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85화 (85/458)

< 제 85화. >

한참을 말 없이 앉아 있던 대통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독재의 잔재가 아직 우리들의 마음에는 남아 있습니다. 과연 국민들이 받아 들이겠소?”

틀린 얘기가 아니었다.

삼현 게이트 이후.

정확히는 내가 공개해버린 그 사건 이후, 관련된 정치인 62명이 실종되거나 자백했고, 의원직을 내려놓았다.

그 여파가 적지 않았고, 올 돌아오는 4월 총선은 역대급으로 낮은 투표수가 예상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정치권에 북풍설한이 불어닥친 것이다.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모든 국회의원들이 무더기로 적발된 비리사건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국민들의 국회 신뢰도는 바닥을 길 수 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청와대의 입지가 높아진 상황.

청와대가 잘해서라기보다는, 국회가 워낙 못했기에 상대적으로 청와대가 칭찬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거물급 정치인들이 연루된 사건에서도 현 대통령 만큼은 깨끗했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국회에 빈자리가 많습니다. 앞으로 채워질 자리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국회의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아시겠죠.”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청와대의 신뢰도가 높은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대통령의 권력은 강해지지 않았습니까? 슬슬 레임덕이 왔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잖습니까?”

“크흠··· 그거야 의석이 워낙 모자르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엄살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대통령님은 분명 자주국방을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업적은 좋고, 리스크는 싫다. 너무 이기적인 것 아닙니까? 과연 나라를 위함입니까 아니면 본인을 위함입니까?”

“크흠.”

조금 센 워딩이었다.

대통령이 불쾌하게 생각하는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노련한 정치인 답게 노골적인 불쾌함은 표출하지 않는다.

또 침묵이 흘렀다.

“나는 대통령님이 원하는 것을 가져오기 위해 리스크를 짊어졌습니다. 만약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지 않는다면? SKY의 미국길에 걸림돌이 생길겁니다.”

“그렇지요···”

“무려 미국시장입니다. 중국 다음으로 큰 시장이죠, 사실상 중국시장을 노리긴 어렵습니다만 어쨌든 SKY가 가진 가장 좋은 패 중 하나를 버리는 일이 되버릴지도 모르는 그런 선택을 한 겁니다.”

“··· 천 회장의 뜻은 잘 알겠소.”

“현재 대통령님과 나는 제법 잘 맞는다 생각했습니다. 물론, 헌법개정을 추진하며 대통령님께서 다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면 분명, 국민들의 반발과 국회의 반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대통령.

“그러니 다음 대선주자들부터 적용받도록 하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 우선 그 부분은 많은 상의를 통해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겠소, 긍정적으로 검토할테니 양해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다음 만남은, 그 긍정적인 발표가 난 뒤로 하죠.”

***

집에 들어오니 할아버지가 날 반겼다.

“이놈, 며칠은 푹 쉴 것이라더니 바쁘구나.”

“대통령이 몸이 달았는지 자꾸 찾아서 말이죠.”

“호오, 그래?”

“저번 보궐 선거에 우리쪽 인사들 배치는 수월 했습니까?”

정치쪽은 순전히 할아버지에게 맡겼다.

나보다 더 오래동안 사시면서 수 많은 인맥을 쌓아 놓으셨을테니까.

또, 할아버지 사람이 곧 내 사람이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나와 별반 다르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오냐, 걱정하지 말거라 모든 것에서 대한 은행와 SKY그룹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줄 놈들이다.”

“어떤 사람들이에요?”

“대부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힘쓰는 친구들이다. 자선단체의 장을 하던 이들이나, 아니면 인권변호등을 하던 놈들도 있고, 대쪽 같은 성정으로 범죄자들 때려잡던 정의로운 검사놈들도 있다.”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선단체의 장들이야 그 지역에서는 나름 영향력좀 행사하며 좋은일을 제법 했을테니 명망이 있을테고, 인권변호사들 역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사는 사람들 답게 인성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없고 또, 변호사라는 직업답게 언변들도 화려할 터.

