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9화. >
누가보면 국회의사당을 통으로 옮겨놓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정말 많은 정계의 인사들이 요정에 모였다.
각 당의 당대표들 부터 시작해 3선, 4선 의원들도 제법 보였다.
“하! 제대로 발목이 잡혔으이···”
60대 정치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 야당의 대표가 실종되고 나서 새롭게 당 대표가 된 인물이었다.
“쯧, 어디 무서워서 살겠습니까?”
씁쓸해 보이는 3선 의원의 말에 야당대표가 곤드레 막걸리를 따라주며 말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다 늙어빠져서 아무것도 없이 은퇴하면 쓰겠는가? 쯧, 다음 총선에는 은퇴할 생각이네··· 나도 오래 해 먹었어.”
“도대체 대통령님은 어쩌자고 그런 개헌안을 내놓았답니까?”
“쯧, 프레임 좋잖은가? 신뢰가 바닥난 국회, 믿을 수 없다. 이제 대통령에게 더욱 큰 권한을 안겨주자.”
“휴우··· 반대라도 하면 돌이라도 맞을까 반대표도 못 던지겠더이다.”
“자세한건 나도 묻고 싶군, 정구현 대표, 도대체 대통령님은 무슨 생각이시오?”
막걸리잔을 들어올리던 정구현 여당대표가 다시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정확히 우리도 모릅니다··· 보궐선거다, 총선이다 우리도 대통령님과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지가 않았어요.”
“대통령님 독단이다 이겁니까?”
“들끓는 민심을 잠재우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결정은 국민들께서 하시겠지요.”
“쯧쯧, 지금 국회의 신뢰도가 바닥입니다 바닥! 삼현 이가놈들이랑 붙어먹은 국회의원이 수십명이에요 수십명, 게다가 조사를 피하려고 도피한 놈도 수십이고.”
경력이 제법되는 정치인들은 전부 쓰게 웃었다.
받아 먹었던 것을 다시 토해내느라 정말 피가마르는듯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실제로 이번 총선에서 은퇴한 정치인들도 제법이었다.
삼현과는 연관되지 않았지만, 다른 대기업들과 연관이 없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기 때문, 특검에서 공직자, 특히 국회의원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한다는 소식에 지레겁먹은 의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깨끗한 국회는 반길 일 아닙니까?”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젊은 국회의원의 말에 여당대표와 야당대표, 그리고 3선 4선 의원들의 따가운 눈총이 그에게 향했다.
“박 초선, 말 조심하세요!”
“깨끗해서 반길 일이라니? 언제 국회가 더러웠다 이 말씀입니까!”
젊은 국회의원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되 묻고 싶은데요? 국회가 정말 깨끗하기는 했습니까? 어떻게 당장 자산현황이라도 떼 볼까요? 거기 앉아 계시는 어르신들은 얼마나 깨끗한가? 국회의원들 뿐 아니라 장, 차관들도 대거 연루된 사건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신뢰도를 되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여기서 대통령님에 대한 뒷담화나 늘어 놓다니요? 정치인들의 밤이라기에 뭐 대단한 것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에잉!”
오히려 제 놈이 성을 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국회의원.
“자! 다들 일어 납시다! 자리에 욕심만 그득그득 들어찬 노인네들과 무슨 얘기를 하겠습니까?”
“저, 저! 저런 어린놈이 무슨 정치를 하겠다고!”
“챙피한 줄 아십시오! 챙피한 줄!”
“박찬성 의원! 자네 말이 지나쳐!”
여당대표 정구현의 말에 박찬성이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같은 당 대표에게까지 성을 내긴 어려웠는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난 이만 갑니다. 제~발! 국민들 좀 생각하세요, 국민들 좀!”
박찬성 의원을 따라 꽤 많은 초선의원들이 자리를 이탈했다. 총원의 3분지 1가량의 인물들이 사라지자 자리가 조용하게 변했다.
야당대표의 푸념이 조용한 침묵을 깼다.
“후우··· 진짜 은퇴를 해야 돼.”
정구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의원님들··· 잠시 시류에 몸을 맡기시지요 굳이 거스르려 하지 마시고, 뜻한 바를 위해 때를 기다립시다. 사실, 대통령이 8년 12년 연속해서 집권하면 조금더 우리가 뜻한 바를 이루기 더욱 좋지 않습니까?”
“쯧, 독재의 기억 때문에 우리가 소극적이었다는 뜻인가?”
“글쎄요··· 어쨌든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의 개헌안에 찬성하는 국민들이 무려 68퍼센트를 넘었습니다. 우리 목을 걸고 반대를 해야되는데··· 그게 쉽겠습니까?”
