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9화. >
지난밤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상태로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출근은 거르고 찰리 박과 강기태에게 전화로 업무지시를 했다.
삼현의 모든 주식 매입을 중단하라는 명령이었다.
굳이 계속 가격이 내려가는 주식을 살 필요가 없이, 가장 아랫단계에서 매수할 방법이 생겼으니 출혈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아마도 이건이 내 생각처럼 도주를 계획한다면 반드시 차명으로 된 주식을 시장에 풀어 처분하려 할 터, 그러면 자연스럽게 주가는 수요와 공급의 논리에 맞게 가격이 추락할 터.
이건 그놈이 가능한 최대한의 손실을 보길 원했다. 단 1원이라도 놈이 손실을 본다면 나는 기꺼이 수고로움을 감수할 것이다.
“후우~”
어쩐지 시가 맛이 더 좋게 느껴졌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아침에는 제법 쌀쌀하더니 이제 선선한 하며 포근한 바람이 부는 게 봄이 오려는 모양이다.
“이놈, 팔자 좋아 보이는구나.”
할아버지의 등장에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내려놓았다.
“되었다. 아까우니 끄지는 말거라.”
“예.”
재떨이에 불이 꺼지지 않게 올려놓고, 마주 앉은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은행장들을 만났다고?”
“예.”
“왜?”
“이건 그놈이 도주하려는 모양입니다.”
“도주?”
“예, 재무이사와 비밀리에 대화를 나누고, 바쁘게 움직이더군요, 마치 똥줄 타는 개새끼처럼.”
할아버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교도소는 싫은 게야.”
“예, 곧 죽어도 ‘제왕’이라 생각하니, 자신이 생각하는 천한 것들이 사는 교도소는 싫겠죠.”
“쯧쯧, 놈이 갈 대로 갔다는 얘기구나··· 맛탱이가 가버렸어. 그래서, 아직 은행장들을 만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구나.”
“그치들에게 돈을 좀 빌려주기로 했습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할아버지.
“돈을 빌려줘야 할 은행 놈들이 되려 돈을 빌린다?”
“네, 제가 사야 할 걸 대신 헐값에 사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아!”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신 듯,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할아버지.
“이놈! 돈이 굳었구나?”
“하하하, 예. 이건 그놈이 수락한다면 돈이 많이 굳을 겁니다. 주식을 담보로 시장가의 50%를 대출해주기로 했거든요.”
“50%? 그렇게 후려치는데 수락한다는 말이냐?”
“수락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겁니다. 지금 마음이 급한 건 이건 그놈이니까요, 판때기 위에서는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죠.”
“이건 그 뱀 같은 놈이 냉정함을 잃었다?”
나는 테이블에 있던 서류를 보여주었다.
정호석이 들고 간 서류와 똑같은 서류였다.
샤락, 샤락.
사진을 넘겨보던 할아버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쯧쯧, 이 젊은 아이를 뭣 하러 손을 댔다더냐?”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장부 때문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궁지에 몰렸기에 이빨을 드러내는 모양이에요.”
“썩을 놈··· 쯧, 약속은 지키거라.”
뜬금없는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놈이! 잊은 게냐?”
아무리 생각해도 할아버지와 한 약속이 떠오르지 않는다. 몹시 서운한 표정을 짓고 계신 할아버지.
“이건 그놈은 내 것이다!”
선언하듯 뱉어낸 할아버지의 말에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이건의 ‘숨’은 할아버지 것이라 못 박아 두었던 그 기억이.
어쩐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꼭 지키겠습니다.”
***
이틀 뒤.
당초, 나흘을 계획했던 이건이지만 서둘러 출국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분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으니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분명 소란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이제 8천억이 넘는 사내 유보금은 크게 비중에 넣지 않았다.
간이 콩알만 한, 재무이사 김종서가 그 돈을 꿀꺽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도망자 처지라지만, 당장 돈 10억이면 재무이사의 목숨따위는 쉽게 살 수 있는 세상이란 걸, 이건도 알고 김종서도 알고 있기에 더욱 확신했다.
“차명은 다 처리했더냐?”
“매수자가 없어 아직 절반 남았습니다.”
“쯧, 너는 한국에 남아 그것들을 처리하거라, 그리고 파나마로 건너와.”
남종현이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어쩐지 자신이 독박쓰는 그림이 될 것 같았다.
“예.”
국제공항에 도착하고 이건이 서둘러 내렸다.
아주 작은 캐리어가 짐의 전부.
“종현아.”
“예, 회장님.”
“훗날을 도모하자··· 훗날을.”
“예.”
“그날을 위해 한 푼이 아쉽다. 이제 내가 믿을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꽤 진심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남종현은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번 마음에 자리 잡은 불신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예.”
“그러니 남은 것 잘 정리하고··· 파나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자구나, 2년··· 그래 2년이면 충분할 게다.”
“예, 회장님.”
평소와 다른 태도의 남종현을 보자니 이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놈!”
노호성에 남종현이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교육받은 자세가 나왔다. 가사도우미 김소희와 몹시 비슷한 자세.
“욕심을 부리는구나··· 사람은 다 분수가 있는 법이다. 반절을 처분했다 했으니 나머지 반절은 3000억쯤 되더냐?”
본래는 그것보다 두 배는 비쌌을 테지만, 현재의 가치는 이건의 말이 맞았다.
“예.”
“네 목숨이 3천억이더냐? 죽으면 소용없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내가! 이 삼현의 오너가! 지금 잠시 내리는 소나기를 피하는 것을 보면 모르겠더냐? 살아 있어야 돈도 쓸모가 있는 게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오냐, 서둘러 가거라, 바삐 움직여.”
“안까지 모시겠습니다.”
