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6화. >
할아버지가 씁쓸하게 웃으며 복분자주를 한 모금 마신다.
“이 놈아, 아직 할애비 뒷방 노인네 아니야.”
“하하하, 알죠 할아버지 정정하신거, 저랑 대련해도 할아버지가 이기실거잖아요?”
확실히 할아버지는 나잇대에 맞지 않게 매우 건강하신 편이었다. 의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40대 전후의 장기와 신체나이를 보유하고 계셨다.
“허면, 그 소린 무엇이냐? 은행일에 손을 때라니?”
“정치 관심 없으세요?”
“정치? 하! 이놈, 나보고 고작 국회에 들어가라는 소리더냐?”
그럴리가 없다.
국민들의 욕받이가 되는 그런 자리에 할아버지를 올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뇨, 그거보단 더 위로 가셔야죠.”
이어진 내 말에 호석과 철웅이 눈을 크게 뜨고, 할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할아버지는 잠시 고민에 빠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놈··· 엊그제 대통령을 만나고서 했던 얘기가 이것과 관련있는 모양이구나.”
“예.”
“흐음, 대통령이라··· 하! 바라지도 않던 자리가 생기는구나, 잘해도 욕 먹고 못해도 욕먹는 그런 자리가 말이야.”
“별로세요?”
“흐음, 잘 모르겠구나.”
갑작스러울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크게 그 자리에 앉아서 이룰 것도 많지 않았다. 지금의 자리가 더욱 편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 할아버지가 꼭 그 자리에 앉았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전부를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 그리고 그 반대로 자신의 모든것을 내게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게 생각 할 사람.
나는 할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민심은 천심이다.
그런 말이 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천심은 돈으로 살 수 있다.
어느나라든 절대적 다수는 ‘부자’가 아니니까 ‘돈’이라는 물질에 흔들릴 수 밖에 없는 법.
그리고 우리 ‘천가’는 그럴 돈이 있다.
“하!”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던 할아버지가 헛웃음과 함께 날 바라보신다.
“이놈··· 오래전부터 계획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쩐지 할애비의 이미지를 너무 청렴하고 깨끗하게 만든다 싶었더니···”
피식 웃으며 답했다.
“맘 같아서는 제가 해도 됩니다만, 아쉽게도 마흔 살이 안 되어서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네 놈이 대통령을 해? 그 개똥 같은 자리를?”
“어휴, 하여간 눈치가 귀신이셔.”
“헛소리로 말 돌리지 말고! 그래서 대통령이 무슨 약속을 한 게냐?”
고기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오리 누룽지 죽을 퍼와 매콤한 겉절이를 곁들여 한 입 크게 넣어 우물우물 씹고는 입가심으로 복분자를 한 모금 마셨다.
“손자 얹히겠습니다 할아버지.”
“쉰 소리 그만하고!”
“헌법 좀 바꾸자고 했습니다.”
“헌법을 바꿔라?”
“예.”
제법 언성이 컸지만, 독립된 공간이기에 크게 상관은 없었다.
“뜸 들이지 말고, 풀어서 길게 얘기해 보거라.”
“길게 얘기 할 것도 없어요, 대통령 단임제 말고, 중임제로 바꾸자고 했습니다. 미국처럼.”
“하! 이 놈이 할애비를 죽을 때 까지 일하다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는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왕노릇 하다가 가시는 것보다, 전 세계가 보는 곳에서 왕 노릇 하시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어요?”
“이 놈아, 우리나라가 뭐 어디, 북한이더냐?”
“하하하하, 비유가 그런거죠 비유가.”
할아버지의 눈을 보니, 내 얘기에 어느정도 진심이 포함되어 있음을 느끼신 모양이다.
“왕노릇이라··· 진짜 왕 노릇···”
“정당도 필요 없이, 무소속으로 가시죠.”
“이 놈이 어쩐지 보궐선거와 총선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라고 하더니··· 이유가 다 있었구나. 정말 단 한 발자국도 이유없는 걸음이 없어··· 치밀하고 무서운 놈.”
“다, 할아버지 닮아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금칠은!”
“하하하, 오리 식어요 자~ 다리.”