“쯧, 지금 대통령님이 욕심을 내는 것은 아니고?”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다음 대통령부터 적용받는 법안입니다.”
“후우··· 쯧, 이미 국민투표를 앞두고 있으니··· 그냥 늙은이 푸념이었겠거니 생각해주시게 정 대표.”
***
무기사업은 정말 돈을 쏟아부어야하는 리스크가 있는 위험한 사업이었다. 특히 단가 자체가 일반적인 물품들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더욱더 리스크가 크다 할 수 있었다.
SKY항공우주기술의 모든 생산시설이 완공된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가 딱히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제법 좋은 조건의 계약 덕분에 ‘적자’는 면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흑자’라고 얘기하기도 어려운 부분이었다.
“한산하네요.”
정호석의 말에 씁쓸한 웃음이 올라왔다.
확실히 내가봐도 항공기 생산라인은 한산했다. 가진바 기술이 많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미국에게 온전히 기대고 있는 상황.
“흐음, 아무래도 FX사업을 좀 앞당겨야겠습니다.”
“예?”
1980년대부터 말이 나오던 사업.
대한민국의 전투기 노후화와 세계적인 전투기의 변화 때문에 계속 대두되었던 사업이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법 본격적으로 움직였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의 전투기는 지지부진,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98년 서울 에어쇼를 시작으로 바쁘게 진행되었던 FX사업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97년도에 터진 IMF.
내게는 크나큰 이득을 안겨주었지만, 대한민국에도 이득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곤란한 그 사건 때문에 멈춰있는 FX사업.
“IMF로 부쩍 진행이 더딘데··· 그걸 좀 가져와야겠습니다.”
“아, 예.”
정호석은 무슨말인가 싶은 듯 하지만, 그저 알겠다 대답했다. 하긴, FX사업이라는게 관심 없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다.
별 성과 없이 생산라인 시찰을 마치고 서울로 이동하는 차량안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
“여보세요.”
-미스터 천, 오랜만이오.
“윌리?”
-내 목소리를 기억해주다니, 영광이라고 해야합니까?
“뭐, 뜻 밖이라.”
CIA한국지부장 윌리.
현재도 같은 직책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교롭게도 그와의 거래를 통해 얻어낸 무기산업 일정에 전화를 받게되니 좀 신기했다.
“용건은?”
-하하 그 성격 여전하군요? 보안회선이란 확신이 없어 얘기하기는 좀 그렇고, 다음 일정 전에 시간좀 내주시겠소?
보안을 걱정할 사안이라.
어쩔 수 없이 반갑지만은 않은 얼굴을 봐야겠거니 싶었다.
“그때, 거기에서 보지.”
-아아, 거기··· 이제는 당신의 것이 되었군요.
“40분 뒤.”
-이따 봅시다.
***
힐튼호텔의 펜트하우스.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나타난 윌리는 두 팔을 활짝 벌려보이며 정호석에게 몸을 맡긴다. 왼 손에는 권총이, 오른손에는 군용대검이 들려있었다.
정호석은 피식 웃으며 군용대검과 권총을 받아 한쪽으로 치우고, 그의 몸을 구석구석 만졌다.
“헤이, 미스터 정! 살살해~”
“절찹니다.”
“쯧, 미스터 천! 당신 경호원은 언제나 무서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맞은편 소파에 앉는 윌리.
나는 내가 물고 있는 시가와 같은 놈을 그에게 내밀었다. 웃는 낯으로 시가를 받아든 그가 코로 냄새를 한번 맡더니 호오 하고 날 쳐다본다.
“좋은 걸 태우고 있잖아?”
히죽 웃으며 불을 붙이는 그에게 말했다.
“본론만 합시다.”
“역시 천은 재미가 없어.”
뻐끔뻐끔 연기를 몇번 뱉더니 장난기는 지우고 업무적인 태도로 변하는 윌리.
“CIA에 당신에 대한 정보자료를 회신하라는 연락이 있었소.”
“무슨 뜻이지?”
“본국의 누군가가 당신에 대한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얘기요”
“그걸 내게 얘기하는 이유는?”
“글쎄, 워낙 많은 정보들을 구경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어느쪽에 붙어야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는지가 보인달까?”
윌리는 틀림없는 진실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녹색 연기는 그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제법 우리 사이에는 정이란게 있지 않소?”
어색한 발음의 ‘정’소리를 미국놈에게 듣게되니 매우 신선했다.
“그래서 내 자료는 넘기지 않았나?”
“오우! 그럴리가. 미스터 천, 나는 오래살고 싶습니다.”
“정보제공자는 당신이 맞고?”
“정확히는 CIA한국지부라고 합시다.”
“굳이 내게 그런 얘길 해주는 이유는?”
