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04화 >
당황스러운 순간이었지만 기분이 좋은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가 먼저 프로포즈라니.
나는 루시를 지나쳐 뒤쪽에 꽃을 들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 록산나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여 예를표하고는 손을 내밀어 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루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루시, 우리 결혼 할래?”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
“응, 우진··· 우리 행복하자.”
전혀 예상치 못한 이벤트였고, 예상치 못한 전개였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루시가 내 프로포즈를 받으니 그녀의 뒤쪽에 서 있던 록산나와 록펠러 4세가 서로를 안으며 우리를 찐하게 바라보았다.
루시를 에스코트 했던 록펠러와 할아버지가 흐뭇한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며 찐하게 악수를 나눈다.
“이제 쑤와 사돈이 되었구만.”
“하하, 이미 정해진 연이었지 대비.”
“모쪼록 우리 손녀 잘 부탁하네 쑤, 자네라면야 나만큼 우리 손녀를 챙겨주리라 믿네.”
“나도 마찬가지야 대비.”
루시가 내가 건넨 꽃을 받아들고,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를 격하게 안아주었다. 행복하자는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록산나와 록펠러 4세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진, 우리 딸 잘 부탁하네. 자네가 얘기했던 그 오만했던 발언··· 부디 사실이길 바라네.”
록펠러 4세 다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행복해요 우진, 루시 남편을 믿어주렴 그가 하는 일을 응원하고.”
“응··· 우진을 믿어.”
***
슥슥슥.
안심 스테이크를 썰며 록펠러가의 식탁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결혼하게 되면 어디서 살 예정이니?”
록산나의 물음에 루시가 날 바라본다.
어젯밤 루시와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선, 루시의 학업이 끝날 때 까지는 지금처럼, 루시는 미국, 저는 한국에 있을 예정입니다.”
“흐음,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인데···”
그녀의 걱정에 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서로를 깊이 신뢰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시가 아닌 여자는 어차피 제게 돌과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우진이 그렇게 얘기한다면야···”
와인을 한모금 마셔 입가심한 록펠러 4세가 물었다.
“그 이후에는 한국에서 지내나?”
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단 그렇게 할 예정입니다.”
“쯧, 우리 딸 얼굴보기 힘들겠군··· 집은 따로 얻었나?”
이어진 질문에 집중한 것은 의외로 나와 루시가 아닌 할아버지였다.
“지금의 집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까 싶습니다.”
록펠러 4세가 잠시 우리 할아버지 눈치를 보다 루시에게 묻는다.
“루시 너는 괜찮니? 불편하지는 않겠어?”
루시가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냐, 젠틀 처··· 할아버지도 좋은 분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산댁’이라는 셰프님의 음식솜씨가 환상적이라서 좋을 것 같아.”
할아버지는 무표정하게 스테이크를 썰고 계시지만 어쩐지 루시의 발언에 매우 흡족한 표정이 된 것 같았다.
록펠러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나도 은퇴하게 되면 한국에서 살아볼까 싶다.”
록펠러 4세도, 록산나도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버지가요?”
“아버님이요?”
“그래, 마음 터 놓고 지낼 친구가 있는 곳이 편하지 않겠더냐?”
나는 할아버지와 록펠러를 쳐다보며 말했다.
“두분 은퇴하시면, 같이 세계여행이나 다니시죠? 경비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록펠러가 피식 웃으며 묻는다.
“나도 돈이라면 제법 많네만.”
“나도 마찬가지야 대비.”
“우진이 루시와 꿀 떨어지는 생활을 하고 싶어, 우리같은 쉰내나는 노인네들을 버릴려는 모양이군, 이거 나이들면 죽어야 한다니까?”
“망할 놈, 내가 잘못 키웠네 대비.”
두분의 만담과도 같은 대화에 식탁의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나는 루시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쥐며 말했다.
“참고로 두 할아버지는 우리 아이들의 육아를 담당하셔야 합니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헤벌쭉 웃는 할아버지와 록펠러. 록산나와 록펠러 4세도 비슷한 표정이다. 루시는 부끄러운지 툭 하고는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찌른다.