말 없이 자신의 접시에 내려놓은 알맞게 익은 오리다리를 쳐다보다 다시 시선을 내게 던지는 할아버지.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할애비를 다 챙기느냐.”
“딱 15년만 그 자리에 계세요 할아버지, 그러고 은퇴하셔서 황금 은퇴 라이프를 즐기시죠?”
“오래도 앉아 있으라고 하는구나··· 보자, 15년이라··· 거진 백살이다 이놈아! 다 늙어 빠져서 은퇴라이프를 즐겨라?”
“에이! 제가 장담하는데 할아버지는 120살까지 끄떡 없으실 겁니다!”
내말에 동의하는지 호석과 철웅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네 놈들은 뭘 고개를 끄덕거려?”
“크크큭.”
웃음이 터져버리고, 이어서 호석과 철웅도 웃어버렸다. 그 모습에 할아버지조차 피식 웃어버렸다.
***
한달 뒤, 회장실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SKY 자동차! 아시아 시장을 겨냥하다!]
[이색 스포츠카, 경차의 새 시대를 열다.]
[전 세계는 지금 SKY 앓이 중]
[SKY SORT 전 세계 누적 판매대수 60만대 돌파 유려한 디자인, 뛰어난 가성비! 전 세계인들의 심장을 저격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이다.
SKY의 브랜드 파워가 점차 세계에 퍼져나가는 시기, 아직까지 자동차와 전자를 제외하고 다른 브랜드 파워는 별로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
나는 다른 것을 키우기보다, 우선 확실하게 하나하나 완벽하게 비교우위에서 우뚝 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세계에 SKY란 브랜드를 알릴 아이템은 SKY전자의 스카이 팟 2세대였다.
온라인 구매라는 것에 거부감을 없애고, ‘택배 배송’이라는 것에 익숙해지게 만들기에 전혀 부담이 없는 아이템.
그것을 바로 아주 작은 휴대용 전자장비라고 생각했다. 이미 스카이 팟 1세대의 전 세계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단숨에 IT계열 회사의 최고봉 마이크로소프트의 턱및을 쫓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IT와 SKY를 연결짓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개발 어디까지 진행 되었죠?”
“현재 최종 품질 검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양산입니까?”
“예.”
“예상 판매대수는 어떻게 됩니까?”
“1세대보다 가격이 높아 런칭 첫 달, 1세대 점유율의 약 30퍼센트를 보고 있습니다.”
“숫자로 말씀하세요.”
“예, 약 98만대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좋네요, 계속 고생해주세요.”
“예, 회장님.”
보고를 끝내고 회장실을 나가는 SKY전자의 사장과 교대하는 찰리 박.
“오, 미국에서 들어오셨네요?”
“하하, 예. 며칠전에 들어왔습니다.”
“오호라, 자체 휴가?”
“봐주십쇼 회장님.”
“알겠습니다. 원래 윗사람이 바빠야죠 그렇죠?”
찰리 박이 잔뜩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오늘 점심은 제가 사겠습니다.”
“하하하, 농담이에요 잘 하셨어요, 휴가를 다녀올 정도로 스스로의 성과가 마음에 들어서겠죠?”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서류가방 가득 들어있는 서류들을 내놓는다. 그 양이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벌크업에 도움이 될 무게로 느껴질 만큼이었다.
“어우야··· 이걸 다 언제 봅니까?”
찰리 박이 씨익 웃으며 A4용지 약 20페이지 분량의 서류를 하나 꺼내더니 내민다.
“요약본입니다.”
“굿.”
샤락샤락.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내 입꼬리는 더욱 더 길게 찢어졌다.
“식품 판매도 당장 시작하고 싶을 정도네요.”
“하하, 그렇습니까?”
“네, 아주 흡족한 성과입니다.”
모든 주에 한 발 걸쳤다.
모든 주의 대도시는 모두 거칠 수 있는 유통망이 갖춰졌다는 얘기.
“20억 달러 정도를 예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다운된 가격이군요.”
“예, 약 13억 달러가 들었습니다.”
역시 찰리 박이라는 생각이들만큼 훌륭한 일처리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인터폰을 눌렀다.
“세르게이 책임 연결하세요.”