“거듭 얘기하지만, 오래살고 싶어서.”
방금 한 말.
그 말만 유일하게 거짓말이었다. 녹색 연기가 일순간 주황빛을 띠고 있으니까.
사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여 있을테다. 완전한 붉은색 연기가 아니었으니까. 훗날 이 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CIA한국지부가 관련되어 있다면 나 역시 손을 쓸 수 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기 싫다는 윌리의 뜻.
또한, 뭔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내게 이 사실을 전달한 것일 터. 자본주의가 깊게 스며든 미국놈 다운 일이 무엇일까?
“오케이, 정보를 받아간 놈이 누군지는 모르고?”
“그런 것까지 알 순 없소, 위험하거든.”
진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었다.
“좋아, 그래서 내게 정보를 전한 대가로 네가 원하는 것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웃으며 말하는 윌리.
“하하, 하여튼 우리 미스터 천은 천재사업가라니까? 눈치가 대단해.”
“헛소리 그만하고, 본론만.”
“고잉사는 알고 있지?”
전투기는 물론, 항공기 시장의 선두를 달리는 고잉사. 대중적으로 유명한 고잉사의 비행기는 고잉707정도가 있었다.
“알지.”
“그쪽에서 비밀리에 만나고 싶다나 봐.”
정보를 알려준 대가 치고는 좀 약했다.
“뭐가 좀 더 있는 모양인데?”
“워우, 정말 속일수가 없군?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내가 받기로 한 대가는 당신과 고잉사가 만남을 가지고 긍정적인 방향이 되어야 얻을 수 있는 거라.”
“아하, 뭔가 내가 고잉사의 의견에 적극협조 할 수 있게 해달란 부탁을 받은 모양이군?”
“그렇지?”
“장소는?”
“이왕이면 미국이길 바라더군.”
대충 뭐 때문인지 알 것 같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재 고잉사가 굳이 한국의 기업가인 나를 찾는 이유, SKY항공우주기술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참 공교롭게도 고잉사 역시 이번 한국의 FX사업에 한 발을 집어넣고 있는 상황이었다.
“F15전투기가 팔고 싶은 모양이군.”
윌리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맙소사, 노스트라다무스도 울고 가겠군.”
운이 참 좋았다.
나도 마침 전투기를 몹시도 생산하고 싶던 찰나였으니까. 휑 하던 항공기 생산시설이 아직도 머릿속에 아른거리니까.
***
첨벙, 첨벙.
둥!둥!둥!
제법 요란한 음악과 함께, 온수풀에서 헐벗은 여자들과 놀고 있던 로스차일드의 로이와 민주당 대선후보의 아들 알이 누군가를 확인하고는 풀장에서 나와 테이블이 마련된 선베드로 향했다.
“테드, 이게 그 자료야?”
로이의 수행비서라고 볼 수 있는 테드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노란색 서류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는 로이.
“뭐야, 이 새끼 뭐 마피아 그런거야?”
“추측일 뿐, 증거는 없습니다.”
“공교로운 것도 적당히지, 이건 뭐 거의 사실이라고 봐야하는 것 아냐?”
“······”
추측성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테드.
알 구어의 아들 알은 로이가 들고 있는 서류가 궁금한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좀 보자 로이.”
“그때 록펠러의 파티에서 봤던 옐로몽키 알지?”
“아아, 알지. 부쉬가에 붙어먹은 놈.”
“그래, 그놈에 대한 정보야. 무려 CIA에서 몰래 가져온 거라고 알, 딱 들어도 제법 많은 돈을 썼다 싶지 않아?”
“하하, 알았다고 로이! 로스차일드를 영원한 동반자로 생각할게!”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들어올린 로이가 서류를 건넨다.
“와, 생각보다 대단한 동양인이었네? 록펠러의 파티에 참석할 만 해.”
알의 칭찬같은 말에 로이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으음, 로이 네가 마피아라고 얘기했던 것도 이해가 가네, 공교롭게 엮인 사람들마다 실종되거나 행방불명이다라··· 냄새가 나긴 하는데?”
“그렇지?”
“근데 유일하게 살아 있는 놈이 있긴 하네.”
알의 말에 로이가 ‘그래?’하고는 되묻는다.
“여기 봐, 이 사미온?이란 회사의 총수놈은 지금 교도소에 수감중이라고 나와있잖아?”
로이가 눈을 빛내며 알이 가리킨 사진을 쳐다본다.
“호오, 놈과 적대적인 사람들 중 유일한 생존자라··· 제법 재미있는데?”
“로이 또 무슨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거야? 하, 벌써 짜릿하군.”
비릿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리는 로이가 말했다.
“적의 적은,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지.”
< 제 8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