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4화. >
문이 부서지는 소리에 놀라 루시의 방으로 달려온 메이드들과 루시의 어머니 록산나 록펠러.
록산나 록펠러가 루시와 우진이 부둥켜 안고 입을 맞추는 광경을 확인하고는 집사복을 입고 있는 노인에게 말했다.
“주변으로 오는 사람 없게 해주세요.”
“예.”
“멋지다 저런 사람, 문도 부수고 격렬하게. 그렇죠?”
“하하, 미세스 록펠러도 저런시절이 있지 않았습니까? 가주께서 결혼을 반대 하던 때가 떠오르는군요.”
“쉿, 목소리가 크네요 우리는 이만 물러날까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곤 손짓으로 메이드들을 각자의 일터로 보냈다. 그러고는 센스있게 흰색 천을 가져온 메이드를 눈으로 칭찬하고는 휑하니 뚫려있는 문을 막아주었다.
***
처음이었다.
심장이 두루방망이질 치고, 호흡이 가빠진다.
아침마다 하던 호석과의 대련 끄트머리쯤에야 느낄 수 있는 이 상황을, 단순한 입맞춤 한번으로 느끼다니 신기하단 생각이 떠 올랐다.
“하.”
“하아.”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서로에게서 고개를 땐 나와 루시.
“뭐, 뭐하는거야 우진!”
잔뜩 붉어진 얼굴로 내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루시.
“그냥, 어제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했나 해서.”
“그, 그런게 아니야!”
“이제 내 대답은 확실하게 들었지?”
입꼬리를 들어올리는 내게 고급 베개가 날아들었다.
팡!팡!
제법 세게 휘두르는 것 같지만, 푹신한 깃털베개가 아플리 없었다.
“나가! 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따가 저녁식사 자리에는 꼭 와, 어제 못 준 선물도 있다고.”
“나가라고!”
“하하하, 알았어 문은 미안.”
“됐으니까 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만 어쩐지 루시의 표정은 한 없이 밝아 보였다. 거울이 있다면 지금의 내 얼굴은 어떨까 궁금했다.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이겠거니 생각했다. 뭔가 이상하게 흥분되는 그런 느낌이니까.
록펠러 일가가 지내는 본관을 나와 별관으로 향하는데 별관의 분수대 앞에서 시가를 태우며 체스를 두고 있는 할아버지와 록펠러씨가 보였다.
“다녀온 일은 잘되었더냐?”
체스에 집중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그래도 곁눈질로 날 보고 질문하신 할아버지.
“아, 술은 좀 깨셨어요?”
“음? 취한적이 없다만?”
슬쩍 록펠러의 눈치를 살피는데 부쩍 유치한 장난을 치시는 할아버지가 어쩐지 더 좋게 느껴졌다. 쌓여있던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는 느낌?
“하하, 록펠러씨는요?”
“나도 취한적은 없었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하는 둘.
록펠러씨 또한 오랜만에 정말 편안하게 즐기는게 아닐까 싶어 괜스레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오, 그럼 오늘은 저도 껴서 함께 한잔하실까요?”
“체스에 집중해야 하니, 말 걸지 말거라.”
“나도 양해를 부탁하지.”
막 등을 돌리려는 찰나.
“아, 이번 대선 말일세 우진.”
“예.”
“알 구어 움직임이 심상치 않더군, 로스차일드 놈들이 요즘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 움직이고 있어.”
“그렇겠죠, 여론이 부쉬에게 향해 있으니까요.”
“아주 영악한 놈들이지, 알아두시게.”
“알고 있습니다. 아주 영악한 놈들이더군요?”
체스판에서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는 록펠러.
어떻게 아느냐는 물음이 눈에 가득해 보였다.
“이따가 술 한잔 나누면서 말씀드리죠.”
“크흠.”
술이라는 얘기에 다시 고개를 돌려 체스판을 쳐다본다. 약한 모습이 사뭇 귀엽게 느껴졌다.
내 방으로 걸어가는데 호석이 곁으로 다가왔다.
“매튜인가 하는 놈, 아직도 마킹하고 있죠?”
“예, 곧 있으면 한국에서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니, 보고가 올라 올 것입니다. 별 연락이 없는 것을 보니 밤에는 호텔에서 두문불출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로스차일드라··· 로이인지 뭔지 하는 그놈이 문제인 것 같군요.”
“루시를 바라보던 놈의 눈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어디 이건놈과 로스차일드가 붙어먹어서 얼마나 대단한 시너지를 낼지, 구경이나 해 보죠.”
