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7화. >
삼현 이가의 차남 이재형.
“여긴 어쩐 일입니까?”
내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며 대답하는 이재형.
“천가의 교육시설에서 우리 연아가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도 자연스럽게 연아의 근처에서 지냈고, 자연스럽게 김장원 사장과 친분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삼현의 막내딸 이희연에 대한 보고는 받았다. 굳이 천가의 교육시설에 들어온 그 작은 소녀는 ‘사회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소녀의 언니 이희윤의 영향과 ‘이건’의 영향때문에 아이의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다.
“이런 일에는 완전히 손을 땐게 아니었습니까?”
부드럽게 웃으며 맞은편 의자에 앉은 이재형.
“그랬죠, 저는 태어나 단 한번도 누군가에게 ‘고맙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조용히 시가를 태우며 그의 말을 잠시 경청했다.
“요즘 부쩍 연아가 자주 웃습니다. 때로는 울기도 하지만, 저는 그런 연아의 감정표현에 오히려 더 기쁘더군요, 뭔가에 억눌린 아이처럼 감정표현에 서툴고 사람 상대하는 방법을 모르던 우리 연아가··· 이제는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울고, 웃으며 생활합니다. 예전보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이쪽이 우리 연아에게 더욱 도움되는 생활이라고 확신합니다.”
제법 긴 얘기를 쉼없이 뱉어내는 이재형.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천우진 회장님께 ‘고맙다’라는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아이러니 하지만··· 어쨌든 그 교육시설에 있는 아이들을 보고 저는 제법 밝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봤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면, 우리 연아도 더러운 일을 하던 저를 뿌듯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공감하긴 어려운 얘기.
“그냥, 떳떳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내 혈육에게.”
마지막 이재형의 말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살아있는 이건은 자신의 혈육이 아니라는 얘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건은 죽을겁니다.”
내 통보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확실히 예전의 그 들개와 같은 냄새는 풍기지 않았다. 이제는 집을 지키는 진돗개와 같은 느낌이랄까?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이건이 남긴 유산도 제법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내것이 될 것이고, 천우진 회장님께서 저와 연아에게 주신 돈도 아직 그대로니까요.”
“뭐, 대충 이해했습니다. 아쉽게도 당장 이재형···”
“죄송하지만, 그냥 까마귀로 불러주시거나, 김재형으로 불러주시겠습니까? 어머님의 성씨가 김씨였습니다. 유산상속이 끝나면 개명도 고려하는 중입니다.”
“그래요, 미안하지만 김재형씨를 양지로 올리긴 어렵습니다. 당장 우리 PMC의 소속으로 만들어주긴 무리라는 얘깁니다. 당신의 과거가 당신이 알던 것 처럼 깨끗하지만은 않으니까. 마약상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전적도 있던데, 우리는 기업입니다. 당연히 이미지를 생각할 수 밖에 없죠.”
“이해했습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밝은 곳으로 옮겨주시리라 믿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정말 나를 위해 헌신한다면, 못해줄 것도 없었다. 우리라고 더러운게 묻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겉보기에는 깨끗하지만 말이다.
시선을 옮겨 김장원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여기 용병출신의 김재형씨가 외부에서는 우리와 접점이 없으니 직접 움직인다?”
“그라지요, 만에 하나 여그 까마구가 정체가 들통나도 어쨌든 외부적으로는 삼현의 아들놈 아닙니까?”
까마귀 이재형이 제법 불편한 표정을 짓지만, 끼어들지는 않았다. 김장원의 계획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제법 머리를 썼음이다. 확실히 이쪽으로 문제를 만들지 않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팀원들이랑 같이 왔습니까?”
이재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번 일은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정호석을 바라보았다.
정호석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재형 실력이 제법이란 평가가 있습니다. 한국 경찰들만 상대하는 것이라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사형수’도 아니고, ‘강력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니 아마 경찰들의 무장수준도 대단치 않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다시 시선을 이재형, 아니 김재형에게 돌렸다.
