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80화 (80/458)

< 제 80화. >

정말 오랜만에.

마음 놓고 즐기는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이건 놈이 끝났는데, 이런 날 술이 빠지면 섭섭하다.

정호석 백철웅도 그 자리에 빠질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김장원도 불러오고 싶었으나, 할아버지가 함께하는 자리니 굳이 부르지 않았다.

“자, 한 잔 받거라.”

순수하게 즐기는 이런 자리.

그저 웃고 즐길 수 있는 편안함이 주는 달콤함은 언제나 달큰하다.

크게 의미 없는 대화들이 오가고 왁자지껄 시끄러운 자리가 되었다. 진중하고 무뚝뚝하기만 할 줄 알았던 할아버지도 어찌나 언변이 출중한지, 할아버지가 입을 열면 자연스럽게 모두가 집중했다.

할아버지의 젠틀한 유머를 듣고 있자니 어째서 미국의 젊은 여인들이 할아버지를 사랑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흐음, 노인네가 주책없이 너무 떠들었구나.”

이제 레파토리라도 떨어진 것일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단순히 분위기를 환기 시키기 위함이었던 모양, 마실 만큼 마셨고 즐길만큼 즐겼다고 판단 했는지, 본연의 진중한 눈을 하시고는 날 바라보신다.

“그래, 이제 네 녀석의 다음은 무엇이더냐?”

“우선은 삼현부터 마저 정리 해야죠.”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 거리신다.

“음? 아직 정리가 안되었더냐? 많은 사람들이 이미 삼현이 SKY의 것으로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던데?”

“아직 가져올 주식들이 좀 남았습니다.”

“아아, 그 은행놈들에게 받을 것?”

“예.”

“그러고 나서 그 다음은?”

어깨를 으쓱이며 할아버지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자동차 사업에 일단은 집중해 볼 생각입니다.”

“아주 비싸게구는 구나.”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이 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최우선 목표인 복수를 달성했으니, 그 다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잠시 내실을 다져 놓아야죠.”

“내실?”

“예, 내실.”

“하긴, 네 놈 성격에 삼현이란 큰 뱀을 삼켰으니 철옹성을 견고하게 만드느라 꽤나 바쁘겠구나.”

“하하, 예. 안에서부터 튼튼해여 겉도 딴딴해지죠.”

술을 호록 비워버린 할아버지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내가 묻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도, 여기 철웅이 호석이도 알고 있다.”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얘기 해 보라는 뜻이었다.

삼현을 먹었다. 그러니 너의 다음은 무엇이냐를 물어보는 것.

“말씀 드렸잖아요? 내실을 다져야 한다고.”

할아버지가 고개를 젓더니 호석에게 말했다.

“우진이 이 놈 안 되겠다 호석아, 내일 운동때는 진심으로 하거라.”

“오우! 할아버지 왜 이러세요?”

요즘 오전 운동시간에 정호석과 대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처음은 10분만 해도 기진맥진 하던 그 훈련을 이제는 얼추 30분 근처까지 버틸 수 있는 체력과 실력이 되었다.

정호석과 붙어보면 붙어볼 수록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할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운동의 한 분야에서 정점에 올랐을테다.

“하하, 예 백부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니 삼촌! 진짜 내실 다질 거라니까요?”

“나는 믿는데, 백부님은 믿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보았다.

역시 믿지 않고 계셨다.

“나는 우진이 네 녀석이 늘 불안했단다.”

술 때문일까? 할아버지의 눈이 사뭇 촉촉해 진 것 같아 대꾸하기 어려웠다.

“부모를 잃고, 버려진 자식인 줄 알고 평생을 살아오다 부모의 죽음과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음모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원한이 컸겠느냐? 감히 나는 짐작하지 못할 만큼, 대단한 원한이었을 터.”

“······”

“그런 원한이 있었으니 손속이 과할 수도 있고, 내 핏줄이니 그런 성정을 가진 것도 이상하지 않다 여겼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진이 네 삶의 최우선 목표는 복수였겠지. 헌데 이제 그 복수가 끝났구나.”

