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03화 (103/458)

< 제 103화 >

대원이 머리를 빼꼼히 들어올려 나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란다.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짖게 내려왔다. 피골이 상접했다는 표현을 이럴때 써야 하는 모양이다.

같은 바닷속에 있지만, 난 그에게 수영해서 다가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훈련이니까, 그의 육체가 이겨내야 할 과제니까, 본래 그런 것 처럼 그는 바로 배 앞까지 와, 내 손에 들린 보급품을 받아가야 했다.

“회, 회, 회장님.”

어느새 다가온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날 보고 긴장해서가 아니라, 차가운 수온 때문임이 분명했다.

“고, 고생, 조금 만, 더, 더 힘을 내, 내주세요.”

멋지게 말하려고 용을 썼지만, 이 놈의 몸뚱아리는 너무나도 솔직했다. 더듬더듬 거리며 얘기하느라 폼은 안 나지만, 그래도 진심이 전해지길 바랐다.

“가, 감사합, 니다.”

우리는 바닷속에서 서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그는 다시 얼른 뭍으로 수영하기 시작했다.

촤아악.

배 옆으로 사다리가 내려오고 나는 사다리를 올라갔다. 오르자마자 철웅이 얼른 따뜻하게 데워놓은 자신의 다운 점퍼를 내게 입혀주었다.

“후우, 우리 대원들 보너스 두둑히 챙겨주세요.”

“예, 훈련수당 두둑하게 지급하겠습니다.”

첨벙, 첨벙.

다른 대원 하나가 수영해 배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엔 호석이 빠르게 옷을 벗는다.

“이번엔 제가 가겠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말리지 못했다.

호석 다음은 철웅이, 그 다음은 호석과 철웅의 다음 서열인 직원이, 하나같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얼음장보다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맡겨 대원에게 보급품을 전달해주었다.

우리에게 보급품을 받는 대원들은 하나같이 좋아했다.

***

같은 날 청와대.

정무를 처리하고 돌아온 대통령에게 비서실장이 다가왔다.

“대통령님, SKY그룹 천우진 회장에게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래요?”

“예, 바로 연결할까요?”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고, 품에서 휴대폰을 꺼낸 비서실장.

“대통령입니다.”

-아, 대통령님.

“용무가 있습니까?”

전화기 너머로 천우진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대통령도 살짝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워낙 용건만 간단히를 추구하는 천우진임을 알기 때문에 그의 스타일대로 질문 했던 대통령.

-좋습니다. 바로 본론으로 가시죠.

천우진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자리 하나 주십시오.

“하하하, 인사청탁입니까?”

-대통령님이 하셨던 질문, 그 답변을 행동으로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소?”

-그 어느 때 보다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광오한 말이었다.

일개 개인이 할 수 있는 언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듯 조금은 벙쪄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얘기입니까?”

-예, 자리가 된다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대통령이 말했다.

“좋습니다. 복지부장관 자리를 바라는 것이지요?”

대통령도 정치밥만 수십년이다.

천우진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맞습니다.

“그럼 현 장관과 같이 만나시지요, 국빈관 8시. 술이나 한 잔 하시지요.”

-좋습니다. 천혁수 회장님과 같이 가겠습니다.

“예, 그때 뵙지요.”

전화를 끊은 대통령을 비서실장이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잔뜩 궁금한 눈빛.

“들었습니까?”

“예, 국빈관 8시. 복지부장관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그렇게 해 주세요.”

***

“에취!”

며칠을 차가운 바닷바람과 바닷물에 젖어있다보니 절로 감기가 들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쯧쯧, 굳이 그랬더냐.”

할아버지는 나와 다르다.

나와 다르게 아랫사람을 관리한다. 그러니 나를 이해 못하는 것도 이해 할 수 있었다.

“제 방식입니다.”

“고집은, 쯧. 그래 대통령이랑 약속은 되었더냐?”

“예, 오늘 저녁에 국빈관에서 보기로 했습니다. 복지부장관도 함께 동행할 예정입니다.”

“내부적으로 얘기가 나온 모양이군.”

“그런 것 같네요, 아마 조용하게 풀릴 걸로 보입니다.”