-예 회장님.
곧, 세르게이 특유의 밝은 목소리가 인터폰에서 울려퍼진다.
-헤이 마이 보스! 안녕하세여~
“세르게이, 어때 우리 SKY샾은?”
-돈 워리~ 지금 당장 세상에 내 놓아도 돼.
“좋아, 그럼 내일부터 오픈해서 버그 잡아 놓자고 한 3~4일 뒤부터 거기서 스카이팟 2세대를 사전예약 받을테니까.”
-와우! 오케이!
자신감 넘쳐보이는 목소리를 들으니 확실히 안심이 되었다. 세르게이와 함께 일하고 있을 SKY소프트의 젊은 인재들도 믿을만한 사람들이니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고르고 고른 인재들부터, 천가 키즈들 중,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있고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a~z까지 손수 교육시켰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터폰의 통화종료버튼을 누르며 찰리에게 물었다.
“자, 헤드헌팅도 끝내셨죠?”
“그럼요, 대부분 회사의 원래 직원들을 그대로 고용승계하는 방향으로 갔습니다.”
“좋습니다. 대표 자리에는요?”
“이쪽에 잔뼈가 굵은 인재고, 석유 유통망을 운영하던 사람입니다.”
“기가 센 사람이라는 얘기군요.”
“아무래도 유통사 특징 중 하나가, 거친 남자들이니까요.”
“이해했습니다. SKY전자 미국지사와 긴밀한 업무교류를 지시해놓죠.”
“예, 회장님.”
***
퇴근 후, 할아버지와 거실에 앉아 바둑을 두던 찰나.
TV에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 송출되기 시작한다.
-청와대 헌법 개정안 발표, 대통령 단임제가 아닌 중임제로 선진국 미국을 표방··· 얼마나 합리적인···
“흐음, 결국 청와대가 네 놈 뜻을 받아 들였구나.”
“어차피 결국은 국민들의 의지가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렇겠지···”
검은색 흑돌을 착수하며 물었다.
“할아버지는 결정 하셨어요?”
청와대의 결정이야 알 바 아니다.
당근과 채찍을 휘두른다면 결국에 헌법 개정안은 나올 수 밖에 없으리란것은 나도, 할아버지도, 그리고 대통령도 알고 있었을테니까.
할아버지가 흰색 돌을 어디에 내려놓을지 고민하며 말했다.
“글쎄, 고민이구나··· 굳이 욕먹을 자리에 앉아야 할지 말이다.”
“과거사가 고민이세요?”
“쯧, 내 자리에 올라오면서 얼마나 많은 더러운 피를 묻혔겠느냐? 자연스럽게 다른 놈들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게다.”
“그렇겠죠.”
“진흙탕 싸움까지 하면서 과연 저 자리에 앉아야 할까 싶구나.”
“어차피 저 자리는 국민들의 선택 아니겠습니까?”
“돈 지랄을 할 가치가 있을까 싶구나.”
흰색 돌을 오른쪽 끄트머리에 내려놓으며 기권하시는 할아버지, 생각이 많다 보니 바둑이 되지 않는 모양.
“우리 ‘천가’에대한 국민들의 지지율 보셨어요?”
“그래, 통계청 놈들 할일이 그리 없나, 쓰잘데없는 짓을 했더구나.”
“72퍼센트의 신뢰도라니 대단하죠?”
“서민안정자금대출 이후로 우리가 조용한데도 그정도라니, 나도 사실 놀랐단다.”
“SKY의 기업이미지도 한 몫하고 있겠죠.”
“그래··· 그렇겠지. 아이디어 뱅크 사업도 요즘 점점 빛을 보는 듯 하구나.”
“그러니까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죠.”
“우리나라는 대대로 정부가 좀, 별로였습니다.”
할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만한 얘기니까.
“그만큼 여러 강국이 한반도를 주시하지 않으냐?”
“어쨌든, 참 제 입맛에 맞는 대통령은 없더라, 이 얘기입니다.”
“이놈 고작 스물을 넘겼다.”
“하하, 어쨌든요. SKY가 날아가야하는데, 자꾸만 정부가 좀 걸리거든요? 결단력 없고 우유부단한 것 처럼 보인다고 할까요?”
