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92화 (92/458)

< 제 92화. >

루시와 덥석 끌어안아 조손 상봉의 애틋함을 보여주는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나와 호석, 록펠러가 먼저 걷자 다급하게 철웅이 달려왔다.

“회장님, 같이 가시지요.”

할아버지를 위해 나를 붙잡는 것이었다.

록펠러가 눈치를 보냈다.

‘여기서 용서할 셈인가!’

‘그럴리가요.’

록펠러의 어깨를 감싸고, 한 팔로 나머지 어깨를 잡은 뒤, 거의 모시듯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거의 손녀와 할아버지간의 재회던데, 이쪽도 만만치 않아서.”

한국말도 모르면서 록펠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한다. 그 모습이 제법 웃겼는지 정호석이 먼산을 쳐다본다.

도도도도.

바닥을 딛는 캔버스화의 시끄러운 소리,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루시가 달려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록펠러와 나는 뒤돌아 섰다.

덥석.

루시가 안긴 사내는 아쉽게도, 이번에도 내가 아니었다.

“할아버지, 저기 젠틀 천이랑 같이 가! 젠틀 천이랑 할아버지랑 잘 어울려, 취미도 비슷하고 말투도 비슷하고.”

“허허, 그러냐?”

“그럼, 일로와 봐, 내가 소개시켜줄게.”

어쩐지 록펠러의 얼굴에 승리자의 미소가 감돌았다.

멀리 할아버지가 허허롭게 걸어오며 ‘쯧쯧’하고 혀를 차는 것 같았다.

정호석과 백철웅이 감히 날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는 어깨를 덜덜 떨었다.

“그냥 웃어요, 그게 덜 쪽팔려.”

“크흡.”

“컵.”

“하! 인생.”

오랜만에 제법 씁쓸한 패배감을 느꼈다.

그래도 제법 귀엽게 자신의 할아버지 품에 안겨 내게 윙크를 보내는 루시를 보니 마음은 가벼워 졌다. 정말 잠시 일터에서 멀리 떨어진 느낌.

“할아버지 여기는 젠틀 천!”

“하하, 루시 그 호칭은 좀 빼 달라고.”

“왜요? 젠틀하시잖아요?”

“반갑습니다 미스터 록펠러, 저번에 보내준 샴페인은 무척 훌륭했습니다.”

“오, 술 맛을 아시는 분이셨군요 하하, 우리도 보내주신 김치는 잘 먹고 있었습니다. 항산화 효과가 좋다는 말에 더욱 챙겨먹게 되더군요.”

“그랬습니까? 이번 선물도 기대해도 좋습니다. 이번에도 아주 한국적인 선물들로 준비했으니.”

“오, 벌써 기대가 됩니다. 자! 그럼 가실까요?”

***

한편, 한국에서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교도소를 나온 서양인.

그는 로스차일드가의 정보담당 매튜였다.

전날 멍청한 죄수놈이 흥분하는 바람에 원활한 소통이불가했다. 해서 오늘 다시 방문했으나, 교도관은 현재 재소자가 면회 할 상황이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쉿! 벌써 이틀째 소득이 없군, 후우··· 재계서열을 틀어쥐던 놈은 무슨 쯧, 멍청한 옐로 몽키.”

고개를 흔들며 차량에 오른 매튜.

한 눈에 보아도 표정이 좋지 못하기에 운전을 하는 이는 뭐라 말을 붙이지도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튜는 빠르게 스쳐가는 창문 밖 풍광에서 놀랍도록 발전한 ‘한국’에 내심 놀라던 차였다. 분명한국전 이후 고도의 성장을 하던 대한민국에는 IMF라는 망조가 깃들며 망해간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러니 수익률이 좋았나?”

그도 그럴것이 로스차일드가에서 아시아 외환위기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여들였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성장률을 보인다면 과연, 그 천문학적인 액수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에게 동양인 운전기사 창이 영어로 물었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닙니다. 운전하세요 혼잣말이었습니다.”

