL그룹의 총수, 갓뚜기 그룹의 총수 등.
재계서열에서 오랫동안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천 회장, 천 장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번에 아주 좋은일을 계획하셨습니다.”
GL그룹 총수의 진심가득한 칭찬에 할아버지가 마주 웃으며 악수를 받는다.
“하하,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시면 많은 기부금 부탁합니다. 아쉽게도 국가예산을 투입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보니··· 쯧, 국가 예산은 아마도 ‘교육’쪽에만 쓰일 것입니다.”
“어쩔 수 없지요, 외교문제가 있으니.”
고개를 끄덕이던 할아버지가 다른 총수들을 쓰윽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계신 많은 회장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말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돈 내놔’와 별 다를게 없었다. 대현의 정상수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얼굴 표정에서는 읽을 수 없지만, 번들거리는 두 눈동자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또 삥을 뜯나?’
그런 눈빛에 나도 눈빛으로 화답했다.
‘다, 우리 뿌리 대한민국 좋자고 하는일 아닙니까? 그러니 입은 닫고 지갑이나 여세요.’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한 기업인들, 정치인들은 다행으로 생각해야 했다. 그들은 생각지도 못하겠지만, 이곳의 참석자 명단은 우리 SKY PMC정보부의 직원들이 일일이 확인하고 있을 터.
참석하지 않은 정부 고위관료, 정치인, 재계의 거물들의 명단도 작성되고 있을터였다.
행사가 끝나고, 정보부의 직원들은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의 뒷조사를 시작할테다.
겉보기에는 그저 기업가의 유흥이나, 손자의 할아버지 기세워주기 따위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와 할아버지는, 그리고 정확히 나는.
내 목적.
국방력을 늘리려던 그 목적처럼, 내 뿌리를 단단히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오늘을 계기로 아직까지 대한민국 땅에, 이 SKY의 땅에 자리잡고 숨어 있는 일제의 잔재가 모조리 드러나게 될 것이라 난 확신하고 있었다.
당장 오늘이 아니라도 상관 없었다.
오늘을 계기로 조금씩 조금씩 놈들은 수면위로 드러날 수 밖에 없을테니까.
“지금부터! 역사 바로 알기 재단의 설립행사를 시작 하겠습니다!”
난 밝게 웃으며 꽤 많은 정치인, 경제인들과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단상위로 올라가 양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과거 만세 운동을 펼쳤던 조상처럼.
< 제 108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