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90화 (90/458)

< 제 90화. >

마침 호텔에 간 김에 관리를 받고자 했다. 할아버지도 요즘 부쩍 억지웃음을 짓느라 고생이 많으실테니 이쪽으로 모시고자 했다.

“할아버지 몇 시에 오신데요?”

“예, 회장님 일정이 끝나는 7시쯤이 될 것 같습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6시가 다된 시각.

태우다 말았던 시가에 다시 불을 붙이고 말했다.

“식전이시겠네, 룸서비스를 좀 시키죠 7시에 맞춰서.”

“처리하겠습니다.”

제법 더워진 날씨, 해도 꽤나 길어졌다.

완연한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이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여름휴가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CIA한국지부장의 요청도 있으니 빠른시일내에 미국을 한 번 다녀와야겠다 싶었다.

“이 놈아 팔자 좋아 보이는구나.”

눈을 뜨니 어느새 완연한 밤이었다. 손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니 7시 10분. 잠시 잠에 들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돌리니 할아버지 너머에 잘 차려신 룸서비스 한 상이 보인다.

“할아버지 기다리느라 목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상한 자세로 자느라 목 떨어지는 줄 알았겠지.”

“얼른 앉으세요, 시장하셨을텐데.”

“오냐, 먹자.”

식탁으로 향하니 힐튼 호텔의 모든 음식을 내오기라도 한 것 처럼 많은 양의 음식이 도착해 있었다.

“이야, 우리 호텔 음식 많네요.”

“특별히 모든 메뉴를 시켰습니다.”

“잘하셨어요.”

가장 상석에 앉은 할아버지가 말했다.

“네 놈들도 앉아서 숟가락 들어, 오늘 일은 끝났다.”

양고기 스테이크를 썰면서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미국을 좀 가야될 것 같아요 할아버지.”

“또 미국이냐?”

“이번엔 할아버지도 같이 가시죠? 록펠러씨도 그렇고, 루시도 그렇고, 할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더라고요.”

“흐음.”

“요즘 부쩍 바쁘게 일하셨으니까 휴식도 필요하지 않으시겠어요? 미국에서는 할아버지한테 관심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편하게 쉬다 오시죠?”

다른 부분보다 ‘관심 있는 사람이 없다.’라는 말에 할아버지가 흡족한 표정을 보였다.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그러자, 요즘 통, 카메라때문에 답답하던 참이었다.”

연예인 같은 대답에 나도 모르게 불쑥 웃음이 튀어나왔다.

“웃기는 썩을 놈.”

“하하하, 조만간 영화라도 한편 찍으시는 것 아니죠?”

“일 없다 이 놈아, 할애비 죽일 셈이더냐?”

“에이! 할아버지 또 엄살, 아까 낮에 출연하신 방송 봤는데 저는 제가 잘못 봤나 했습니다. 오죽하면 호석 삼촌한테 물었겠어요? 우리 할아버지 맞냐고.”

호석이 막 함박스테이크를 썰다가 움찔 놀라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핀다.

“너희 두 놈이 나를 비웃으며 TV를 봤겠구나.”

“연기 좋았습니다. 백부님.”

“어쭈, 이제 네놈도 우진이 녀석을 거드는게냐?”

백철웅이 정호석의 등짝을 한 대 후려치며 말했다.

“연기라니 임마, 백부님은 진심이셨어, 그 어려운 사람들이 노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것에 얼마나 안타까워 하셨는데 짜식이.”

철웅의 낯간지러운 말에 할아버지가 크음, 하며 샴페인으로 목을 축였다.

“역시, 혼을 담은 구라! 철웅 삼촌까지 완전히 속으셨네요?”

“이 놈이! 나를 정확하게 보았구나.”

“그러니까 이제 헐리웃으로 진출하시지요.”

“오냐 씹어먹어주마.”

“옙, 가능한 빠르게 일정 잡겠습니다.”

“식사하고, 호텔 시설이나 즐기다 갈까? 오랜만에 관리도 좀 받고, 마사지도 받고.”

“그러시죠.”

식사가 끝나고 할아버지와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마사지를 위한 침대위에 엎드려 누웠다.

“아, 할아버지.”

“왜.”

조금은 귀찮다는 대답이 날아왔다.

“그 한복명인께 대량 발주 시키면 좀 그렇죠?”

“아무래도 그렇지, 손수 제작하는 놈들이라 힘들게다.”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디자인은 명인께서 하시더라도.”

“그럼 희소성이 떨어지지, 어디 그런것을 상등품이라 할 수 있겠더냐?”

“수십, 수백만장이 팔리면요?”

잠시 말이 없던 할아버지가 ‘흐음’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말했다.

“어디서 돈이 들어오는 냄새가 나는구나.”

“하하 그렇죠?”