“예.”

“호텔까지는 얼마나 걸리죠?”

“약 1시간 30분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러시아워에 걸린다면 30분정도 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미국인이신가요?”

“예, 어머님이 한국분이십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보다 신선하다는 표정으로 묻는 그.

“자연과 도심의 조화가 아주 아름답네요.”

“그게 어쩌면 한국의 특징일지도 모르죠.”

“한국으로 들어온지 오래됐습니까?”

“IMF때부터 와 있었습니다. 지부장님의 수행원 역할이었죠.”

“그렇군요, 그럼 SKY그룹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까?”

창이 눈을 크게 뜨며 말한다.

“대단한 기업이죠.”

“그렇습니까?”

“예, SKY만 아니었다면, 우리 로스차일드가 최소한 100퍼센트 이상의 수익률은 더 올렸을겁니다.”

“그 정도나 차이납니까?”

“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었죠, 오죽하면 CIA를 통해서 그를 압박했을 정도입니다.”

현재 매튜의 업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신이나서는 한국의 기업 SKY를 칭송하는 그.

매튜는 차진 리액션을 보여주며 그의 말을 경청한다. 정보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하는게 기본중의 기본이니까. 보안상 매튜의 업무를 알 길이 없을테니 창은 친절하게 답변할 뿐이었다.

“호오.”

“몇몇 사모펀드나 헤지들만 알던 정보를 어디서 입수했는지, 정말 공격적인 투자를 하던 사람이 놀랍게도 현재 SKY의 주인이란 얘기가 있습니다.”

“확증은 아닌가 보군요.”

“예, 워낙 이곳 저곳을 우회했기 때문에 심증만 있습니다. 또, SKY의 현 주인이 너무 어리기 때문이기도 하죠.”

“공부를 많이 하셨군요?”

“얼마전 본사로 보고서를 올렸던게 접니다. 물론 작성은 지부장님이 하셨지만 하하.”

“아아, 보스가 가지고 있던 서류!”

“하하, 예.”

대화가 끊기니 어색했을까, 무엇인가 떠오른 것처럼 추임새를 넣으며 말을 잇는 운전기사 창.

“아, 로이드 도련님도 IMF로 손실을 좀 보셨죠, 정확하게는 이득이 작았다가 맞겠네요.”

몰랐던 사실인듯 창을 바라보는 사내.

“그랬어요?”

“예, 로이드 도련님이 투자하는 곳마다 신기할정도로 SKY가 쏙쏙 사가더군요, 무서울 정도로 공격적이게.”

“흐음, 그래서 이런 뒷조사를 시키나?”

“예?”

“아, 아닙니다. 혼잣말이에요 이거 습관이라.”

“아하, 유의하겠습니다.”

“SKY의 위상은 어때요?”

창이 말해 뭐하냐는 표정으로 오른손 검지를 활짝 펴고는 하늘을 찌르는 듯한 포즈로 말했다.

“하늘입니다. 회사명 답게.”

“와우, 엄청 후한 평가군요.”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분명한 하늘입니다. 무소불위,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는게 옳은 표현 같군요, 로고가 구름모양이잖아요?”

“그렇죠.”

“정말 그 구름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죠, 비나 눈이되는 구름처럼.”

“낭만적인 표현이군요.”

자신의 빅보스.

그러니까 로이드 로스차일드의 수발을 들고 있는 테드가 들었다면 인상을 찌푸릴만한 SKY의 칭찬을 계속 쏟아내는 창.

“더 무서운 것은, 앞으로도 어디까지 성장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3차 산업혁명 이후, 4차 산업혁명을 시작할 기업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죠, 그정도로 정점을 향해 달리고 있는 기업입니다.”

“와우, 당장이라도 전 재산을 투자하고 싶은 기업이네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 창.

“사고 싶어도 못 삽니다.”

“예? 왜요?”

