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3화. >
록펠러 4세가 내미는 시가는 들기만 했는데도 향이 좋았다.
“좋은 놈이군요?”
“호오, 제법 시가를 아는 모양인데?”
“향이 좋길래 여쭸습니다.”
“좋은 놈이지.”
나무로 된 케이스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시가를 보여준다.
“여기 이 케이스 하나에 30만 달러야.”
“10개 정도 들었군요.”
“그렇지, 그래도 같은 크기의 시가보다 조금 더 오래 태울 수 있지, 이놈은 대략 2시간에서 3시간 정도야.”
정갈한 메이드 복을 입은 여인이 알콜 램프에 주전자와 찻잔을 내온다.
“로열티인데 시가와 제법 궁합이 어울려.”
“예, 잘 마시겠습니다.”
확실히 시가의 매캐하면서도 씁쓸한 약향과 로열티의 알싸함이 제법 잘 어울렸다.
“좋네요.”
“취향에 맞다니 다행이군.”
“시가든, 차든, 대화상대도 중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보기보다 아부도 할 줄 아는 친구였군.”
니코틴 덕분에 혈액이 끈적해져서일까? 첫 대면과는 달리 제법 나른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어느새 그의 경계도 조금은 누그러져 있었다.
“우리 딸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라스베이거스에 업무차 있었는데, 록펠러씨가 루시를 보내 선물을 전달하셨죠.”
“쯧, 우리 아버지가 자네를 점찍은 모양이군.”
“하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록펠러 4세도 분명, 루시를 통해 나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테다. 그런데도 굳이 내게 확인차 물어보는 이유, 내가 자신의 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구체적으로 궁금하기 때문이리라.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나?”
이게 본론일터.
“요즘 부쩍 루시가 자주 생각납니다. 특히 얼마 안 되는 즐거운 추억 같은 것들이 생각나죠, 일에 치이다 퇴근했을 때, 잠깐의 여유가 생길 때, 지금처럼 이렇게 시가 한 대를 즐길 때.”
뻐끔뻐끔 몇 번의 연기를 뱉어낸 록펠러 4세가 다시 물어왔다.
“사랑··· 사랑을 해 봤나?”
시가를 태우며 한참을 생각했다.
아무리 전 삶의 모든 기억을 뒤져봐도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진심을 느꼈을까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욕심이 많으면, 사랑을 멀리하게 되는 법이지.”
틀린말은 아닌 것 같았다.
분명 전 삶의 나는 욕심을 넘어 욕망덩어리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놈이었으니까.
과연, 그의 말처럼 나는 당장의 성공과 부와 명예 등을 위해 브레이크 없이 달려보고 싶었다. 사랑이나 연애 따위는 당연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도 한때는, 아버지처럼, 가문 대대로 남자들처럼 욕심이 제법 있었지.”
조용히 그의 얘기를 경청했다.
“어느 순간, 심장이 멎는 것처럼 강한 충격을 안겨주던 여자가 있었네, 지금의 루시를 꼭 닮은.”
루시의 어머니 록산나와 자신과의 러브스토리를 얘기하는 모양.
“모든 욕심이 부질없는 것 같았지, 돈은 지금도 써도 써도 모자람이 없어, 욕심이 많을 땐 항상 돈이 부족하다 생각했는데, 마음에 여유가 가득 차니 돈이 차고 넘치더군, 그러다 보니 지금처럼 자선사업 하면서 뿌듯함도 느끼고, 행복함도 느끼고 그렇지.”
“그러시군요.”
“어떻게 생각하나?”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흥미롭다는 듯 날 바라보는 그.
“포기를 모르죠, 세상 모든 것을 얻을 생각입니다. 사랑도 돈도, 명예도, 얻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잠시 뚫어지게 날 바라보던 록펠러 4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들었다면 아주 만족할만한 대답이군. 그래서 우리 노친네가 자네를 그렇게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모양이야. 스읍, 후우.”
연기를 내뿜고 어느새 완연한 녹색빛을 피워올리며 말하는 그.
“부디, 자네 뜻대로 일이 풀리길 기대하지.”
“예, 지켜보시면 알 겁니다.”
***
다음날.
