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1화. >
웅성웅성.
주변이 술렁거리는 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손자놈이 감히 할아버지를 앉아서 맞이할 순 없었다.
“아주 멀리서도 할아버지 온다는 소문이 제 귀까지 들어옵니다.”
“어휴, 딴따라가 따로 없어, 딴따라가.”
할아버지 엄살에 피식 웃으며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꽤 많은 인파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늦지 않게 오셨네요.”
“조금 더 천천히 올걸 그랬다.”
“딱히 사실 건 없으니까, 우리 라운지로 가시죠?”
“오냐, 그것이 편하겠구나.”
SKY의 공항 라운지, 굳이 만들 필요는 없지만, 유지비가 비싼 것도 아니고 출장을 다니거나 손님을 맞이할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공간.
대한종합금융그룹도 라운지가 있었다. ‘카드’사를 운용하고 있으니 당연했지만, 그쪽은 아무래도 제법 많은 고객들이 방문하는 편이라 SKY라운지가 조금 더 편했다.
“한산하구나.”
“하하, SKY의 주주거나, 인베스트먼트에 투자신탁 10억원 이상인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임직원들은?”
“당연히 가능합니다.”
내부로 들어가니 딱 2팀의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날 알아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영광입니다 회장님.”
할아버지가 그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신다.
“출장들 가시나봐요?”
“예, 회장님.”
누군지 모른다.
SKY임직원이 한 둘도 아니고, 일일히 알 수 없었다. 라운지의 리셉션이 조용히 내게 다가와 꾸벅 인사하고는 센스 있게 내부의 인물들이 누구인지 작게 설명했다.
“저쪽 테이블은 SKY전자의 가전사업부 이종렬 이사, 가전사업1팀 김형석 부장, 같은 팀 김미나 대리입니다. 저쪽 테이블은 SKY항공우주기술 대외영업팀 이중수 이사와 영업3팀 박형석 차장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단 뜻을 보이고, 정호석에게 눈짓하며 먼저 전자의 임직원들에게 걸어갔다.
“라운지 음식은 좀 맞으세요?”
“그럼요 회장님, 늘 이곳에서 편히 쉬다 가고 있습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앉아 있던 김형석 부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 가전사업부, 아직은 힘을 내지 못하고 있지만 여러분들이 이렇게 열심히니 곧, 좋은 성과가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정호석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어느새 흰색 봉투 하나가 김미나 대리에게 전달된다.
이게 뭔가 하고 날 바라보는 똘망똘망한 눈이 퍽 귀여웠다.
“금일봉입니다. 여러분 출장에 요긴하게 사용하세요.”
“가, 감사합니다 회장님!”
“달러로 준비 했으니까, 어느 나라는 가시던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겁니다.”
잔뜩 감동한 그들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SKY항공우주기술 쪽으로 이동했다. 같은 식의 인사가 오가고, 궁금해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이중수 이사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고슬라비아로 향하는 길입니다.”
“음··· 어려운 길이겠군요, 한창 시끄럽죠?”
“예, 정권 붕괴가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라 그렇습니다.”
무기라는 것은 슬프게도, 세상이 불안할 때 잘 팔리는 법이다. 아직 SKY가 생산하는 무기들은 첨단기술의 집합체라 보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충분이 살상력을 갖추고 있는 무기들이다.
미국에게 생산 면허를 받았으니 판매도 자유로웠다. 물론 수익의 일부는 해당 제품의 원작자인 미국놈들에게 흘러들어간다.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으니, 알아서 열심히 일하는 임직원들이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SKY항공우주기술이 ‘적자’만큼은 피하고 있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이미지에 무리 없는 선에서 하셔야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예! 절대 SKY의 제품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쌓지 않게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호석을 보며 물었다.
“개인경호 2인 붙여주세요, 정국이 시끄러운 곳이니 안전을 기해서 나쁠 것 없습니다.”
“조치하겠습니다.”
호석이 품에서 봉투를 꺼내 박형석 차장에게 건넨다. 그들의 감사 인사를 뒤로 하고 간단한 다과상을 받은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이 놈, 직원들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구나.”
“하하, 혹시나해서 봉투 몇개 챙겨왔습니다.”
“잘했다. 작은 정성과 배려도, 받는 이에게는 다른 법이니까.”
그 사이 정호석은 자신의 부하직원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내게 다가와 작게 말했다.
“회장님, 시가 한대 하시겠습니까?”