“많은 주식이 시장에 나오지 않거든요, 특히나 인수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의 주식을 SKY인베스트먼트가 쓸어갑니다. 무서울 정도로 지분을 소유하죠, 절대로 M&A는 꿈꾸기 어려울정도로.”

“그렇게까지 비효율적으로 움직인다고요? 투자의 귀재가?”

쯧,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운전기사가 말을 이었다.

“지부장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비효율적이고, 자금이 마를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우습게 우리 예측따위는 벗어나는 기업입니다. 손을 뻗으면 황금을 쥐어오는 기업이랄까요? 실패를 모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로고처럼 구름같은 기업이죠, 닿을 듯 가까이 있지만, 결코 손으로 쥘 수 없는 그런.”

“와우, 당신은 정말 말을 잘 하는군요, 아마 그게 당신이 아직까지 수행원으로서 일할 수 있는 비결이겠죠?”

“하하, 은퇴하게 되면 어디 시골 라디오 DJ이나 해볼까요?”

“어울리네요.”

끼익.

차량이 멈추고.

“자 도착했습니다. 미스터 매튜.”

“즐거운 드라이빙이었습니다.”

“예, 매튜. 내일도 일정을 통보해주시면 바로 튀어오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요.”

“예.”

매튜란 인물은 호텔을 힐끗 쳐다보고는 내부로 들어갔다. 호텔의 이름은 힐튼 호텔이었다.

***

딱히 휴게소 따위에 들리는 일은 없었다.

워낙 우리 인원수가 좀 되고 이목이 쏠리는 편이니 잘한 결정이었다. 덕분에 다이렉트로 달려왔고 록펠러의 웅장한 저택에 차량은 부드럽게 멈추었다.

“호오, 듣던대로 아름답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시 봐도 역시나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과연, 자본주의 국가다워.”

할아버지다운 말씀이었다.

루시가 밝게 웃으며 왼손엔 자신의 어머니를, 오른손엔 자신의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와 할아버지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 여기는 우리 아빠, 엄마세요.”

“반갑습니다. 혁수 천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쁜 딸을 가지셨으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시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데이비드 록펠러 4세입니다.”

“아닙니다 어르신, 훌륭한 손자분을 두셨으니 그거야 말로 세상을 가진 기분이겠지요. 록산나 록펠러 인사드려요.”

루시의 아버지는 보기보다 무뚝뚝했고, 어머니는 교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우진! 얘기는 많이 들었죠?”

나는 한국식 ‘예’에 맞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처음뵙습니다. 우진 천, 루시의 친구입니다.”

루시의 아버지 록펠러 4세.

그는 아쉽게도 사업적으로 대단한 재능을 가졌다거나 욕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록펠러가가 운영하는 자선단체 만큼은 확실하게 운영하고 있지만, 영양가 있는 사업은 아니다.

그러나 ‘역시 록펠러’라는 말이 있듯, 그도 록펠러 가문의 일원이고 다음대의 수장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 확정적인 상황, 그에게는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인맥’이란게 있었다.

그것도 세계적인 대부호들 사이의 ‘인맥’

‘자선단체’의 수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며, ‘좋은 일’을 소문내고 싶은 부자들과 정재계 인사들과의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는 그 록펠러 4세가 내 인사는 본체만체, 목적은 따로 있는 듯, 날카롭게 쏘아보며 묻는다.

“단순한 친구인가?”

제법 곤란한 질문이었고, 록펠러 4세의 몸 주변에는 황색의 연기가 피어 올랐다. 이 집안에서 처음으로 내게 ‘경계’의 색을 보이는 인물이었다.

“당신은! 실례라고요, 우진 너무 곤란해하지 말아요 이 사람이 소문난 딸 바보라 그래요.”

여전히 경계의 눈을 풀지 않는다.

어쩐지 옆에서 할아버지의 따가운 눈초리도 느껴졌다.