딱히 일정은 없었지만, 할아버지와 록펠러의 가주는 지난밤의 폭음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와중이고, 또 루시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봉사활동을 떠났고, 어제 이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루시를 부르기가 뭐해 호석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마침 워싱턴 쪽에 SKY LINE의 지사가 있으니 그쪽이나 한 번 방문해볼까 싶어 굳이 움직였다. 태생이 베짱이랑은 거리가 먼 모양이다.
“제법 괜찮군요.”
호석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따로 연락 없이 급작스러운 방문이지만, 과연 SKY LINE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제대로 보기에 적합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지게차들, 쉼 없이 들락거리는 화물차들.
굳이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잘 만들어진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시스템을 보니 과연, 찰리 박이 칭찬했던 SKY LINE의 경영자에게 신뢰가 쌓인다.
혁신을 외치는 SKY답게, 인재채용에서 어떠한 선입견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말 다양한 인종의 직원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꽤 힘든 일 중 하나인 ‘택배’와 ‘물류 분류’작업일 텐데 밝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많이 보였다.
“됐네요, 더 볼 게 없겠습니다.”
정호석이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직원 복지도 괜찮은 모양입니다. 표정들이 좋네요.”
“확실히 그렇죠? 바로 움직이죠, 약속시간도 코 앞인데.”
“예, 회장님.”
원래는 내일이었던 고잉사와의 미팅약속을 오늘로 당겼다. 굳이 내일까지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약속장소는 번화가의 한 고급 레스토랑 프라이빗 룸.
“반갑습니다. 저번에 만났었죠? CEO 셰런입니다.”
“예, 반갑습니다. 우진 천입니다.”
이름처럼 젊은 CEO 셰런은 맞은편에 앉기를 권하며 자리에 앉았다.
“음식을 먼저 준비했습니다. 드시면서 편안하게 대화 나누시죠?”
“좋죠.”
미국의 스테이크들은 보통 두툼하고 헤비한 편인데, 고급레스토랑이라 그런지 양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제법 어울리는 와인과 곁들이니 일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달달한 디저트가 준비되고.
“음식은 입에 맞으셨습니까?”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군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디저트는 취향이 아닌지라 손대지 않고 셰런에게 통보하듯 얘기하니 피식 웃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윌리에게 언질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대한민국에 전투기를 팔고 싶습니다.”
“FX사업.”
“그렇습니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현재 대한민국은 1차 FX사업으로 총 40대의 전투기를 구매할 예정이다 물론 한두 푼 하는 사업이 아니니 일정을 길게 잡고 있을 터.
목적은 같았다.
대한민국이 고잉사의 F-15전투기를 구매하는 것.
“굳이 나를 만나고자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한민국 측에서도 이미 F-15를 후보군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렇죠.”
“최대한 빠르게 확정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SKY가 압력을 가해보라, 그 말이군요.”
셰런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내가 얻는 것은?”
내 질문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준비해온 카드를 꺼내는 셰런.
“생산 단가와 별도로 판매액의 5%, F-15전투기에 한한, 판매 라이센스.”
나쁘지 않은 조건.
과연 셰런이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조건이 만족스럽냐면 그렇지 않았다. 록펠러 4세에게도 말했던 것 같지만, 난 만족을 모르는 욕심 덩어리니까.
“F-15기에 관한 기술이전.”
흠칫 놀란 셰련.
“미스터 천! 그건 무리입니다.”
“어차피 SKY항공우주기술이 생산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기술이전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허가한 기술이전과, 기술 도둑질은 다릅니다. 당연히 후자가 더 시간이 오래걸리는 것도 당연하고요.”
“이미 차세대 전투기를 준비 중이지 않습니까?”
“현재의 F-15K도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 전투기입니다. 과거 전쟁터에서 활약하던 그놈과는 결이 달라요.”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알고 있습니다. 공대공의 스페셜리스트라 불러도 손색이 없죠.”
“아직 세상은 F-15를 원할 겁니다.”
“하지만 고잉사는 이미 차세대 전투기를 준비하고 있죠.”
“크음···”
“그때가 된다면 F-15의 재고를 처리하기 위해 혈안이겠죠? 또, 지금도 악성 재고가 남아 있을 것 같은데요?”
커피를 호록 마신 셰런이 날 빤히 쳐다본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이번 대한민국의 FX사업에 귀사의 악성재고를 좀 받겠습니다.”