정의로운 검사란 한직으로 물러난 검사들을 말할테다. 간혹 정치인 비리, 혹은 재계 비리같은 것을 캐다가 외압에 밀리고 밀려 시골 오지로 발령받아 사표를 낼지, 아니면 계속 공무원 할지를 결정하는 그런 이들을 말이다.

역시 할아버지란 생각이들 정도로 괜찮은 사람들을 데려왔다 생각했다.

“제 욕심이 크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헌신적으로 할 게야.”

모든 사람이 욕심이 없을 수 있다.

나 보다 남을 생각하긴 어렵다.

나도 생각하지만 남도 생각하는 사람들을 뽑았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이었다. 완벽하게 청렴하다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두겁을 쓴 요괴들은 아니라는 얘기었다.

“좋네요.”

“그래, 네 놈은 대통령과 무슨 얘기를 했더냐?”

“제가 미국에 받아올게 좀 있거든요?”

“흐음, 그걸 대통령이 부탁한게냐?”

“예, 그래서 저도 대통령에게 조건을 걸었습니다.”

“조건이 무엇이더냐?”

“아마 곧 알게 되실 겁니다.”

팍 인상을 찌푸리는 할아버지.

“네 놈이 그런말을 할 때마다 나라가 들썩이던데··· 미국에 다녀오자마자 또 세상이 시끄럽겠구나.”

“하하하, 그나저나 은행일은 좀 체질에 맞으세요?”

“뭐, 내가 하는 것이 있더냐? 그래도 사채 만질때는 가끔 추심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영··· 골프치자는 놈들은 많은데 다들 늙어빠져서는 실력이 영 별로다.”

“아아 골프.”

내가 골프에 관심을 보이자 할아버지가 흥미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 놈! 그러고보니 골프는 칠 줄 아느냐?”

“뭐, 대충은요.”

“허허, 말 나온김에 내일 라운딩이나 돌겠느냐?”

“장비도 없습니다만.”

“이 놈이 싫다는 얘기를 돌려서 하는구나.”

내일은 정말 쉬고 싶었다.

“골프도 나름 휴식이 되니까 잔 소리 말고, 오전 10시까지 준비하거라.”

통보이자 명령.

“아 싫은데.”

무심코 튀어나온 진심에 할아버지의 등짝 스매시가 날아들었다.

쫙!

“역시 골프는 할아버지한테 배워야 제맛이죠!”

그제야 만족한 얼굴로 할아버지가 철웅에게 내 골프장비를 준비하라 명했다. 영락없이 내일은 골프를 쳐야하는 모양이다. 휴식하기 좋은 일요일이 이렇게 날아가는구나 싶었다.

***

골프하기 딱 좋은 날씨와 계절.

손주놈과 라운딩이라 생각하니 몹시 기분이 좋으신 듯, 할아버지가 힘차게 앞장서 걸어가셨다.

“삼촌.”

내 부름에 철웅이 웃으며 답한다.

“그래 우진아.”

“할아버지 골프좀 치세요?”

“백부님? 잘치시지··· 지금도 프로골퍼들에게 가끔씩 레슨을 받으신단다.”

“얼마나 치시는데요?”

“이 골프장에서는 75타를 기록하셨었지.”

“72타가 기준이죠?”

“그래.”

과연, 자신있게 골프를 치자고 하셨을 때 알아봤다. 확실히 나이에 비해 굉장히 준수한 성적이다.

라운딩 시작전, 골프장에 준비된 작은 연습장에서 연습삼아 스윙을 하는 할아버지.

확실히 스윙 아크가 준수해보였다.

거진 세미프로라고 얘기해도 될 수준의 실력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스윙.

“할아버지.”

“이 놈아, 스윙 준비할때는 말을 걸면 안되는 것 모르느냐?”

“초보 손자랑 치시면서 너무 진지하신 것 아닙니까?”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때도 최선을 다한 법이란다.”

어째서인지 성공한 사람들은 참 지기를 싫어한단 생각이 들었다. 이번 라운딩에 뭐가 걸려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핸디캡은 주실거죠?”