“단순하지 않은 친구가 되고 싶군요.”

내 대답에 루시와 루시의 어머니 록산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록펠러 4세의 눈에서는 흡사 레이저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따가운 눈빛이 어느새 따스하게 변했다.내가 한 대답이 제법 만족스러우신 모양.

빠꾸는 없다.

때로는 그 어떠한 미사여구나 입에 바른 소리보다 직진하는 것이 효과적인 순간이 있는 법.

방금의 질문에 곤란해 한다면, 질문의 의도를 숨기지 않은 록펠러 4세에게도 실례겠지만, 날 바라보는 루시와 루시의 어머니 록산나에게도 실례일테다.

‘저 사람이 내 사람이다!’

외치긴 이르니, 적정 수준의 대답이 아니었나 싶었다.

“좋아! 쑤, 자네 손주 한 번 잘 키웠군.”

어느새 등장한 록펠러 3세, 현 록펠러가의 가주이자 루시의 할아버지의 말에, 나의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쯧 그래도 아쉽군 대비, 사내 놈이라면 좀 더 와일드 했어야지 쯧.”

차량에서부터 서로의 나이를 묻고 ‘친우’가 되기로 한 두명의 노인은 어느새 서로를 애틋한 애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대비’, 천혁수는 ‘쑤’가 되어있었다.

“그렇지, 찐하게 키스부터 했어야지 쯧쯧, 요즘 것들은 패기가 없어.”

“인정하네, 대비.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은 아쉽게도 가르치지 못했어, 손주놈과 나이차이가 좀 있거든.”

“저기 밋밋한 내 아들놈도 보시게, 나였으면 내 딸이 짝사랑하는 사내를 데려 왔으면 잘난 얼굴부터 박살냈을 걸?”

“그래야지, 여긴 미국 아닌가? 샷건을 꺼내와도 모자랐을 걸?”

“암, 그 샷건을 보고도 ‘따님을 내놓으십시오!’정도 멘트는 날려줬어야 사내지.”

어느새 루시의 얼굴은 터질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고는 갑자기 휙 돌아서 집안으로 먼저 들어가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역시, 전쟁을 모르는 것들을 나약해.”

당연하다는 듯 그 말을 받아내는 록펠러.

“그렇지, 하! 오늘 오랜만에 그 심장 뛰는 시간들을 함께 나눌 친구가 생겼군.”

“좋지, 독주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겠지?”

“물론이야, 아마 자네의 남은 살 날의 며칠은 삭제되어 있을걸?”

대화의 수위가 상상 이상이었다.

요단강 대화라니.

“히틀러에 대해서 소문만 들었는데, 생생한 얘기를 들을 수 있겠군.”

“그럼, 걱정하지 말게, 나도 그 일본의 만행들이 궁금하군.”

“가지.”

“가세.”

아주 와일드에 절여져서 ‘남자 아이가!’하는 그 둘의 대화에 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다. 엄청난 마이페이스로 ‘라떼는’을 시전하는 두분.

“제법 사내다웠지만, 아직 손녀를 주긴 이르네.”

“이해하네 데비, 귀한 손녀, 귀하게 보내야지.”

“이해해주니 고맙군 하하, 역시 자네는 말이 잘 통해 정말 오랜만에 벗을 만난 기분이야.”

“나도 마찬가지일세. 허허.”

두분이 ‘하하’, ‘허허’대화를 하며 사라지는 사이, 어색하게 남겨진 나와 루시의 부모님.

“크흠, 어쨌든 우리 집에 온 것을 환영하네.”

록펠러 4세의 말에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말했다.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아버님.”

“크윽··· 자네도 나 못지 않겠군.”

“하하···”

얼떨결에, 루시의 아버지 록펠러 4세와 공감대가 쌓여버렸다.

이번 미국행도 제법, 재밌을 것 같았다.

벌써부터 예상을 벗어나는 일들이 생기고 있으니 말이다.

< 제 92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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