“굳이 선물로 한복을 챙겨간다기에 그럴필요가 있나 싶었더니··· 의외로 코쟁이들이 좋아한 모양이야.”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록펠러씨와 그의 손녀가 입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사교계에서 끗발 좀 날리는 사람들은 저 옷인 뭔가 싶었겠죠.”

“그런것도 계산했더냐?”

“약간은 요.”

“바라는게 무엇이기에 굳이 그런 짓을 했느냐?”

“전에 한 번 말씀드렸죠?”

“무엇을?”

“기억 안 나세요? 전 세계에 영향력있는 기업은 ‘문화’를 잡아야 한다고 했던 말.”

“얼핏 들은 것도 같구나.”

“미국의 비밀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옷, 있는 놈들만 입고 다니는 그 옷,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하!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겠다는 뜻이구나.”

마사지사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말했다.

“그거죠, 우리나라에서도 ‘명품 브랜드’나오지 말란 법 없잖아요? 프랑스나 이태리 놈들만 명품 만듭니까? 우리도 만들 수 있습니다. 놈들만큼 오래된 역사와 오래된 전통이 있잖아요?”

“그래, 그래서 미국의 귀족놈들을 이용하자?”

“뭐, 그렇다는 얘기죠 천천히 스며들 듯 잠식해나가야죠, 문화란 그런 겁니다.”

“되었다 이제, 일 얘기는 그만 하자구나, 어차피 네 놈이 알아서 할 것 아니더냐?”

“하하하, 예.”

***

출국전에 몇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본래의 역사에서 FX사업은 고잉사의 F15가 확정되었다. CIA한국지부장 윌리놈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원 역사에서도 고잉사가 뒷구멍으로 무엇인가를 했지 싶었다.

현재는 나를 통해 뭔가 일을 추진하고 싶어하는 모습이니 현재 한국군의 생각이 어떤지 좀 떠 볼 필요가 있었다.

“반갑습니다. 천우진입니다.”

내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인물은 현 공군의 수장 공군참모총장 김운수였다.

“전도유망한 사업가를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딱딱한 말투.

군인이 제법 잘 어울리는 그런 말투였다.

“이번 FX사업, F15로 가시지요.”

“하하하, 듣던대로 대쪽같은 성품입니다. 앉기도 전에 본론이라니요?”

“이미 우리 SKY항공우주기술이 보잉사에게 OEM과 기술이전을 약속 받았습니다. 물론 신뢰성과 함께 성과가 있어야겠죠.”

“예, 들었습니다. 미국의 많은 군수업체와 협력관계를 이룩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한국의 국방력 상승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말이 정말 많은 FX사업.

IMF로 인해 더딘 진행을 보이고 있었지만, SKY항공우주기술이라는 나의 회사가 생기면서 요즘 부쩍 활기를 찾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전투기 생산설비까지 이미 완공된 상황, 나는 첫 시작을 한국이 사용할 전투기 생산으로 하고 싶었다.

“흐음, 이미 후보군에 있는 전투기군요.”

“해외 전투기를 도입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요.”

“또한 한국의 많은 무기들이 미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호환성’면에서 미국의 전투기는 익숙하고 훌륭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정합니다.”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만큼, F15전투기 도입을 확정 짓는다면, SKY가 생산할테고, 국부유출도 최소화 하고 또, 대한민국의 전투기 기술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고잉사의 F15를 적극적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상부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고요.”

역시 원 역사처럼 제대로 흘러가고 있던 모양이다.

혹시나 나로 인한 나비효과가 있어, 역사가 비틀렸을까 싶어 굳이 자리를 만들었는데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로 옆이 우리 SKY항공우주기술의 센터가 있잖습니까? 자주 놀라오십시오 참모총장님.”

“하하, 군인과 기업인이 자주 어울려 좋을 것이 있습니까?”

“와서 많은 무기들을 구경해보시라 그런 얘기였습니다.”

“하하, 예. 가끔 구경가보겠습니다.”

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 식기도 전에 용건이 끝났다. FX사업의 실무진이라 할 수 있는이의 생각이 F15를 원한다고 하니, 더 이상 얘기 할 것이 없었다.

그가 말했던 ‘상부’와 대화를 하면 될 일.

“벌써 가십니까?”

“예, 아무래도 서울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아, 예 살펴가십시오.”

바로 국방부 장관등을 만날 필요는 없었다.

아직 고잉사에서 내게 제시할 제안들을 듣지도 않은 상태에서, 굳이 움직일 필요는 없을테니까.

그러고보니 군부도 제법 썩어 있을텐데, 정계만 도려내고 군부는 아직도 싹을 키우고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조수석에, 군부에 제법 지식이 있는 호석이 앉아 있으니 망설임 없이 물었다.