“하하, 예.”
철컥.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호석이 묻는다.
“가신 일은 잘 되었습니까?”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럴 겁니다.”
흐뭇하게 웃는 표정이 진짜 삼촌 같이 느껴졌다.
***
매튜가 한국에 온지도 벌써 3일째.
오늘은 어째서인지 교도소로 향하지 않고 교도소 인근의 병원으로 향하는 매튜. 교도관을 대동하고 병실로 들어가니 수갑을 찬 채, 병실에 누워 있는 죄수번호 4885가 보인다.
“몸은 괜찮습니까?”
손을 뻗어 이건의 어깨를 건드렸는데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뜨는 이건.
“아, 안돼!”
매튜는 한국말을 알아 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은 민망한지 ‘큼, 큼.’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후우, 나를 꺼내 줄 방법이 있습니까?”
본격적이고 사뭇 진지한 질문에 매튜가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글쎄요, 정보의 질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요?”
“당신이 원하는 것이 우진 천의 정보요?”
“그렇습니다. 그와 가장 딥하게 싸워봤던 당신이라면, 우리가 모르는 어떤 약점 같은 것들을 알고 있을까 싶거든.”
“알고 있지.”
매튜가 흐뭇한 얼굴로 묻는다.
“그게 뭐지?”
“맨입으로 얘기하고 싶지 않군.”
매튜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며칠전 첫 만남과는 전혀 딴판인 사람이었다. 역시 재벌가의 총수였던 사람답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원하는 게 석방이라면 힘들겠는데?”
“이감은?”
“교도소를 바꿔달라?”
“내가 며칠 생각을 해 봤는데, 당신의 나라에서 날 요청한다면? 그건 가능하지 싶은데.”
매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미국의 힘은 우위에 있었다. 그리고 로스차일드라면 충분히, 미국이 아닌 제 3국을 통해서도 이건을 빼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석방이 아닌, 이감을 해달라··· 아쉽게도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당신이 한국이 아닌 다른나라의 ‘죄수’가 되는 방법이야.”
“뭐든 좋소, 이곳만 아니라면.”
“교도소 생활이 제법 힘들었던 모양이야?”
이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쯧, 말 장난 그만 하고, 내가 말한 요구조건부터 들어주시오.”
“대뜸 당신의 요구 조건을 들어 줄 수 있나, 당신이 가진 정보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르는데.”
이건이 매튜에게 손을 내밀었다.
매튜가 빤히 이건의 손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천우진에 관한 정보를 넘겨, 그래야 당신들이 필요한 정보가 뭔지 알 것 아닌가?”
“그냥 술술 영양가 없는 정보들을 풀어봐, 그것과 우리가 가진 서류를 비교하며 알아서 결과는 도출할테니까.”
“제법 거래를 할 줄 아는 사람이군.”
이건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럼 그 대가로 입원치료 일수를 좀 늘려주시오, 돈 몇푼이면 해결 할 수 있을테니까. 그래야 얘기라도 길게 할 것 아니겠소?”
“바로 처리하지.”
매튜가 병실 밖으로 나가고, 이건이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며칠이나마 지옥같은 고통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거란 생각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었다. 히죽 웃다가 한국말로 홀로 읊조린다.
“반드시··· 나간다.”
***
저녁식사자리.
보통은 편하게 다니던 루시가 오늘은 어쩐지 예쁘게 화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 모습에 할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록펠러씨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흐음, 사랑이란.”
할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으며 루시의 외모를 칭찬했다.
“화장까지 하니 정말, 여신이 따로 없구나 루시.”
“감사해요 젠틀 천, 누구와는 다르게 여자를 생각해주시는 분이시군요.”
찌릿 하고 제 할아버지를 째려본 루시가 자리에 앉으니 식사는 시작되었다.
스테이크를 반쯤 먹었을까?
“그래 우진,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이지?”
칼을 멈추고 록펠러를 쳐다보았다. 록펠러 4세도, 록산나도 궁금한 모양인지 날 쳐다본다. 어제와는 다르게 전혀 망설임 없이 말했다.
“이제 시작이니 그냥 지켜봐주시죠, 부담감은 서로에게 좋지 못한 방향이 될 수 있습니다.”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어른들은 이제 빠지라는 그런 얘기였다.
그 모습에 흐뭇하게 웃는 루시의 엄마 록산나.
제법 똑부러지는 대답이었는지 할아버지도 불만을 표출하진 않으셨다. 다시 막 포크를 움직이려는 때에, 록펠러가 할아버지를 부르며 말했다.