“아이는 바로 가질 계획이더냐?”
할아버지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우선, 1년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당장 루시도 학업에 전념하고 싶어하니까요, 루시의 커리어가 끊기고 육아에 전념하는 여성상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내 대답이 아쉬웠을까 할아버지와 록펠러가 ‘쯧’하고 작게 혀를찬다. 둘이 아쉬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와 루시는 아직 젊으니까.
“결혼식은 두번을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이곳 미국에서, 또 한번은 한국에서.”
모두가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는 조용히 하신다고 했는데, 한국에서도 크게 공개적으로 하진 않을 생각입니다.”
록산나가 말했다.
“맞아요 우진, 그게 좋겠어요. 미국에서는 우리 저택 내부로 사람들을 초대해서 가볍게 진행할 예정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이미 준비는 끝났고, 우진과 루시만 승낙하면 나머지는 내가 준비할게요.”
“알겠습니다.”
***
결혼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2월 3일, 록산나는 작은 규모라고 얘기했지만 내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단 결혼식이 열리는 자리가 록펠러의 저택이니 그 규모와 하객들의 면면이 대단했다.
당선자인 부쉬도 참석했기에, 대단한 결혼식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축의금’목적의 선물들과 현금등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과연 록펠러라고 부를 정도로.
“이로서 두 사람의 결혼을 신 앞에 고합니다.”
주례를 해주는 목사 앞에 나와 루시가 가볍기 키스를 하고는 이제 미국식 피로연을 즐기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터지는 샴페인이 나와 루시의 온 몸을 흠뻑 적셨다.
루시가 입고 있는 드레스가 수억을 호가하는데 누구 하나 그딴 것을 신경쓰는 이가 없었다.
결국 나와 루시는 욕실로 향했다. 젖은 몸을 씻고 조금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기 위함. 물론 욕실에서 뜨거운 훈풍이 불었다는 것은 안 비밀이다.
결혼식을 위해 고용한 스타일리스트들이 빠르게 내 머리와 옷을 세팅해주었다. 메이크업을 위해 홀로 어디론가 사라진 루시를 뒤로 하고, 나는 연회장으로 나갔다.
입구 주변에 그리 반갑지 않은 인물이 보였다.
그도 날 알아보았는지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내며 묻는다.
“흥, 네까짓 놈이 어떻게 록펠러를 구워삶았는지 모르겠군.”
로이드 로스차일드의 날 선 말.
“네까짓게 알 필요는 없고, 결혼식에 초대받은 하객답게, 예의를 지키지 그래?”
“건방진 옐로우 몽키.”
“쯧쯧, 명문가에서 어떻게 너같은 망나니가 나왔는지 모르겠군, 이런 격식있는 피로연이 답답할텐데 원래 하던 것 처럼 망나니 친구들이나 만나 콜걸들이나 부르지 그래?”
자신의 아버지의 계획, 그리고 알 구어 대선캠프에 뿌렸던 고춧가루를 굳이 언급하자 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혹시나 누가 들었을까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퍽 웃겼다.
이런 놈들의 생각은 뻔하다.
선민의식에 빠져 이 세상 최고의 인물이라 자위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 자신이 못났을 거란 생각은 일절 하지 않는 그런 부류. 우월감에 허우적 거리며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그런 병신짓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었다.
우리 주변에 별다른 인기척이 없자 다시 입을 벌리는 놈의 아랫턱을 빠르게 움켜쥐었다.
꽈악.
“읍!”
혀를 움직일 수 없도록 엄지와 검지로 볼살을 세게 쥐어잡으니 놈의 얼굴이 터질듯 붉게 달아오른다. 샴페인을 내려놓고 양 손으로 내 오른손을 뜯어내려 하지만 ‘운동’이란걸 모를 멸치같은 몸뚱이로는 어림도 없다.
쥐어짜듯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다시 한 번, 그 같잖은 주둥이로 나, 혹은 루시의 이름을 담지마, 또 옐로우 몽키라는 그 뭣 같은 소리도 하지 말고, 혀를 뽑아버릴테니까.”
놈의 두 눈이 크게 떨렸다.