“군부도 많이 썩었죠?”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호석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하하, 고인물은 언제나 썩습니다.”

“그러니까요, 너무 당연한 질문이었죠?”

호석이 룸미러로 날 한 번 쳐다보더니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군부독재 시절의 후배들이 장악하고 있는 군부입니다. 깨끗할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군요.”

“워낙 폐쇄적인 부분이 있어, 독재를 타파한 시대에도 어쩌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왜 이렇게 즐거워 하세요?”

확실히 룸미러에 비친 정호석의 표정은 몹시도 설레 보였다.

“제가 당한게 많아서요.”

군인시절 제법 억울한게 많았던 모양.

“미국 다녀와서 상태좀 보죠.”

정호석은 내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FX사업이나 무기 사업에 방해하는 놈이 있다면 털겠다는 내 뜻을 알아 들은 것.

“하하, 오랜만에 또 재미있겠네요.”

“PMC정보팀이 좀 움직이면 편하겠네요.”

“예, 지시하겠습니다.”

***

비행기를 타기 전, 공항 내에 마련된 식당에서 한식을 먹었다.

“역시 한식은 냉면이죠.”

“맞습니다.”

시간이 남아서이기도 했지만, 요즘 매우 바쁜 스케쥴을 달리시는 할아버지를 기다리기 위함도 있었다. 방송국까지 따라가 기다려도 되지만, 방송국은 내가 부담스러웠다.

어딜가든 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특히나 그곳이 방송국이라면 더욱 그렇다. 기자들과 언론인들이 날 가만 놔 두지 않을 터.

“아, 요즘 사채시장 쪽은 어때요?”

“김장원 사장이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

“박무성 쪽에서는 별 말 없고요?”

“예.”

“우리 할아버지가 은행일도 손떼고 정치한다고 하면, 꼬일 날파리들 없을까요?”

내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은 정호석이 빙그레 웃었다.

“걱정하실 일 만들지 않겠습니다.”

“예, 확실하게 가주세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잘구워진 갈비대를 뜯고, 시원한 물 냉면을 한젓가락 후루룩 퍼 먹는다.

“요즘 천가 키즈들이 부쩍 성적이 좋던데요?”

“하하, 그렇습니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사법계에도 발을 담그겠어요?”

“예, 1차 합격자만 8명이 나왔습니다.”

“좋네요, 미국 다녀와서 한번 구경하러 가겠습니다.”

“예, 일정 잡아 놓겠습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끝내고, 꽤 많은 시간이 남았기에 시가를 태우기 위해 공항 바깥으로 움직였다. 막 시가의 불을 붙이고 몇 모금 뻐끔거리는데 어디선가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사람을 찾았다. 처음보는 외국인이 날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문제 있습니까?”

“아, 불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불을 빌려달라는 말과 함께 내게 접근하는 놈을, 내 주변에서 담배를 태우던 경호원들이 막아선다.

그러고는 경호원들 중 한 명이 불을 빌려 주었다.

“용건은 그게 전부입니까?”

“예? 그럼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용건이 있겠습니까?”

피식 여유롭게 웃는 외국인.

“어디서 왔습니까?”

“미국.”

내 눈치가 이상하다는 것을 진즉에 알아챈 정호석이 시가를 피우다 슬쩍 근접 경호원중 한명에게 귀엣말로 무엇인가 말했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저 미국놈은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이미 이 놈이 단순히 불을 빌리러 온 것이 아닌것 같단 생각을 확신하고 있었다.

놈의 온 몸에서 붉은색 연기가 넘실거리고 있으니까.

“관광?”

“놉, 비즈니스.”

“아하. 한국말은 좀 합니까?”

“아니요, 전혀 못합니다.”

“고생 좀 하시겠네, 모쪼록 좋은 성과 달성하세요?”

“하하, 생각해주니 감사합니다.”

놈은 어느새 필터만 남은 연초를 비벼 끄고는 천천히 걸어서 사라졌다.

“어디서 온 놈일까요?”

정호석의 질문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국놈은 확실히 아닙니다.”

“예?”

분명 미국인이냐는 질문에 거짓으로 대답했기 때문에.

“사람 붙여 뒀죠?”

“예.”

“뒤 좀 캐 보세요, 아마 저놈이 CIA쪽에 내 정보를 요청한 놈 같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정보부쪽과 관련있는 놈이면··· 조심스럽게 접근하겠습니다.”

“예, 그게 좋겠네요.”

“혹, 회장님의 일정을 알고 접근해 온 것입니까?”

난 고개를 저었다.

그건 100퍼센트 아닐테다.

그저 오늘 입국하는 찰나에 나를 발견했을 뿐이리라 확신했다.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예, 가능한 조심히, 뒤에 누가 있는지까지 알아야하니까.”

“예.”

< 제 90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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