번아웃.

할아버지는 지금 내게 그것을 말씀하시고 계셨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니 어쩐지 뿌듯하면서도 죄송한 마음도 함께 들었다.

“하하, 할아버지 저 정말 내실다기지 하는거에요, 단순히 SKY의 내실이 아니라, 제가 뿌리내리고 있는 이 한국에.”

“으음?”

“저번에도 말씀 드렸잖아요?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고요, 앞으로 세상을 삼킬 저 입니다. 근데 이 코딱지 만한 나라가 절 품기에는 너무 작네요.”

할아버지가 잠시 날 빤히 쳐다보다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녀석 진심이구나?”

“예, 목표하나를 이루었다고 그 자리에 퍼질만큼, 할아버지 손자 나약하지 않습니다. 저한테 그러셨죠? 소국의 왕이나, 영주 따위를 무너뜨렸다고 만족할 것이냐고.”

“그랬지.”

“전혀 그런 것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렇구나··· 내실이 다져지면 그럼 그 다음은 무엇이더냐?”

이번에야 말로 진짜 의뭉을 떨어야 할 시간이다. 그냥 알려드리는 건 재미가 없지 않을까?

“골라야죠.”

“뭐라?”

“그때 봐서 골라야죠.”

“하하하, 고르면 어디든 네 것이 되더냐?”

“대한민국도 이미 제것 아닙니까? 하니까 되던데요?”

정호석도 백철웅도.

뜨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한 나라가 내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 만큼 광오한 말이 있을까? 민주주의가 자리한 세상에? 그러나 할아버지 만큼은 진중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신다.

“크흠, 아직 할애비가 살아 있다.”

대한민국은 할아버지 세상이라는 말씀이었다.

뭐 크게 틀린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가 진심을 다해 대한민국의 누군가를 제거하려고 마음먹는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건 사실이니까.

이미 할아버지의 칼, 정호석과 백철웅. 그리고 그들보다 아랫사람들인 김장원과 같은 사람들을 써 본 적이 있으니, 모를래야 모를 수 없다.

심지어 나도.

할아버지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 제거하실 수 있다. 물론 굳이 그러실 분이 아니란 확실한 믿음이 있다. 나와 할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유일한 혈육이니까.

이건의 가족들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유대관계가 있다.

나 또한 할아버지의 목숨을 위해선 모든걸 버릴 수 있고, 할아버지 역시, 내 목숨을 위해서는 모든걸 버리실 분이라는 확고한 그런 믿음.

“제가 돈은 더 많거든요?”

그러니 이렇게 그 무서운 사채시장의 거두, 대한민국 밤의 황제에게 떽떽 거리면서 대들수도 있는 것이다.

“이 놈이, 그 돈이 누구 지갑에서 나왔는데?”

“한 번 줬으면 땡이죠.”

“날강도 같은 놈! 배당금도 없더냐!”

“은행 차려드렸으면 됐죠.”

“네 놈이 정보만 주었지 언제 돈이라도 한 푼 주었더냐?”

“이번 달부터 다달이 용돈이라도 챙겨 드려요?”

“썩을 놈! 술 맛 베리는구나! 에잉, 철웅아! 담배나 한대 피우고 오자구나!”

“예, 백부님.”

겉으론 툴툴거리시며 화를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것 같지만, 내 눈엔 선명하게 보였다. 할아버지의 희미한 미소가.

***

대한은행.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은행을 제외한 다른 은행장들과 만남을 가졌다.

당연히 이유는 있다.

“자~ 서류는 준비들 해 오셨죠?”

한결은행장이 싱글벙글 웃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그 서류는 당연히 주식양도서류였다.

금산분리의 원칙에 따라 은행들이 기업을 경영할 수 없다. 본래 삼현 이건에게 들어갔던 돈은 ‘내 돈’이다. SKY인베스트먼트가 굳이 만들 필요가 없는 예금 계좌를 만들었고, 해당 예금을 이용해 한결은행과 나머지 은행에서 발행하는 채권을 샀다.

