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8화 >
평상시 정장을 입고 다니시는 할아버지의 모습과는 다르게, 편안한 복장에 형광색 조끼를 입고 열심히 연탄을 나르고 있는 할아버지.
그리고 그 모습을 열심히 찍고 있는 기자들.
“기자양반들! 자리만 차지할거면 들어가! 연탄이라도 한 장 옮기던가 에잉!”
자원봉사자 한 분의 흰소리에 찔끔한 기자들이 눈치를 보다가 조끼를 받아 입고 연탄을 나르기 시작했다. 억지로 연탄을 옮기는 기자들이 있는 반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며 연탄을 나르는 할아버지 곁에 착 붙어서 질문을 쏟아내는 기자들도 있었다.
“회장님, 어떤 계기로 연탄 봉사를 하게 되셨나요?”
“늙으면 등이 따수워야지, 이제 여름이라 연탄 땔 일이 없다고들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 노인네들은 5월의 지하수도 시린법이야.”
“그렇군요.”
“게다가 도시가스도 없잖은가?”
“그렇죠.”
“라면이라도 끓여먹으려면 불이라도 있어야지, 아직 아궁이 있는 집들도 제법이고.”
“대한금고의 예금과는 전혀 상관없는 비용으로 봉사하시는 건가요?”
“사비야, 사비.”
“아, 회장님 개인 재산 말씀하시나요?”
“그렇지, 저기 손주놈 재산도 제법 있고.”
할아버지에 이어서 이제 내게로 다가오는 기레기들.
“천우진 회장님, 스카이팟 2세대의 사전예약이 80만개를 돌파했다고 들었는데요, 기분이 어떠십니까?”
“지금은 일 하러 온게 아니니, 업무적인 질문은 사절하겠습니다.”
내가 정치하러 나설 것도 아니니 칼 같이 끊었다. 평소의 무뚝뚝하고 차가운 이미지를 제법 가지고 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닐 터.
“5월에 성실 납세자로 뽑히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벌었으면 많이 내야죠.”
“SKY는 절세도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글쎄요, 내라는 세금은 다 내고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궁금하신 것은 재무팀에게 물어보세요.”
내가 인터뷰에 제대로 응해주지 않으니 다시 연탄을 내려놓고 계시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간 기자.
“천혁수 회장님, 현재 불우이웃돕기 및, 소년소녀가장 및 독거노인 연탄돕기를 비롯해, 다양한 보육원과 교육기관등을 후원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규모가 연간 800억원이 넘는다는데 사실입니까?”
“그거 밖에 안 된답니까?”
“예?”
“아 난 몰랐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집구석에 돈이 들어오지 않기에 한 2천억쯤은 기부하고 있나 생각했지요.”
기자의 입장에서 입이 떡 벌어질 금액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할아버지.
사실 할아버지 얘기가 맞았다.
알려진 천가키즈 교육원들을 제외하고도 다양한 보육시설과 여러 자선단체에 후원하고 직접 운영하기까지 하니 연간 2000억원정도의 비용이 소모되고 있었다.
물론 완전한 개인자산은 아니었다.
우리 외에도 선뜻 기부를 하는 기부자들은 많으니까. 어쨌든 SKY와 대한금고, 그리고 나와 할아버지가 출자해서 만든 재단의 장을 할아버지가 맡고 있었다.
나보다는 이미지메이킹이 필요한 것은 할아버지니까.
“기자양반, 이제 인터뷰는 그만 하지? 내 나이가 벌써 일흔이 넘었어, 나도 제법 힘에 붙인다고.”
“와,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안 보입니다 회장님 이제 50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하하하, 금칠은 그만하고, 나보다 어리고 덩치도 제법인 기자양반도 연탄좀 옮깁시다.”
기자는 영 싫은 기색이지만, 계속되는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연탄지게를 등에 맸다. 할아버지가 눈짓으로 어떤 신호를 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자가 맨 지게에 연신 연탄을 쌓았다.
***
일부로 얼굴과 손, 목등에 숯검댕이를 묻인 할아버지와 나, 차량에 올라 철웅이 준비한 물 수건으로 얼굴과 손, 목과 같은 부분을 닦아냈다.
“쯧쯧, 팔자에도 없는 헛짓거리를 하는구나.”
“하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인터뷰 잘하시던데요?”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야지 어쩌겠느냐?”
피식 웃으며 철웅에게 물었다.
“다음 일정은 뭐에요?”
“예, 회장님께서 방송 출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할아버지요?”
“예.”
“하! 이제는 딴따라짓까지?”
“무슨 방송이에요?”
“국민들의 후원을 유도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그런 프로그램의 패널이십니다.”
“어휴, 그럼 여기 어디 근처에서 세워주세요, 저는 집에가야겠네요.”
“이 놈이 어딜가!”
할아버지가 내 옷깃을 움켜쥐셨다.
악력이 어찌나 좋은지 피부가 뒤틀리는 착각이 일었다.
“제가 가면 어디나 시끄러워요, 스포트라이트는 온전히 할아버지가 받으셔야죠?”