“좋아요, 김재형씨 진행해보세요, 아쉽지만 우리 나름대로 중요한 일이라 세컨 팀이 뒤에서 따라 붙을 수 있습니다. 설마 그런게 불쾌하진 않겠죠?”
“예, 괜찮습니다. 그들이 나설 일은 없겠지만.”
자신만만한 태도가 썩 마음에 들었다.
“계획은 있습니까?”
사전에 준비해 왔는지 서류철 몇 개를 나와 김장원, 정호석에게 건네며 브리핑을 준비한다.
툭.
나는 건네받은 서류를 보는둥 마는둥 하다 테이블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말했다.
“아아, 디테일은 됐습니다.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된 것 같으니 그냥 믿어보죠, 과정은 중요치 않아요 결과만 들고오세요, 우리 세상은 결과로 말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
아침 일찍부터 이건은 계속 시계만 쳐다보았다.
그것도 오전 6시부터 10분 단위로 시계를 쳐다보다 보니 목이 살짝 아픈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몸을 푼다.
오전 10시.
교도관과 함께 매튜가 병실로 들어와 이건의 수갑을 푼다. 죄수복을 입고 공항으로 향할 수는 없으니 매튜가 건네는 사복을 입는 이건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컨디션 괜찮나?”
상투적인 매튜의 질문에 이건은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날아 갈 것 같으니 걱정 마시게.”
병실 바깥으로 이건이 나가니 경찰관이 이건의 팔에 수갑을 채우고, 다른 한쪽은 자신의 팔에 채운다.
바깥으로 나가고 경찰 순찰차 뒤쪽에 주차되어 있는 봉고차에 오르는 이건과 경찰.
“공항에서 보지.”
매튜에 인사에 이건은 헤벌쭉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차량에 오른 매튜, 운전기사 창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신호를 주자 매튜가 탑승한 차량이 가장 먼저 김포공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봉고차가 뒤따르고 마지막으로 순찰차가 주행을 시작하며 이건의 미국행이 시작되었다.
잠시 후, 2차선 교차로 앞.
신호에 걸려 좌회전을 대기하는 차량들 옆으로, 한 여름에 덥지도 않은지 가죽자켓에 두꺼운 헬멧을 쓴 인물이 시끄러운 엔진소리의 바이크를 타고 등장했다.
순찰차를 지나 봉고차의 조수석 옆에 오토바이를 정차한 그거 헬멧의 바이저를 열고는 봉고차의 창문에 머리를 가져간다.
지이이잉.
봉고차의 창문이 내려가고.
“뭡니까?”
인상을 잔뜩 찌푸린 형사의 얼굴을 확인한 헬멧 사내. 완전히 내려간 창문 안으로 밀어넣듯 얼굴을 집어넣은 그가 이건이 탑승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사이.
“너 뭐냐고 시발!”
조수석에 탑승한 사복 경찰이 욕설을 내뱉으며 헬멧을 바깥으로 밀었다. 별 반항 없이 창문 바깥으로 다시 머리를 빼고 터벅 옆으로 한 걸음 옮겨 봉고차의 출입문에 달린 유리창에 품에서 꺼낸 쇠붙이를 휘둘렀다.
파악!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봉고차의 창문이 깨지고 장갑을 낀 손을 넣어 안에서 문을 여는 헬멧 사내.
드르르륵.
차량 문이 열리고 이건과 함께 팔에 수갑을 찬 형사의 발길질을 흘리듯 피해내고는 그대로 바지춤을 잡아 뒤로 확 잡아당기니 이건과 함께 주르륵 봉고차 바깥으로 딸려나왔다.
바닥에 널브러진 경찰의 목 울대를 정확히 발끝으로 찍어버리고 품을 뒤져 수갑 열쇠를 찾은 그는 망설임 없이 이건의 수갑을 풀었다.