“쑤, 자네는 자네가 얼마나 살 것 같은가?”
“글쎄,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 멀지 않은 느낌일세 대비.”
어제부터 아주 죽이 척척 맞는다.
척하면 척인듯, 할아버지는 단숨에 록펠러의 의중을 눈치챘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록펠러가 다시 시선을 내게 옮긴다.
“우리는 증손주가 보고 싶구나.”
그리고 이내 그 시선이 다시 루시에게 닿고.
보고있던 록산나가 말했다.
“아버님! 아이들 체하겠습니다. 두분 다 20년은 거뜬해 보이시니까 이상한 말씀 마세요.”
“크흠.”
덕분에 루시는 아무런 말 한마디 못하고 접시에 코를 박고 스테이크도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끝냈다.
***
로스차일드가의 핵심인사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테드가 수행원들을 뚫고 로이에게 다가갔다.
“매튜에게서 보고서가 도착했습니다.”
로이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서두른다.
편안한 자리에 앉자마자 테드가 건네는 서류를 받아든 로이.
차분히 서류를 넘기다 인상을 찌푸리며 묻는다.
“뭐야 이거, CIA쪽에서 받은 서류랑 거의 별 차이가 없는데?”
“예, 그렇습니다.”
“이걸 보라고 준거에요?”
“이건이란 놈이 요구사항을 전해왔습니다.”
“요구사항?”
“자신이 얼마나 천우진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를 말하며, 교도소 이감을 요청해왔습니다.”
“그럼 이 보고서는?”
“매튜가 과연 그가 천우진에 대하여 잘 알고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그가 전해준 정보를 정리한 것입니다. CIA가 파악한 것과 다를 것 없지만, 그래도 정보기관이 가지고 있는 정보만큼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으니, 천우진의 약점을 안다는 그 말에 신빙성이 더해집니다.”
로이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감 절차는 까다롭죠?”
“알 구어쪽과 잘 얘기한다면, 범죄인인도조약에 따라 쉬울 수 있습니다.”
“오케이, 그럼 진행 해 봅시다. 테드가 직접 핸들링 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
며칠은 거의 할일이 없다시피, 휴가라는 목적에 맞게 노는 것에 집중했다. 홀덤을 하고 술을 마시고, 관광지를 산책하고.
모든 일에 적임자를 배정하고, 훌륭한 인재들이 노력을 하니 할일이 별로 없었다. 그것은 록펠러씨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부쉬가 선전을 하니 한가롭군.”
현재 록펠러가 집중하는 일은 ‘대선’외에는 없기 때문에 훨씬 더 한가로워 보이긴 했다.
“그나저나, 알 구어쪽에서 너무 조용해서 영 찝찝하군.”
백철웅이 할아버지와 나에게 다가왔다. 록펠러는 고개를 끄덕여주며 어떤 허락을 표시했다.
백철웅이 다가올 일이 대부분 ‘보고’류의 일이기에 양해를 구하기도 전에 허락한 것이었다.
“큰 회장님, 작은 회장님.”
큰 회장은 할아버지고 작은 회장은 나다.
“이건의 범죄인인도 신청이 들어왔다는 보고입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범죄인인도요? 어디서요?”
“미국입니다.”
록펠러와 눈을 맞췄다.
한국말이기에 알아들을리 없지만, 분위기로 록펠러도 무슨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는듯 보였다.
“알 구어는 가만히 있어도, 로스차일드는 움직이나 본데요?”
“한국에 무슨 일이 있나?”
“예, 이번 대선과 관련된 일은 아닌것 같습니다만, 아마 개인적인 일일 것 같네요.”
“로스차일드라면··· 흠.”
시가를 내려놓은 할아버지가 말했다.
“대비, 확실히 이번일은 개인적인 일이 맞네, 원래 사이가 안 좋던 놈이 하나 있거든? 아무래도 그 놈의 숨을 붙여놓은게 실수인 것 같네.”
“음, 쑤 자네가 그렇게 얘기한다면야, 걱정은 다시 집어 넣겠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고, 우리 친구잖은가?”
“하하, 듣기만 해도 든든하네, 걱정하지 마시게 자네의 손까지 빌릴 일은 없을 걸세, 우리 손주놈이 제법 능력이 좋거든.”
“후후, 알지 부러워··· 그저 부럽군.”
할아버지가 날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숨만 붙여 두거라.”
내 입꼬리가 스륵 올라갔다.
“그러죠.”
< 제 9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