“썩을 놈, 할애비 고생을 시키다니 불효막심한 놈.”
“하하, 할아버지 원기 회복 하시라고, 좋은 술 사 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오늘은 산삼 막걸리로 한잔 하자구나.”
“산삼 막걸리요?”
“아산댁에게 일러두면 알 게다.”
“예!”
***
신문 경제란을 집중해 살피다 내려놓았다.
어딜 보아도 SKY찬양 기사가 즐비했다.
[유통 업계의 혁신 SKY LINE 유통에 날개를 달다!]
[역시 SKY, 혁신의 아이콘 유통에도 발을 넓히다.]
[가장 빠른 배송업체, SKY.]
[SKY 취업준비생들의 워너비.]
[복지도 최고, 급여도 최고, 업무 환경도 최고! SKY그룹 근로자라 행복해요]
[버는 만큼 베푼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SKY와 대한종합금융그룹!]
[작년 기준 기부금만 총액 1980억원! ‘천가’ 기부를 말하다.]
할아버지의 대선을 준비하기 위해, 과할 정도로 정보를 풀었으며, 여러 언론사에도 광고를 싣는 등의 행위가 이렇게 긍정적인 여론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칭찬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같이 보고 있자니 조금 질렸다.
“보자···”
시가를 입에 물고 노을을 조명삼아 ‘아이디어 뱅크’에서 올라온 보고서들을 읽고 있었다. 과연 돌이 될 만한 기술들은 무엇이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무선 통신기술, 무선충전 기술, 리튬 관련 기술등.
빼곡한 서류에 빨간색 색연필로 열심히 체크를 해 두었다. 이렇게 만들어 전달하면 SKY혁신기술이란 계열사에서 알아서 처리 할 테다.
기존의 대기업들과는 달리 우리는 기술 제공자에게 적절한 보상을 약속한다. ‘로열티’역시 지급한다. 물론 기술의 수준에 따라 차등하게, 또한 기술의 판매나 위탁을 요구하지않고 ‘연구비’를 요구하는 경우 아이디어 뱅크 내 자본과 SKY혁신기술의 자본을 함께 운용해 지분을 받아내거나 SKY에 우선적용하는 형태로 계약을 체결한다.
이제 아이디어 뱅크 사업은 해외에도 소문이 나, 국내의 천재들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천재들이 세계 각국의 다양한 언어로 이메일을 보내온다. 매일 같이 수십, 수백통의 다양한 언어의 메일을 번역하기 위해 많은 인력이 투입되고 있는 상황.
“호오.”
유독 눈에 띄는 보고서 하나가 보였다.
“혁신적인 GPS라.”
정보처리 속도와 함께 정보 전송 속도.
즉, 무선 통신의 속도가 더욱 발전해야 정교하고 정확한 GPS송수신이 가능하다. 현재는 미래와 비교했을때 현격하게 낮은 통신기술 때문에 완벽한 GPS송수신은 어렵다. 약간의 딜레이와 정확도의 오차는 감수해야 한다는 얘기었다.
그럼에도 해당 GPS기술은 내 이몫을 사로잡기 아주 충분했다.
“정확도가 300퍼센트 이상 상승한다라.”
이건 안 가져올 이유가 없었다. 독점할 수 있다면 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으면 싶었다. 색연필로 동그라미, 세모, 체크만으로 중요도를 표시하다 이 GPS기술에는 특별히 내 사인을 적었다.
최우선 목표로 삼으라는 지시였다.
모든 일을 끝내고 제법 구름이 예쁘게 낀 파스텔톤 보라색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구름을 보고 있자니 문득 루시가 떠오른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잉.
어떻게 알았는지 SKY 슬라이드폰에는 국제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우진?
“아, 루시.”
-오오! 목소리를 알아 듣는거야?
“하하하, 그래 알아 듣지.”
-할아버지가 연락하라셔서.
“그래? 바꿔 줘.”
-응.
잠시 후, 중후하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래, 잘 지냈나?
“그럼요.”
-스카이 팟 신제품, 나도 인터넷으로 주문 해 보았네, 내일이 배송 예정일이라고 하더군.
“아 그러셨어요?”
-역시 대단한 감각이야, 요즘 사교계가 SKY 얘기로 떠들썩 해, 여태껏 없던 유통방식이라나? 판매자와 소비자를 다이렉트로 연결하는 아이디어가 아주 훌륭했어.
“감사합니다.”
안부같은 서두가 지나가고, 이제 록펠러가 본론을 얘기해야 할 때.
“부쉬의 일인가보군요?”
-하하, 역시 자네는 예언가와 같은 면모가 있어, 현자라고 해야 하나?
“과찬입니다.”
-자네 말 처럼 이제 부쉬가 본격적 도움을 청하더군.
“요구조건을 모두 처리했다는 얘기군요.”
-그런 모양이야, 듣기로는 자네가 요구했던 1000km이상의 성과라고 하더군. 아직 공식적으로 얘기하긴 어렵지만, 늦어도 10월안에는 공식입장 발표가 날테니 염려 말게.
