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01화 (101/458)

< 제 101화. >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루시에게 청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싫어할 수 있다고 생각되네요.”

-호오, 우리 루시를 먼저 생각해주는 거냐?

“결혼은 여자가 손해보는 장사 아닙니까.”

-하하하하, 글쎄, 어째서 내 귀에는 우진이 손해를 본다고 들리는지 모르겠구만. 당연히 청혼해야지 감히 우리 손녀딸을 그냥 데리고 가려고 했는가? 루시가 싫다면 나도 우진이 네게 루시를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어.

“에이, 루시 설득시키실 것 같은데.”

-크흠, 하여튼 루시가 승낙하는 순간 바로 다음날이라도 식을 올릴 생각이다. 이미 쑤와는 얘기가 끝났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니 노친네들이 무슨 작당모의를 한 겁니까?”

-크하하하, 세상천지에 나한테 노친네라고 타박을 주는 놈이 있다니 크하하하하, 역시 세상은 살고봐야 돼, 하여튼 그리알고 있겠다.

“뭐라고 답변도 안했습니다만.”

-어차피 데려갈꺼, 시원하게 데려가 시간끌지 말고, 수의 선거가 끝나면 한번 보기로 하지.

“국회의원 되자마자 오래 자리 비우면 국민들이 싫어합니다.”

-헛소리 말고, 어차피 대한민국 의원들도 월급도둑놈들이잖아?

너무 맞는말이라 핑계가 마땅찮다.

“뭐 일단 알았습니다. 루시의 의견이 중요하죠.”

-그래, 쑤의 선거가 끝나는 날, 이쪽에서도 대선이 끝날 것 같으니 그때쯤이 좋겠구만.

“국회의원 되자마자 외국으로 나가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거참 요즘 부쩍 왜이렇게 급해지셨어요?”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타박이 흘러나왔다.

아닌게 아니라 록펠러는 처음 만났던 날과는 전혀 다르게 우리 할아버지와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본래의 성격, 혹은 가면을 벗어던져 버렸다.

-난 원래 이랬어 이놈아.

우리 할아버지의 말투마저 쏙 닮아갔다.

친구는 닮는다더니, 진짜인 모양이다.

“끊어요.”

***

할아버지의 출마 선언 다음날 실시된 국민투표.

대통령 임기에 관한 헌법 개정안이 국민들의 허락을 구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와 할아버지는 개표방송에 집중하고 있었다.

빠르게 ‘찬성’이라 쓰여진 파란색 막대그래프가 위로 치솟는다. 의외로 반대 여론이 크지 않다는 것이 현 국회에 가진 국민들의 신뢰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국민투표 하기 전, 국회에서 의결이 끝났을때도 여론조사를 통해 과반수 이상의 국민들이 헌법개정안을 찬성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니 할아버지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는 순간이 한걸음 성큼 다가온 것만 같았다.

한참 집중하는 도중.

품속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천 회장, 대통령입니다. 얼굴 한 번 볼수 있겠습니까?

이때쯤 오겠다 싶었는데, 아직 개표방송이 끝나지도 않았건만 벌써 대통령은 몸이 달아오른 것 같았다.

“그러시죠, 지금이요?”

-대통령 담화문 발표 후가 좋겠습니다. 국민들께 헌법 개정 결과에 대해 청와대의 입장표명도 필요할테니··· 시간이 시간인 만큼, 막걸리 한 잔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전화를 끊자 할아버지가 날 쳐다본다.

“대통령?”

“예.”

“이제 우리 목적을 눈치 챈 모양이구나.”

“예, 알아도 바꿀 순 없을 겁니다. 이미 투표는 끝났으니까요.”

“그렇지.”

“이제 정치권에서도 슬슬 긴장 할겁니다. 할아버지의 보궐선거 출마로 인해서 지금 우리가 그리는 큰 그림을 눈치챈 노인네들이 많을테니까요.”

“혓바닥으로 먹고 사는 놈들이 눈치가 빠른 법이지, 제 밥그릇은 꼭 사수하고 싶어 하거든.”