“몇 타를 잡아줄까?”

“듣기로는 예진작에 싱글을 넘으셨다면서요?”

“하하, 철웅이가 그러더냐?”

“예.”

“그래서 몇 타?”

나는 양손을 쫙 펼쳐보였다.

“그거면 되겠느냐?”

자신감 넘치는 할아버지의 표정.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입니다?”

그제야 할아버지가 흠칫 자세를 풀고 날 바라본다.

“어쩐지 또 당한 것 같구나.”

“남아일언.”

“중천금··· 크흠, 오냐! 오늘은 반드시 이겨주마.”

나는 피식 웃으며 스윙연습을 위해 할아버지의 뒤편으로 걸어갔다. 의식하려 하지 않으시지만 자꾸 내가 의식되는지 할아버지의 동작이 살짝 어색해졌다.

할아버지가 모르는 사실.

이번 삶에선 단 한번도 골프를 친 적 없지만 전 삶은 아니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회장, 사장, 재벌, 정계인사 등등.

제법 영향력있는 사람들은 골프라는 스포츠를 참 좋아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접대’골프를 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기본 실력이 뒷받침 되어야 했다.

나는 내 휴무의 대부분을 골프 레슨을 받는 것으로 채워야 했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골프에 투자했다.

나도 ‘싱글’은 예진작에 넘어섰다. 접대 골프는 높은 난이도를 요구하는 골프다.

단순히 못치기만 해서는 되지 않는다. 아슬아슬하게 지면서 진심을 다해 절망해야 접대 골프를 받은 사람이 좋아하는 법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영향력있는 사람들은 골프를 즐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실력도 대단한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런 사람들과도 어울려 골프를 치려면 당연히 나도 실력이 높아야 함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말은.

할아버지가 양보하신 10타수.

이 골프장의 할아버지 개인 레코드가 75타. 다시 한번 새롭게 갱신하더라도 74타로 잡는다면, 나는 83타를 치면 이길 수 있다는 얘기다.

제법 난이도 높은 내기이지만, 지면 좀 어떠한가? 할아버지 소원이야 들어드리면 되지.

***

휘익 딱.

드라이브에 정확하게 임팩트 되는 골프공을 느꼈다.

짝짝짝짝.

뒤쪽에서 정호석과 백철웅이 박수를 치고, 할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이 놈이 내게 사기를 쳤구나.”

“하하하, 할아버지가 평소보다 못치시는 거라면서요?”

“썩을 놈.”

마지막 18홀, 현재 스코어는 할아버지가 84타. 내가 91타. 내가 미친짓만 하지 않는다면, 나의 승리는 거의 확정적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좌우지간 손자라는 놈이, 할애비를 이겨먹으려고 아주 혈안이구나.”

“하하하, 샷하기 전에 화내시면 스윙이 망가져요 할아버지.”

끝까지 약을 올리니 할아버지의 발길질이 엉덩이에 닿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무척이나 강력한 발차기다.

엉덩이를 손으로 비비며 할아버지의 샷을 조용히 관전했다. 아름다운 스윙아크를 그리며 골프공은 곳 허공을 날아 오르기 시작했다.

“어어!”

백철웅의 안타까운 탄성.

“아··· 벙커.”

정호석의 쐐기.

나는 확신했다. 이번 내기에서도 내가 이겼음을.

***

맛이 좋기로 유명한 오리백숙집에 정호석 백철웅, 나와 할아버지가 모여 앉았다.

“여기는 능이 백숙이 좋지.”

할아버지의 주도로 이어진 주문, 복분자주와 함께 능이버섯 볶음을 곁들이며 즐거운 식사를 이어갔다.

“그래, 이번 소원은 무엇이더냐?”

철웅과 호석도 궁금한지 날 빤히 바라본다.

“할아버지 이제 은행 일 그만두시죠?”

내 말이 끝나자 뜨끈하게 끓어오르는 백숙의 열기를 잊을 정도로, 장내엔 싸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 제 85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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