벌벌 떨고 있는 이건의 턱에 주먹을 꽂아 기절시키고는 그대로 오토바이 쪽으로 이건을 옮기는 그.
그 사이 조수석에 앉아있던 경찰이 내려 가스총을 헬멧에게 조준했다.
“꼼짝마!”
가스총따위는 신경쓸게 아니라는 듯, 경찰을 무시하고 커다란 오토바이에 짐짝을 싣 듯 실고는 고무바를 이용해 칭칭 동여맨다.
그 사이 순찰차에서 경찰관 세 명이 나타났고, 그 중 한 명의 경찰관은 테이저건을 들이댄다.
푸슈우우우
가스총이 발사되고, 흰색 가스가 헬멧 사내의 주변을 가득 채우지만 기침 재채기 한 번 없이 이건을 확실하게 고정시킨 헬맷 사내.
“쏴, 그냥 쏴 이새끼들아!”
사복경찰관의 명령에 테이져건을 들고 있던 경찰관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내를 조준했다. 사내가 순간적으로 좌 우, 지그재그로 몸을 흔들며 테이저건을 들고 있는 순경에게 접근.
탁!
발사된 테이져건을 스치듯 피해내고 그대로 어퍼컷으로 순경을 제압.
빡!
뒤로 벌러덩 누워 그대로 기절한 순경, 이어서 삼단봉을 휘두르는 순경의 하단을 쓸어차고, 그대로 일어서며 헬멧으로 남은 한명의 순경의 얼굴을 들이 박았다.
순경 셋을 숨 한 번 들이 쉴 시간에 제압하고 이건을 묶은 고무바를 풀려고 애쓰는 사복경찰에게 다가가 정강이를 밀어차고 그대로 한바퀴 돌며 주먹을 휘둘러 턱주가리를 사정없이 때려버린다.
빠악!
차에서 내린 매튜는 그 광경을 보며 입을 떡 벌리고 어버버거렸다. 평생 이런 액션영화에서나 볼법한 일을 경험해보지 못한 그로서는 나설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스, 스탑 맨!”
더듬거리며 간신히 말을 해 보지만, 헬멧 사내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오토바이에 올랐다.
오토바이는 신호를 무시하고 출발하고, 매튜는 멍하니 그 장면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벨소리에 잠에서 깬 테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간은 새벽 2시.
“뭐야?”
-··· 보스.
“매튜?”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
-정체불명의 사내가 나타나 이건을 납치했습니다.
테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죄송합니다.
“경찰들과 함께 이동하는 것 아닌가?”
-그 사내가 경찰들을 순식간에 제압했습니다.
“혼자서?”
-··· 예.
“농담이야?”
-죄송합니다.
“총은? 그 정체불명이라는 놈은 뭐 몸뚱아리가 방탄이라도 되나?”
-한국은··· 경찰들이 실탄 권총을 무장하지 않았습니다.
“쉿! 그딴걸 보고라고!”
-죄송합니다.
“당장 찾아내! 이건이 어디로 갔는지, 전권을 주지, 한국지부장과 직접 만남을 가져도 좋아.”
-예! 감사합니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테드.
벌써부터 내일 오전부터 로이드 로스차일드에게 욕 처먹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
매튜는 호텔에서 쉬지도 못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테드가 했던 말 처럼 CIA 한국지부장과 만남을 가질 생각이었다.
경황이 없어 창을 부르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기로 마음먹은 매튜.
“헬로?”
뒤쪽에서 들려온 영어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매튜. 그 순간 도로가에 승합차 한대가 정차하더니 문이 열리고, 그대로 매튜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영어로 인사했던 인물이 어둠속에서 씨익, 이빨을 드러낸다.
곧 걸음을 옮겨 가로등 아래에 선 인물, 영어가 어색하다 했더니 그 곳엔 김장원이 특유의 빙구같은 웃음을 흘리며 도착한 세단에 올라탔다.
“아따, 되다잉.”
***
인천의 물류창고.