할아버지를 쳐다보니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운지 내부의 흡연실로 들어가 시가를 입에 물었다.
“아까 말씀하셨던 인물의 이동 경로가 심상치 않아서 바로 보고드립니다.”
슬쩍 시계를 보니 겨우 1시간 30분정도가 지난시점이었다.
“말씀해보세요.”
“이건의 저택을 기웃거렸고, 다시 이동중에 있는데 그 경로가 이건이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로 향하는 길입니다.”
“호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튀어나오네요?”
“완전히 뒤를 캐겠습니다.”
피식 웃으며 시가 연기를 속으로 빨아들였다.
일순간 퍼지는 니코틴이 상상의 나래를 자극한다.
“오랜만에 가슴 뛰네요, 외국놈이 나를 적대하면서 이건회장을 찾는다라, 하!”
“확실하게 마킹하겠습니다.”
“예, 김장원 사장 심심하면 일 좀 하라고 하세요.”
“조치하겠습니다.”
***
쿵!쿵!쿵!
곤봉으로 철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죄수복을 입은 사내가 화들짝 놀라하며 몸을 떤다.
“어이, 4885.”
교도관의 부름에 답하지 않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작은 틈을 쳐다보는 4885.
“면회.”
면회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다.
과연 누가 자신을 보러왔는지 궁금한 눈치, 그러나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인지 잔뜩 움츠러 있던 태도를 버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끼이이익.
두꺼운 철문이 열리자 독방 내부로 빛이 들어왔고 4885라는 죄수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이건이었다.
전 삼현의 총수.
창백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하얀 얼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처럼 풀린 동공.
서릿발 날리던 기세를 풍기던 재벌 총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빨리 가라는 듯 어깨를 밀치는 교도관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앞으로 쭉 내밀어 교도관을 밀치려 한다.
“아, 이새끼가 나는 여자 좋아한다니까 말끼를 못알아 먹어. 빨리가 새끼야.”
자존심이 상해서인지, 아니면 두려워서인지,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긴다.
면회실 안으로 들어간 이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렸다. 그도그럴것이 전혀 처음보는 인물이 강화유리창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
“하이, 캔유스피킹 잉글리쉬?”
자리에 앉으며 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의 몰골을 확인한 외국인이 ‘쯧’하고 혀를차며 계속해서 영어로 말했다.
“얼굴이 말이 아니군?”
“너는 누구지? 천우진이 보냈나?”
“노노, 나는 미국에서 왔어.”
“미국? 미국에서 날 왜?”
“네가 말한 그 천우진이라는 놈이 궁금해서 말이야.”
“왜 궁금해 하는데?”
“한국인가? 중국에는 그런 말이 있지 않나? 적의 적은 동료다 뭐 그런말.”
이건이 눈을 빛내며 놈을 쳐다보았다.
“천우진이 적이다?”
“그렇지.”
힘 없고, 쇄약해가던 병약한 노인이었던 이건.
갑자기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큰 목소리로 강화유리를 두들기며 말했다.
“날 여기서 내보내 줘! 그렇게만 해준다면 천우진 그 어린놈을 씹어먹을테니! 나만큼 그 놈을 잘 아는 사람은 업을걸? 네 놈들에게도 아주 좋은 정보가 될거야! 겉으로 봤을때는 전혀 모르는 그런 정보들이 이 머리속에 차고 넘친다고!”
교도관이 일어서는 것을 본 외국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봐, 진정하라고 진정.”
“시발! 나를 내보내 달라고!”
더이상 대화를 진행할 수 없을만큼, 이건의 눈에는 간절함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결국 일어선 교도관의 바깥에 소리치고, 다른 교도관까지 합세해 양쪽에서 이건을 잡고 끌고가기 시작했다.
고개만 돌려서 애처롭게 외치는 이건.
“내보내 줘! 제바알!”
질질 끌려가는 그의 죄수복 엉덩이 부분에 검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외국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쯧쯧, 이곳도 미친놈들이 많은 모양이야.”
***
다시 독방안에 돌아온 이건은 자신의 병신 같은 짓거리를 한탄했다.
쿵!쿵!
벽에다 이마를 박으며 차분하지 못했던 자신의 태도를 반성했다.
“그회여셔··· 그회···”
입안에 물려있는 재갈 때문에 발음이 정상적이지 못했다. 미친 교도관 새끼들은 이건이 혀라도 씹을까 이렇게 항상 무언가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24시간 감시의 눈이 이건을 따라다녔다.