“그래, 그러니 욕을 많이 먹지, 결단력 있으면 독재라 욕먹을테고, 우유부단 하면 결단력 없다 욕먹을 테고.”
“그러니까 이제 할아버지가 하세요, 결단력 있게.”
TV로 시선을 돌린 할아버지.
총선 결과가 발표된지 고작 이틀이 지난 시점에 대통령이 헌법개정안을 발표한 이유. 자신의 정당에 피해를 입히기 싫었음이다. 정확히는 자신의 입맛대로 휘두를 사람들이 적어지는 것을 경계한 것.
역시 정치권의 늙은 여우들은 달라도 다르다.
“그만 튕기시고, 이 나라 대통령 할아버지가 하시죠?”
“이 놈이 부쩍 건방이 하늘을 찔러!”
“에이, 할아버지 자서전 내시는게 꿈 중 하나잖아요?”
“크흠, 그건 또 어찌 알았느냐?”
“철웅 삼촌한테 들었습니다.”
“쯧쯧, 그 놈 요즘 점점 입이 가벼워져, 나이를 먹은게야.”
“대통령 정도는 되야 자서전 읽어보지 않겠습니까?”
“나이를 먹으면 무서운 것이 많아 진단다. 특히나 체면치례에 적극적이지.”
“할아버지 체면 잃을 일 없게 해드리겠습니다. 손자만 믿어 보세요? 굴지의 대기업 SKY의 오너가 바로 이 손자가 아닙니까.”
“점점 혓바닥이 매끄러워지는구나.”
“세월의 힘이죠.”
시가를 입에 무시는 할아버지.
“오냐, 무엇부터 하면 되겠느냐?”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남자라면 한번쯤 대통령이라는 자리 탐이나지 않겠는가. 나는 당연히 할아버지가 수락하실 것이라 믿었다. 생각보다 긴 장고의 시간이 있었지만, 어쨌든 결국은 내 뜻 대로 되었다.
“자주 노출이 되어야겠죠? 물론, 좋은 쪽으로.”
“쯧쯧, 팔자에도 없던 딴따라짓을 하라는 얘기구나.”
“하하하, 그 김에 여배우들 실물도 구경도 하시고, 좋잖아요?”
***
밤 10시 대통령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뉴스는 보셨습니까?
“봤습니다.”
-약속은 지켰소.
“예, 알겠습니다.”
-천회장의 약속은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소?
“언젭니까?”
-무엇이 말이오?
“미국이랑 만남을 예정 해 두었을 꺼 아닙니까? 회담자리가 언제냐는 물음입니다.”
-비 공식 회담이야 언제든 가능하지 않겠소?
“아마 지금쯤 공화당에서 입김을 넣고 있을 겁니다.”
-믿겠습니다.
“예, 미사일 사거리 1000km. 그게 내가 말한 조건이었습니다. 거기서 무엇인가를 더 취할지, 취하지 못할지는, 대통령님과 외교부의 능력이겠죠.”
이정도까지 해 줬는데 받아먹지 못하면 자신의 무능을 탓하라는 얘기였다. 상을 차려 줬으면 수저정도는 자신이 들어도 되지 않냐 하는 그런 말이었다.
-이해했소, 고맙소.
“예.”
-천 회장.
“예.”
-혹··· 다음 대선을 노리는 것이오?
“저 아직 40대 아닙니다.”
-크흠, 조부께서 말이오.
“글쎄요.”
-가급적이면··· 우리 당에서 출마하기를 바랍니다.
헌법개정안을 얘기 할때, 어느정도 눈치를 챈 모양. 마치 당선이 기정사실이라도 되는 듯 얘기하는 대통령의 태도에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 했다.
“가능성 있다 생각합니까?”
-충분히.
“그렇군요, 쉬십시오.”
-부국강병을 이뤄주시오.
조선시대도 아니고 부국강병이라니.
꽤 낭만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러나 코웃음이 나온다.
“그 꿈, 이루어드리죠.”
-고맙소.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SKY가 날아가는게 곧 부국강병이다.
SKY의 뿌리도 결국은 대한민국이니까.
< 제 8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