셰런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하지만, 그의 몸 주변에서 풍겨져 나오던 노란색 연기가 흔들렸다. 동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대한민국 측이 수락하겠습니까?”
“그 부분은 내가 해결합니다.”
“흐음···”
“고잉사의 F-15기에 관한 기술이전을 약속해도 5년은 걸릴 겁니다.”
“글쎄요··· SKY의 성장 속도라면 빠르면 3년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F-15기를 한국에서 생산하는 순간, 최소 5년 안에 그 기술은 우리 손에 들어올 겁니다. 거기서 개량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겠지만, 큰 차이가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자신만만 하시군요, 전투기기술이 그리 만만한 분야가 아닙니다.”
“그러니 기술이전을 해달라고하지 않습니까?”
잠시 고민에 빠진 그.
나는 여유롭게 시가를 입에 물었다.
평소보다는 제법 작은 시가지만, 그래도 30분은 너끈히 버텨줄 놈이었다.
부드럽게 웃으며 셰런에게도 시가를 하나 건넸다. 코로 향을 맡더니 피식 웃으며 말한다.
“하, 졌습니다. 완벽한 기술 이전, 오케이. 악성 재고는 대한민국에 공급되는 전투기의 30%를 받아 주시죠?”
“좋습니다.”
빠르게 수락하니 오히려 셰런이 놀란다.
“아니 정말 대한민국 정부가 SKY의 조건을 수락하리라 생각하는 겁니까?”
“안 되면 되게 할 뿐이죠.”
“하!”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앞으로 10년 안에는, 자체 생산 전투기를 팔지 마십시오.”
“7년. 그 조건이면 수락하죠.”
“마저 태우고 계십시오, 잠시.”
고개를 끄덕여 주자 셰런이 잠시 함께 레스토랑을 방문했던 일행에게 다가가 뭔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약 20분의 시간이 흐르고, 이제 슬슬 시가가 뿌리까지 타들어 갈 때 쯤.
다시 자리로 돌아온 셰런이 말했다.
“미스터 천의 모든 조건을 수락하겠습니다.”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끄고, 그에게 악수를 건넸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부디 빠른 시일 내에 대한민국에서 결정통보 받기를 희망합니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는 7일 안에, 반드시.”
“정말 자신만만 하시군요, 대단한 프라이드입니다.”
***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다시 도착한 록펠러의 저택이 어쩐지 조금 더 아름다워 보인달까? 노을 덕분에 새로운 색감을 주는 저택은 어쩐지 따뜻한 훈내가 나는 것 같았다.
‘정말 자신 만만하다.’
셰런이 했던 말도 있지만, 여태껏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사람. 나는 누군가에게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인적이 없었다.
저택을 쓱 올려다보며 정호석에게 물었다.
“난, 어떤 사람입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평소에 생각해두었는지 의외로 대답은 쉽게 나왔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 오만이라기에는 그 능력이 너무 뛰어나 인정받을 사람.”
빙그레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루시한테는 쫌, 짜쳤죠 삼촌?”
피식 웃은 정호석이 말했다.
“남자는 패기지, 박력을 싫어하는 여자는 보지 못했다.”
“삼촌도 그렇게 장가가셨어요?”
“하하, 그랬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손님들이 머무는 저택이 아닌, 저기 보이는 록펠러 저택의 본관건물로.
고급 목재가 내 앞을 막아선다.
똑똑똑.
-누구야?
“나야 루시.”
-우진?
“그래. 문 좀 열어줄래?”
-···지금은 그냥, 혼자 있고 싶어 우진.
“아니, 난 널 봐야겠어.”
-미안, 우진··· 도저히 널 볼 수가 없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선택지는 몇 가지가 있었다.
기다리는 방법과, 다시 한 번 부탁하는 방법.
그러나 아쉽게도, 그 두가지 모두 내가 그리 좋아하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루시, 문에서 멀리 떨어져.”
-뭐?
“문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쾅!
내가 선택한 것은 세번째 방법이었다.
문고리가 떨어져 나가며 문이 열리고 침대맡에 앉아 날 바라보는 루시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난 그대로 루시에게 다가갔고, 루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짓···”
그녀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내 입술은 이미 그녀에게 닿아 있었다.
< 제 93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