목을 매려고 하면 귀신같이 들어와 곤봉으로 몸을 두들긴다. 학습된 매질은 ‘자살’이란 생각을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었다.
쿵쿵쿵!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소리, 곤봉으로 철문을 두들기는 저 소리만 들으면 이상하게 오금이 저리고 고개를 빳빳히 세우기 어려운 공포가 찾아왔다.
“4885, 샤워.”
“아히어도 대! 아히어도! 깨끄해! 깨끄해!”
“뭐라는거야 미친새끼가, 빨리나와.”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입에 물고 있던 재갈을 풀어주는 교도관.
“나 안 씻어도 돼, 깨끗하다니까?”
“규정이야 새끼야, 빨리 가.”
제법 거세게 반항하는 이건 때문에 교도관 하나가 더 나타나 다시 양쪽에서 이건을 거의 들다시피해 옮기기 시작했다. 연신 발버둥치던 이건이 어째서인지 반항을 멈추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교도관이 고개를 돌리다 크게 외쳤다.
“야 시발, 혀 깨물었다. 아가리 벌려!”
건장한 성인 사내 둘의 손아귀에 결국 입을 크게 벌린 이건, 교도관 하나가 재빨리 다시 재갈을 물렸다.
플래시를 꺼내 입안을 살피는 교도관.
“많이 찢어졌냐?”
“후아, 모르냐? 이새끼 어금니 다 뽑아놨잖아?”
“누가?”
“누구긴 새끼야.”
“아아, 이빨귀신.”
“그래, 이새끼는 아주 틈만나면 자살기도를 하고 지랄이네 아오 피곤해, 보건실 먼저 들렸다가 샤워실로 간다.”
“오케이, 그러자고.”
이건의 멍한 두 눈동자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그 무엇 하나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이런 삶은 단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다. 언제나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주무르던 그에게는, 절대 견디고 버틸 수 있는 종류의 고통이 아니었다.
***
공항에 도착해 입국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순간.
“젠틀 천!”
멀리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리고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는 루시가 총총 뛰어오르며 손을 흔든다. 그리고 그에 보답하듯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도도도 양팔을 벌려 달려오는 루시.
나도 모르게 양팔을 쫙 벌렸다.
덥석 안겨오는 그녀, 아쉽게도 그녀가 안겨온 상대가 나는 아니었다.
“젠틀 천! 보고 싶었어요!”
“하하, 누가보면 내가 루시의 할애비인줄 알겠구나.”
할아버지와 루시가 뜨거운 재회를 하는 사이,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록펠러씨에게 악수를 청했다.
“다시 뵙습니다.”
“쯧쯧. 자네나 나나, 졌구만.”
“큽···”
억지로 웃음을 참는 정호석에게 악수를 하고 있던 록펠러와 내가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얼른 고개를 돌려 먼산을 쳐다보는 정호석.
“루시의 부모들은 내가 억지로 집에 있으라고 했네, 공항에서부터 루시가 저럴 것 같았거든.”
“하하, 잘하셨습니다.”
“이런 공간에서 너무 시끄러운것도 민폐가 아니겠나?”
“그렇죠, 저쪽은 뭐 알아서 오라고 하고 우리부터 가시겠습니까?”
“그거 좋지.”
록펠러와 나는 합심해서 걷기 시작했다.
그제야 뒤에서 도도도 달려오는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짐이 많구만.”
“하하, 록펠러씨가 나를 위해 돈을 쓰셨는데, 서운하게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아아, 후원금 얘기라면 되었네 그 정도 쯤이야 부쉬가 진짜 된다면 충분히 수십배 불릴 수 있으니까.”
“그래도 그게 아니죠, 성의를 받았으니 성의를 보여야죠?”
“하하, 겨우 2억달러에 뭘.”
흠칫 놀랐다.
한 2천만 달러 정도를 1차 후원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누가 천조국 아니랄까봐 후원금 스케일이 달랐다. 그러나 이내, 록펠러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날파리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싶으셨나보군요?”
“하하하하, 역시 자네는 다른 헛물들과는 다르군, 맞네 승부가 확실하다면, 압도적인 베팅을 해야지, 리스크가 없으니 노 리스크 하이리턴.”
“그 정도로 날 믿으시는 지 몰랐습니다.”
“믿어야지,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 제 91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