여튼, 내가 돈을 주었고, 그 돈으로 삼현에게 대출을 내 주었다는 얘기다.

“요 며칠, 삼현전자의 주식이 좀 올랐습니다.”

사실이었다.

삼현전자가 가지고 있는 D램 기술은 분명, 대단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삼현전자의 위기에 해외 투자자들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덕분에 주가는 고공행진.

그러니까, 지금 한결 은행장은 그때와 지금의 조건이 달라졌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건 뭐, 고양이를 치워주었더니 쥐새끼가 내 곡식을 탐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요?”

“하하, 뭐 별것 있겠습니까?”

스윽, 하나의 서류를 더 내민다.

단기 채권이 아닌 장기 채권.

“이걸 사 가라?”

“아니 그저, 삼현의 주식으로 이익을 보실 SKY가 그 이익을 우리와 조금 나눠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은행장들도 내심 말 하진 않았지만 기대가 잔뜩 서린 얼굴들이다.

전경련과 정치인들은 SKY라면 치를 떠는 형국이다. 헌데 아직 금융권, 그러니까 1금융권에서는 우리 SKY를, 또 나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래서 믿을 사람이 필요하고, 내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화장실 갈 때, 나올 때.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도 간사해서 쉽게 변하곤 하니까 말이다.

“정 대표님.”

“예, 회장님.”

“그거 가져오세요.”

“예!”

놈들의 뱀심을 내가 몰랐을까? 욕심을 온 몸 가득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는 것들의 본성을 몰랐을까? 웃기지도 않는 소리, 감히 넘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넘보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알 필요가 있었다.

각자 앞에 놓인 서류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던 은행장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툭.

한결은행장이 덜덜 떨다 몇 장의 사진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는 친절하게 그것을 주웠다.

옷을 전혀 입지 않은 사내들이 잔뜩 늘어 서 있고, 이건이 절망에 잠긴 눈으로 멍하니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사진, 어느 정치인이 시멘트를 마시다 구토를 하는 사진 등이었다.

“개구리 알아요? 그 놈들은 멍청해서 가끔 제 배때기보다 더 큰 것을 삼키다 죽곤 합디다.”

“······”

“정 대표님?”

“예, 회장님.”

“다시 회수하세요.”

“예!”

다시 그 끔찍한 사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정호석에게 건네는 그들. 나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그들에게 다시 양도 계약서를 내밀며 말했다.

“저렇게 되고 싶어요?”

그들은 서로 먼저 싸인하려고 난리를 부렸다.

이로써 정말 완벽하게 정리가 되었다.

아, 완벽은 아닌가? 99퍼센트라고 얘기하고 싶다. 진정한 100퍼센트는 3년뒤, 이건이 출소하는 날이 되겠지 싶다.

그땐 꼭 구경을 가야겠다.

이건놈의 저 넋놓은 표정을 실물로 보지 못해 아쉬울 따름.

***

2000년 3월 3일.

오늘은 SKY의 사옥이 아니라 아산에 나와 있었다. 그 이유는 다름아니라 ‘신차 시승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본래 카이 자동차가 가지고 있었던 시험 서킷, 그리고 삼현 자동차로 탈바꿈 되면서 더 큰 부지를 확보했던 아산공장.

내가 그런 삼현자동차를 인수하면서 주변의 부지를 개발해 ‘서킷’을 조금 더 업그레이드 하였다. 시내환경의 조건을 갖춘 서킷 부터, 눈길, 빗길, 오프로드까지 다양한 조건의 시험주행을 할 수 있는 서킷이었다.

항상 많은이들의 귀추가 주목되는 SKY의 행보.

그에 어울리게 정말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 SKY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화면은 SKY의 로고를 달고 있는 자동차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SKY의 로고를 달고 개발된 자동차.