완벽하게 기세에서 밀렸음이다.
또각또각, 등뒤에서 들리는 하이힐 소리에 나는 손을 풀고 웃는 낯으로 뒤 돌았다.
“루시 왔어?”
“응, 나 어때”
“늘 예쁘지.”
“아 로이, 축하해주러 왔구나 고마워.”
“그, 그, 그래.”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태연한 척 샴페인을 들어올리는 놈, 나는 그런 놈을 무시하고 루시에게 말했다.
“가자.”
“응.”
내 왼팔에 팔짱을 껴오며 방긋 웃는 루시.
그녀와 함께 연회장 중앙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뜨거운 눈빛이 느껴진다. 쳐다보지 않아도 분노로 활활 타오를 로이드 로스차일드의 눈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저 놈의 꼬라지를 보니, 이대로 물러날리 없는 놈이었다. 로스차일드.
내 원대한 계획에 결국은 한 번이라도 걸림돌이 될 그 놈들을 어떻게 치워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복잡한 머리와는 달리, 나는 웃는 낯으로 루시가 소개해주는 인물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미국 사교계에 발을 넓히기 시작했다. 뭐가 되었든 어쨌든 우리를 축복해주기 위해 모인 하객들이니 예를 다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
정치계는 별 소식없이 바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국민들이나 언론에 보여지는 것은 없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피로연이 끝나고, 아쉽게도 나와 루시의 신혼여행은 없었다. 아직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도 있지만, 당장 할아버지의 복지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루시의 부모님과 록펠러도 셋트였다.
전용기에 내려 입국 심사를 끝내고 게이트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PMC정보부서의 직원 몇이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철웅이 앞으로 나가 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눈 뒤, 할아버지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할아버지가 우리쪽으로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대비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잠시 일이있어서 다녀와야겠어.”
“아, 장관 자리에 앉으려면 바쁘겠군, 안내는 우진에게 부탁할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쑤.”
“루시야, 그리고 록산나, 주니어. 미안하네.”
모두가 할아버지의 이탈을 불쾌해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잠깐 담배 한대 태울까요?”
“오냐.”
루시와 나머지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할아버지와 공항의 흡연실로 향했다. 철웅이 우릴 따르고 호석은 루시일행을 안내했다.
칙, 칙.
할아버지가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물었다.
“무슨일이에요?”
“야합이 있다는구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법 용기가 가상한 인물들이 있는 모양이네요.”
“글쎄, 배알이 꼴렸는지 아니면, 정의인지는 가 봐야 알겠지.”
“직접 처리하시려고요?”
“오늘은 경고만 할게다. 손을 쓰기는 일러.”
이런 쪽은 할아버지가 나보다 더 빠꼼이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너는 결혼식이나 신경쓰거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예 할아버지. 김장원이에게 전화나 한 통 넣어 놔.”
“하하하, 알겠습니다.”
***
요정의 한 프라이빗 룸.
여당과 제1야당의 중진들이 대거 참석한 모임에서 천혁수의 얘기가 흘러나왔다.
“천혁수 그 치가 벌써 장관이라니요? 국회의원이 된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장관입니까? 아무래도 대통령 라인이라고 보는게 맞지 않소?”
야당 중진의 말에 여당대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햅니다. 라인이라니요? 심지어 소속당도 다르지 않습니까?”
천혁수가 속한 당은 소수당이었다.
여당도 제1야당도 아닌 제2 야당이었다.
“그리고 여당과 제1야당의 중진들만 각 요지를 차지 하는 것도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지 않소? 그냥 좋게좋게 흘러갑시다. 현 대통령님의 임기가 많이 남은 것도 아니고, 굳이 건드릴 필요가 있소?”
이러쿵 저러쿵, 그들이 한참 바쁘게 갑론을박을 펼칠 때.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바깥에서 몇몇 보좌관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자연스럽게 의원들의 고개는 출입문으로 돌아갔다.
“뭐야?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야당대표의 고함에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리고 등장한 인물은 천혁수 초선 의원이었다. 그의 서릿발 날리는 눈빛에 장내의 모두가 일순간 사고가 정지한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 제 10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