“그렇군요, 역시 돈이겠죠?”
-맞네, 우선 내가 후원 했어.
“아하, 얼맙니까?”
-되었네, 그런 푼돈에 연연할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벌써 그런 사이인가 싶지만, 과연 록펠러의 얘기처럼 과연 푼돈일지는 모르겠다.
-요즘 SKY가 좋은일도 많이 하는 것 같으니, 그곳에 쓰시게.
어쨌든 돈이 굳는다는데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마도 록펠러가 나 대신 부쉬에게 후원하는 이유는 내가 다음 대선 상대를 알려준 것에 대한 보답도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또한, 내가 생각해도 푼돈일테다. 정말 많은 후원금을 보냈어도 200억을 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우선 어디까지나 1차 수혈에 지나지 않으니까, 아마 처음부터 넉넉한 자금을 보내진 않았을테다. 정말 딱 필요로 하는 금액정도를 보냈을 터.
“민주당 쪽에는 아예 후원하지 않으시나요?”
-그럴 필요가 없지, 미국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어, 다음 대선 후보가 민주당이 유력하다면, 그때 그와 파트너쉽을 맺어도 늦지 않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별일 없으면 집에나 놀러오지 그러나? 요즘 부쩍 루시가 우울한 표정을 자주 지어.
“그래요?”
-그래, 아무래도 나같은 노땅보다는 자네같은 젊은피가 더 서로 공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루시의 부모도 자네를 궁금해 하네.
“아, 유럽여행에서 돌아오신 모양이군요.”
-그럼 근 시일내 올 것이라 믿겠네.
거의 무조건 오라는 통보와 같았다.
사실 딱히 한국에서 처리 할 일이 많지도 않았다. 요즘 부쩍 할아버지가 언론에 자주 노출되면서 ‘공인’이란 자각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시는 것 같으니, 휴가 삼아 잠시 록펠러의 저택에 머물다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거니 싶었다.
“흐음, 날을 한 번 잡아보죠. 이번에는 할아버지도 함께 가겠습니다?”
-좋지! 동년배와 만남은 언제나 즐거우니.
“하하, 알겠습니다.”
-쯧, 루시가 바꾸라고 난리네
“예, 바꿔주세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루시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진! 어쩜 전화 한 통 없어?
“하하, 미안 국제전화비가 비싸서.”
-농담이었다면 실망이야 우진.
“크큭, 조만간 미국에 갈게.”
-정말이야?
“그래.”
-아 그럼 우진, 부탁이 있어.
“뭔데?”
-저번에 나와 할아버지에게 선물해주었던 그 한붝?
“아아 한복.”
-응, 내가 요즘 가끔 그 옷을 ‘사복’으로 입고다니는데, 다들 예쁘다고 난리더라, 편안해보이고 질감도 좋다고.
“그래?”
-그래서 이번에는 좀 많은 수량을 요청하고 싶은데?
“글쎄, 그건 명인과 얘기를 좀 나눠봐야 할 것 같아.”
-알았어 우진, E-MAIL로 우리 부모님 사이즈를 보내줄테니 그건 꼭 부탁할게.
“그 정도야.”
-오뭬불뫙? 우진이 오길 기다리고 있을게!
“하하하하, 알았어.”
루시와 통화가 끝나니 뭔가 아쉬운 여운이 남았다.
어쩐지 혼자 뜨는 저 달이 아름다워 보였다.
***
거칠게 서류를 던지듯 내려 놓는 로스차일드 로일드. 애칭 로이.
“그 코딱지 만한 나라에 이런 기업이 있다고?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얘기야?”
제법 나이가 있어보이는 사내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SKY그룹은 현재 세계에서 알아주는 혁신기업이고, 전도 유망한 기업입니다.”
“록펠러 그 노망난 노인네와 SKY그룹과의 관계는?”
“정확하진 않지만 골든글러브와 JB모건과의 어떤 관계를 통해 연결된 사이로 보여집니다.”
“루시는 왜 그딴 옐로몽키한테 빠져있는 건데? 둘이 무슨 사이야?”
“거기까지 알 수 없습니다.”
“제기랄, 도대체가··· 록펠러가에서 공화당 후보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고?”
“예, 후원 규모는 약 2억 달러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딱 숨만 틔어 놨군. 아버지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래?”
“록펠러 쪽과 대화가 원할하지 않으니, 독자적으로 움직일 것 같습니다.”
“쯧, 그 멍청한 알 놈을 다시 만나야한다는 얘기군.”
“파티 하나 잡아, 알 놈이 좋아하는 아이들 위주로 부르고.”
“예, 보스.”
딱 떨어지는 수트핏을 자랑하던 사내가 바깥으로 나가고, 벽난로 앞에서 온더락 위스키를 마시던 로이는 다정하게 웃고 있는 루시와 천우진의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네 년이 선택한게 고작 이런 놈이야? 내가 아니라? 하!”
< 제 88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