“그건 만나보고 판단하자구나.”

“예.”

약속시간.

국빈관이라는 고급 중식당의 프라이빗 룸.

나와 할아버지가 먼저 도착했고, 우리는 알아서 주문을 하였다. 어차피 식사는 곁가지일 뿐, 주 내용은 서로의 입과 입으로 하는 대화일테니까, 또 누군가를 접대하는 것도 아니고 협상을 하는 것이니 굳이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음식이 나오기가 무섭게 약속시간에 딱 맞춰, 대통령과 비서실장, 그리고 복지부장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나와 할아버지는 일어나 대통령 일행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하하, 천 의원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닙니다. 대통령님이 더 고생이시지요.”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초선 의원인 할아버지는 대통령과 복지부장관등의 말을 경청하며 적당한 리액션을 해주셨고, 덕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달아올랐다.

시간이 흐르고, 모두의 얼굴에 제법 취기가 돌기 시작할 때.

“제 자리를 원하신다고요?”

현 장관의 질문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자리에서 국민들의 생활을 좀 편하게 하고자 합니다.”

“하하, 보기보다 뭘 해도 욕먹는 자리입니다.”

현 장관은 자리에 대한 큰 욕심이 없어보였다. 그것도 그럴것이 IMF이후, IT버블까지.

현 경제 상황에서 복지부에 많은 예산을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정치인 장차관들, 대통령은 ‘욕 먹는 자리’라는 얘기도 많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였다.

복지부장관이 잠시 대통령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는 말했다.

“어차피 저도 돌아오는 해에는 사퇴하려 했습니다. 이제 정치 밥이 좀 물립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복지부장관의 뭔가를 바라는 두 눈은 ‘돈’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는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내 생각에 신빙성을 더 해준다.

불쑥 끼어들어 장관에게 물었다.

“혹, 경영쪽에도 관심 있으십니까?”

“하하, 이 자리에서 경영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천 회장.”

현재 공석인 대한종합금융 그룹의 경영자 자리는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만, 복지부 장관을 하면서 적은 예산을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고 하다보니 제법 ‘셈’에 밝아졌다고 해야 할까요?”

회계감사.

그런 자리를 바라는 모양.

할아버지도 복지부장관의 말을 눈치 챈 듯.

“아 마침, 대한종합금융그룹의 회계감사가 필요하던 차였지요?”

나를 슬쩍 보며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요, 그 쪽은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최고경영자의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있는 상황이니 모르긴 몰라도 많은 인재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나의 동의를 얻은 할아버지가 다시 웃는 낯으로 복지부 장관을 바라보았다. 복지부장관의 얼굴엔 함지박만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하하, 대통령님이 퇴임하시면 낙동강 오리알이 될까 싶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늙었어도 아직은 일이 하고 싶습니다. 큰 욕심 없이요.”

어쩌면 인사청탁에 가까운 얘기였지만 대통령은 그에게 별 말 하지 않았다. 이미 내가 전화로 복지부장관 자리를 달라는 얘기를 했을때, 인사청탁은 진행되는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대통령은 전혀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인사청문회, 자신 있으십니까 천 의원님.”

할아버지가 히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럼요.”

정말 자신만만한 대답에 대통령이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할아버지는 ‘사채업자’출신이다. 의원이 된 것도 신기할 노릇이지만 인사청문회에서 다른 의원들이 준비해온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과오가 많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모르는 것이 있다.

‘삼현 게이트’란 희대의 사건을 통해 물갈이 된 국회에는 ‘천가’장학생을 시작으로, 천가 키즈의 전신이라 부를 수 있는 할아버지의 사람들이 심어져 있음을 말이다. 저번 총선에서 뽑힌 대다수의 젊은 의원들은 모두가 우리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 야 할 것 없이 정말 많은 의원들이 우리 ‘천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숨긴채 국민들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일에만 몰두 할 수 있었고, ‘삼현 게이트’이후 국회의원들이 몸을 사리고 있으니 대한민국은 현재 그 어느 시대보다 깨끗한 정치인들이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회의원 월급이 적은 것은 아니나, ‘물질’의 맛. 그러니까 ‘돈의 맛’을 본 사람들에게는 적었다. 그들이 선거준비를 하며 사용하는 자금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좋습니다. 그리 자신있어 하시니, 빠르게 진행하시지요.”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겠노라 약속을 했다.