“원래 제가 긴 말 하는 스타일 아닌 것 아시죠?”

일부러 밝은 톤의 캐주얼 정장을 입고나와 외쳤다. 타이도 메지 않았다. 그만큼 스포티함과 세련됨을 강조하고 싶었다.

“소개합니다! 21세기에 어울릴 경차 SKY SORT.”

부아아아앙.

경차의 엔진이 성을 내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오픈카야?”

“오픈 카라고?”

“저건 뭐야? 클래식 카 처럼 생겼는데?”

“저거 봐봐, 모던 트림도 괜찮잖아?”

누구에게나 오픈된 행사였다. 자연스럽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중구난방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모든것이 홍보의 일환이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빠 나 티코말고 저거 사줘.”

“와아··· 나도 이 참에 차나 바꿀까?”

“미쳤다 SKY 진짜! 경차라고 무시했는데, 이제 그러면 안되겠어.”

정말 공을 들였다.

디자인과 실용적인 측면에서 특히나 많은 돈을 들였다. 물론 안전 사양에 대해서도 많은 돈을 들였지만, 아무래도 경차다 보니 한계는 분명 존재했다.

그렇기에 더욱 디자인과 편의기능에 집중했다.

오늘 시승 행사에 준비된 차량은 30대.

클래식 트림, 모던 트림, 스포츠 트림.

각 트림별로 10대씩을 준비했다.

나는 강단에서 내려왔다. 이제 남은 것은 사회자가 알아서 할 일. 성공은 자신 하고 있으니 걱정 할 것이 아니다.

다소 가격이 높더라도 디자인과 편의 기능면에서 국내시장은 물론 해외시장에도 충분히 먹힐 것이라 장담한다.

1400만원 대의 오픈카라면 솔깃 하지 않는가?

“하하, 천 회장 오늘도 멋졌습니다.”

“아 대통령님.”

무려 우리 SKY 자동차의 첫 사전예약자는 놀랍게도 대통령이었다.

“몸도 불편하신데 좋은 차 타시지 그러셨습니까?”

“하하하, SKY가 만드는 차가 좋은 차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공직자들이 너무 좋은차 타고 다니는 것도 별로 보기 안 좋습니다.”

대통령이 경차를 탄다고 지지율이 오르겠냐마는, 현재까지도 대단한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대통령이니 정치쪽이야 그가 도사겠거니 생각했다.

물론 현 대통령의 지지율에 나도 한 몫을 보탰다. 굳이 삼현의 비리장부를 오픈하며 많은 정치인들이 사라졌고, 그 과정에서 대통령에겐 어떠한 혐의도 없었으니 오히려 청렴한 이미지가 되어버렸다.

또, 특검을 통해 철퇴를 휘두르고 여태껏 처벌당한 정치인들보다 곱절은 더 엄한 처벌을 받았으니 공명정대하다는 프레임까지 갖게 되었다.

“대통령님 덕분에 이번 차는 아주 잘 팔릴 것 같습니다.”

그가 우리 자동차 홍보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니 칭찬 할 것은 칭찬하는 것이 맞았다.

자연스럽게 나와 대통령은 기자들의 발길이 닿지 않을 곳으로 움직였다. 딱 봐도 대통령이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천 회장, 부탁이 있습니다.”

역시 정치인이 맨입에 움직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가 굳이 우리 SKY SORT를 홍보해준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무엇입니까?”

“아직, 우리나라는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벗어나기는 힘들겠지요.”

“예, 그렇죠.”

“우방국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군사적으로 너무 많은 제약이 걸려 있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를 들자면 핵무기 같은 것을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대충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기억에 의하면, 올해 말 쯤, 그러니까 부쉬 대통령이 취임전에 한반도의 미사일 사거리 협약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의 대통령은 그 부분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해주길 바라는 모양이다.

“SKY항공우주기술이 나서 주어라?”

“예··· 가능하다면 미국의 미사일 기술을 가져 올 수 있겠습니까?”

< 제 80화.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