오랜만에 이곳을 방문하니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추억이 돋는다고 해야할까?
싸늘하게 물고기밥이 된 놈들이 들었다면 서운할 생각이지만 하여간 난 그랬다.
“흐으··· 흐으···”
가뿐 숨을 따라 검은색 천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그의 이목구비를 짐작하게 만든다.
그의 맞은편에 내가 서자, 김장원이 씨익 웃으며 검은 천을 벗긴다.
조명 빛에 눈을 껌뻑이는 이건이 날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뜬다.
“오랜만이야, 빵쟁이?”
“이이익, 미친 놈이!”
손 짓을 하니 정장을 입은 제법 덩치 좋은 사내 하나를 끌고오는 김재형. 이건이 김재형의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네, 네가 어떻게?”
김재형은 신경쓰지 않고, 끌고 온 사내의 오금을 밀어차 무릎 꿀리고는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검은 천을 벗겼다.
얼굴이 많이 상한 매튜란 놈이 눈알을 또르르 굴리며 장내의 인물들을 살핀다. 내 얼굴을 보는 순간 동공이 크게 확장되는 것이 어떤 상황인지 짐작한 모양.
“반가워 이름이 매튜? 공항에서 한 번 봤지?”
“······”
“법정도 아닌데 묵비권이라니 쯧쯧, 충고하나 하지,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을 잘 보고 결정해, 네가 입을 열지, 아니면 고통속에 죽어갈지. 아쉽게도 네 놈이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건 명심하라고.”
부르르 몸을 떠는 놈을 무시하고, 뒤에서 들려오는 발 소리에 집중했다. 익숙한 걸음걸이, 보지 않았지만 누가 오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내 곁에 도착한 할아버지.
““회장님 오셨습니까!””
마치 사단장이라도 방문한 양,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직원들.
손을 휘휘 저으며 인사를 받아준 할아버지가 천천히, 천천히 정장 상의를 벗어 철웅에게 건네고, 소매의 단추를 풀러 옷을 걷으며 말했다.
“고생했다.”
“제가 뭘요, 직원들이 고생했지.”
“그래, 좀 만져도 되었는데 옳게 데려왔구나.”
“예, 할아버지 스트레스가 많아 보여서요.”
피식 웃은 할아버지가 어느새 김장원이 펼친 연장주머니에서 무엇을 사용할지 제법 긴 칼을 들었다 내려놓고, 장도리를 들었다 내려놓는다.
쇼핑이라도 하듯, 연장을 들었다 내려 놓을때마다 이건이 움찔움찔 몸을 떨고, 매튜는 긴장되는지 침을 꼴깍꼴깍 삼킨다.
“뭐, 뭣들하는 겁니까! 내가 잘못되면, 미국이 가만히 있지 않아! 로스차일드가 두렵지도 않은가?”
매튜의 발악에 나는 걸음을 옮겨 그의 앞에 섰다. 두려우면서도 태연한척 날 올려다 본다.
빠악.
망설임 없이 놈의 턱을 돌렸다.
“살고 싶으면 아가리 닫아.”
한방이면 충분했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쓸모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엔.
드디어 할아버지가 연장을 골랐다.
너클을 집어 자세히 살피다 손아귀에 장착해 보고는 몇번 주먹을 접었다 폈다 하더니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이신다.
“3년을 참으라 했다. 그런데 고작 1년을 버티질 못하는구나, 네 놈의 인내심은 고작 그정도인게지.”
“처, 천회장님! 살려주십시오 천회장님!”
“너는 산다. 죽지 않아, 나는 네 놈의 숨을 끊을 생각이 없다.”
할아버지의 말에 속도 없이 이건은 안도의 한 숨을 내뱉는다. 그러나 이내, 할아버지의 두 눈을 마주본 이건의 두 눈에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평생, 절망속에 살거라.”
마지막 말을 뱉은 할아버지는 어깨를 휘휘 돌리다 손을 쓰기 시작했다.
< 제 97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