이제 복지부장관이 스스로 사퇴하고 할아버지가 그 자리에 앉으면 될 일이다.

“생각해두신 정책들이라도 있으십니까?”

나와 할아버지는 대화하지 않은 내용의 질문.

히죽 웃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어쩐지 거울속에 비친 내 얼굴과 같은 느낌이었다.

“직접 보시지요.”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내 머릿속에는 분명 정책들이 들어 있었다. 제법 성공했다고 평가 받는 정책들 물론 그 당시에는 이슈화되지 않았지만, 후대에 갈수록 좋게 평가 받는 그런 것들이 말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힌트를 하나 드릴까요?”

대통령과 복지부장관,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날 바라본다.

“우유.”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모르지만 일단 대통령과 복지부장관 앞에서 모른다는 뉘앙스를 풍길수는 없는 일.

“우유요?”

“흐음, 우유라···”

“궁금하시면 직접 보시지요.”

대통령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하, 똑 닮은 손주를 보셨습니다.”

***

한국에서 대통령과 복지부장관은 나름대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무렵의 11월 말.

나와 할아버지는 록펠러가에서 보내준 록펠러가문의 전용기에 올랐다.

장관 자리에 앉기 전 마지막 여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장관 자리에 앉아 공무로 인한 출장이야 있겠지만, 길어야 며칠짜리가 전부일 터.

비행기에 올라 승무원의 상냥한 서비스를 받으며 할아버지가 물었다.

“식은 올릴게냐?”

록펠러도 그렇고, 우리 할아버지도 그렇고 너무 급진적이었다.

“아직 청혼도 안 했습니다.”

“루시가 받아준다면?”

“해야죠, 거부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하하, 이제 우리 집도 이사를 가야 하는 걸까?”

피식 웃은 내가 말했다.

“분가 할 겁니다.”

그 부분은 생각해보지 못한 듯, 할아버지가 눈을 흘긴다. 내 말에 불만이 가득하신 모양이다.

“망할 놈.”

“하하하, 신혼은 즐겨야죠?”

“집도 넓은데 누가 방해 한다더냐?”

진심은 아니었는데 발끈하는 할아버지를 보니 어쩐지 더 약올리고 싶었다.

“왜요, 제가 나가면 적적하실까 봐 그래요?”

“그래 이놈아.”

의외로 솔직하게 대답하신다.

“이제 장관자리에 앉으면 철웅이도 호석이도 곁에 없으니, 이상하다. 퇴근해 집에서라도 그 놈들 얼굴, 네 놈 얼굴 봐야지.”

의외의 진솔한 대답에 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루시가 분가를 원할리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내 입으로 분가 안 합니다. 할아버지랑 평생 살거에요란 말을 하기 뭐해, 루시의 핑계를 댔다.

할아버지와 투닥거리기도 잠깐, 오랜 비행에 지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땐 착륙 준비를 하라는 기장의 방송이 들려 올 때였다.

잠시 후.

워싱턴의 한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깜짝 놀랐다. 공항 내부에 의전차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차들과 활짝 열린 리무진의 문까지 붉은색 레드카펫이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흐음, 과하구나.”

할아버지의 리액션에 공감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어디선가 나타난 승합차량에서 검은색 양복을 입은 인물들이 레드카펫 앞에 도열했다. 정말 어디 왕국의 왕이라도 방문한 것 같았다. 옛날, 대한민국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할 때 이랬을까?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가는데, 레드카펫의 끝 멈추어선 차량에서 루시가 록펠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렸다. 그런데 루시의 옷차림이 심상치 않았다.

새하얀 드레스에 흩날리는 면사포.

마치 결혼식의 신부와 같은 복장.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어느새 코 앞에 루시가 서 있었다.

“루시, 오늘 옷이?”

“우진, 내 남편이 되어 줄래?”

예상치 못한 프로포즈였다.

< 제 103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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