“그렇죠.”

“흐음··· 대통령과 만남이라···”

함께 가실지 마실지를 고민하는 모양.

“혼자 다녀올게요, 그게 편합니다.”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이다. 만만하지 않을테니 긴장을 늦추지 말거라.”

“그럼요, 저도 SKY그룹 회장입니다.”

“하하하, 오냐 알았다.”

***

저번에 만났던 그 국정원의 위장된 두루치기집.

그 골방으로 들어가니 대통령이 앉아 있었다.

자리에 앉자 마자 내게 막걸리를 따라 준다.

예의상 잔을 들어 들이켜고는 대통령을 빤히 쳐다보았다. 피식 웃은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바로 본론을 꺼내라고 하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천 회장.”

“피차 바쁜 사람들 아닙니까.”

“하하하, 그렇지요··· 바쁜 사람들이지요··· 헌법 개정안이··· 그러니까 정확히 대통령 임기제도를 바꾼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천 회장.”

“잘한 일이 될겁니다. 결과적으로.”

정말 그렇냐는 듯 날 뚫어지게 쳐다본다, 내 온 몸 구석구석 사특한 생각은 없는지 꿰뚫어 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 증거로 대통령이 내게 뿜어내던 호의적인 녹색빛 연기와는 다른, 조금은 붉은색이 섞인 노란빛 연기가 피워오르고 있었다.

“천혁수 회장께서··· 이제 대통령이 되려 합니까?”

“예, 아무래도 이 대한민국을 바꾸려면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독재와 싸우다 불구가 되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독재를 원합니까?”

“절대, 그런 피폐한 삶은 없습니다. 그 어느나라보다 민주적인 나라를 만들겠다 약속드리죠.”

나의 확언에 대통령이 말 없이 막걸리를 들이켰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74퍼센트가 찬성표를 던졌고 이제 다음 대통령부터는 5년 단임제가 아닌 4년 중임제가 되었다. 미국과 같아졌다는 얘기다.

“SKY가 대한민국을 지배할까, 경계하고 경계하고 싶었습니다.”

대통령이 솔직하게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미 경제적으로는 SKY의 독재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아직까지 SKY는 국민들께 도움이 되는 기업이고 대한민국의 기둥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덕분에 IMF위기를 빠르게 넘겼다고 생각하니까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내수시장에서 양아치처럼 굴어봐야 얻을 수 있는 파이가 큰 것도 아니니까, 나는 내가 알던 대기업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권을 쥐게 되었을때, 그때도 과연 SKY가 지금과 같을까를 여러번 생각하게 됩니다.”

대통령에게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지금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막아서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약속을 바라십니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대통령.

대통령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감히 단언컨데, 대통령님이 알고 있던 대한민국은 없어질 것입니다. 어떤 청사진을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셨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생각한 청사진 이상의 대한민국을 만들겁니다. 내가, 우리 천가가, SKY가 또 나의 할아버지가.”

한 참을 말 없이 서로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마음속, 머릿속 나의 의지 신념을 두 눈 가득담겠다는 상상을 계속 하며 대통령을 쳐다보았다.

10분? 20분?

잔에 따라져 있던 막걸리가 투명하게 가라앉을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그 약속··· 천회장의 그 약속 꼭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단 한번도 거짓을 얘기한 적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 대통령에 대한 예의는 모두 표현했다. 나를 믿느냐 안 믿느냐는 대통령의 마음가짐에 달렸다.

***

천우진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만, 대통령은 그를 잡지 않았다. 나무문이 투박하게 닫히고 나서야 대통령은 크게 한숨을 뱉었다.

“후우···”

긴장했었을까? 어쩐지 한 숨 이후에 대통령의 표정이 한층 홀가분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대통령 비서실장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대화는 잘 되셨습니까?”

고개를 주억거리는 대통령.

“대세는 거스를 수 없고, 민심은 천심이지요··· 대한민국의 다음 대통령은 아마도 천혁수 그 인물이 될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지금도 인기가 하늘을 치솟을 듯 한데,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또 어떤 파격적인 행보를 보일지··· 모르긴 몰라도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늙은이들이 바쁘게 뛰고 있을 겁니다.”

다 가라앉아 투명해진 막걸리를 휘휘 저어 들이킨 대통령이 말했다.

“천우진 회장 말입니다.”

“예.”

“대단한 젊은입니다. 대단한 인물이에요, 과연 그를 젊은이라고 어리게 치부할 수 있나 싶습니다.”

비서실장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렇습니까?’하고 대통령의 말에 맞장구 쳐 주었다. 대통령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데, 대쪽같은 그의 성품이 느껴지더이다. 자신의 말에 일말의 거짓도 없음이 여실히 느껴진다고 할까요? 나도 한때는 저런 모습이 있지 않았나 싶은데, 어떻습니까? 그렇습니까?”

“하하하, 대통령님도 대단하셨습니다. 대쪽같은 성품 하면은 대통령님도 지지 않으시죠.”

피식 웃은 대통령이 말했다.

“내 눈빛도 그랬습니까?”

비서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과연 천우진이란 인물이 어떤 눈빛을 대통령에게 보여줬기에 이렇게까지 얘기할까?

“대적하면 반드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예?”

“차마 고개를 들기 어려울정도로 뜨겁더군요, 아마 내가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고개를 조아렸을겁니다.”

“총명하다고는 생각했으나 그 정도 였습니까?”

대통령이 시선을 멀리 던지며 무엇인가를 상상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제왕의 기운 뭐 그런걸까요?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담인줄 알았는데 하하, 내게도 그런 카리스마가 있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조금 더 나아졌을까요?”

***

11월 7일.

공교롭게도 미국의 대선이 끝난 날, 할아버지의 선거도 끝이났다.

보궐선거의 결과는 압도적인 표차이로 할아버지가 당선되었다. 지지율 87퍼센트. 푸른 띠를 매고 환하게 웃고 있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누가봐도 정치인이구나 싶은 모습이었다.

짝짝짝짝.

박수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이는 할아버지.

푸근한 인상은 신뢰감이 생기고, 두껍고 짙은 눈썹과 강렬하게 빛나는 두 눈은 고집이 엿보인다. 딱 떨어지는 수트와 떡벌어진 어깨는 자신의 대쪽같은 성품을 밀고나갈 패기가 엿보였다.

정치인의 옷이 할아버지에게 너무나도 잘 맞는단 얘기였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카리스마가 있다는 뜻.

최대한 공식행사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으려고 했지만 오늘 만큼은 어쩔 수 없이 나도 할아버지 곁에서서 활짝 웃었다.

자리를 빛내는 것으로 내 임무는 끝났다. 나머지 마무리 회식 같은 것은 내가 낄 자리가 아니니 조용히 빠져나왔다.

서둘러 향한곳은 SKY그룹 본사 사옥의 SKY인베스트먼트.

오랜만에 강기태와 찰리박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보스!”

강기태의 환한 인사, 찰리 박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그 두가지로 이미 보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쉬가 됐어요, 봤죠?”

내 질문에 강기태가 소파에 앉으며 히죽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그럼요, 재미좀 봤습니다.”

소파의 상석에서 강기태가 내미는 보고서를 찬찬히 들췄다. 죄다 수익이 났다. ‘부쉬’가 될거라는 확신을 가진 투자는 이렇듯 효과가 좋다. 본의 아니게 부쉬에게 준 ‘로이드 로스차일드’와 ‘알 구어 2세’의 문란한 파티 소식도 도움이 되었다. 부쉬와 관련된 테마주들 대부분이 떡락했었으니까.

그 시기에 매집했던 SKY인베스트는 당연히, 남들보다 최소 두배이상 많은 수익을 얻어냈다. 서류를 대충 덮으며 물었다.

“그래서 총액은요?”

강기태가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 제 101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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