“되었다.”
이건이 막 돌아서려는 때.
짝짝짝.
박수소리와 함께 다양한 색상의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이건과 남종현을 둘러쌌다.
“캬~ 명연설 잘 들었습니다?”
“하하하, 검사님 아주 둘이서 영화 한 편 찍던데요?”
“반갑습니다. 삼현 그룹의 총수 이건 회장, 나는 정의찬 특검이라고 합니다.”
신분증을 제시하니 이건의 동공이 바쁘게 떨렸다.
어디 도망칠 구멍이 있나 찾는 모습.
“워워, 노인네 몸 상할라, 순순히 따라갑시다 그러면 수갑은 안 채울 테니.”
이건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외쳤다.
“이놈들! 네 놈들이 감히 나를 겁박 하느냐!”
“어이구, 노인네 목청이야 깜짝 놀랐네.”
결국 수사관 하나가 허리춤에서 수갑을 꺼내 이건에게 다가간다. 남종현은 본능적으로 이건의 앞을 막아섰다.
“영장 있습니까?”
“영장~ 있지~”
탁탁.
품에서 꺼낸 종이 하나를 펼쳐 남종현의 눈앞에 보여주는 정의찬 검사.
“자~ 이거는 체포 영장, 그리고 이거는 출국 금지명령서.”
남종현이 아랫입술을 깨물다 뒤로 돌아서서 작게 말했다.
“회장님, 금방 법무팀 소환하겠습니다.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말고 기다려주십시오.”
허탈한 표정의 이건이 멍한 표정으로 수사관을 따라 걷기 시작하고, 정의찬 검사가 내민 손을 빤히 쳐다보는 남종현.
“수갑은 왜···”
“에이, 체포영장 제대로 안 보셨구나? 남종현씨 당신을 김소희씨의 살인 혐의로 체포합니다. 묵비권을···”
“아, 아니야! 난 아니라고!”
“자자, 그건 차차 말씀하시고 반항하면 우리 수사관들 힘씁니다?”
***
몇 달 뒤.
더이상 대한민국에 삼현그룹의 총수 이건을 우러러보는 사람은 없었다. 전 삶, 그의 추종자들이 생길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이미지는 바닥 그 자체였다.
살인 및 살인 교사, 뇌물 수수 및 뇌물 공여, 폭행 교사 및 폭행 치사, 불법 비자금 조성등, 그의 죄목을 밝히자면 끝도 없이 나열해야 할 만큼 부패의 온상이라고 보아야 했다.
“재판을 기다리느라 아주 쎄가 빠졌는데, 드디어 끝이 나는구나.”
할아버지의 말씀에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례 없을 속도로 진행된 재판.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오래 걸릴 것으로 생각했던 정경유착 관계에 대한 조사가 어째서인지 ‘도주’한 정치인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앞다투어 특검에게 찾아가 자수하고 자백했으니,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심지어 모든 죄를 인정하고 엄벌을 처해달라며 판사에게 호소하는 정치인들도 있었다. 물론 ‘도주’했다고 알려진 정치인들은 도주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도주 미수가 옳다.
아마 지금은 바닷속 심연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을 것이다.
“후우~ 어찌나 기다렸던지.”
할아버지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매일같이 자신의 육체를 혹사 시키며 이건을 벼르고 또 벼르고 계셨다. 덕분에 어깨가 나보다 넓은 것 같아 분발해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 이 가볼까?”
“예.”
***
독방에 앉아 멍하니 좁은 창살 밖을 쳐다보고 있는 이건.
쿵, 쿵, 쿵.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교도관이 말했다.
“4885 면회.”
누가 면회를 왔을까 궁금했다. 백치가 된 아들 이재영일까? 아니면 아비를 배반하고 제 살길을 찾아 떠난 딸자식 이희윤일까? 그런 궁금증과 함께 쇠약한 노인처럼 비척비척 걸음을 옮긴 이건.
면회실 내부로 들어가서는 덜컥 몸이 굳어버렸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천혁수와 천우진이 밝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고 있었다. 언제 쇠약한 노인이었냐는듯 빠르게 다가간 이건 면회실의 강화 유리를 부술듯 두들겼다.
“이 개새끼들! 죽어! 죽어어어어!”
히죽히죽 웃던 천우진이 말했다.
“노인네 오래 살겠네 기운차 아주. 모쪼록 꼭 살아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건 회장님.”
“오냐, 내가 살아서 네놈 심장을 꺼내 씹어주마!”
천우진이 웃으며 서류 하나를 강화유리에 대어 보여준다. 천천히 서류를 읽던 이건의 얼굴이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다.
“이제 세상에 삼현은 없어, SKY만 있지 당신 덕분에 앞으로 선점한 반도체 시장으로 세상을 호령할 테니까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라고.”
천우진은 서류를 대충 구겨 바닥에 던지고 천혁수에게 물었다.
“할 말 없으세요?”
천혁수에게서 사나운 기운이 풍겨나왔다.
면회실을 감시하던 교도관이 흠칫 놀랄 만큼 위험한 냄새가 나는 그런 눈으로 이건을 똑바로 바라보는 천혁수.
“이 뱀 같은 놈아··· 부디 그 안에서 오래 살 거라 3년만 버텨 3년만, 그러면 이 몸이 네 놈을 가석방 시켜주마.”
이건도 천우진도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천혁수는 그 말을 끝으로 아무런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고, 천우진도 서둘러 할아버지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3년··· 3년···”
이건의 눈에 일순간 희망이 피어났다.
그가 아는 천혁수는 결코 거짓말을 말하지 않으니까. 그것이 아무리 원수라고 해도 말이다.
***
면회실을 나오자마자 히죽 웃으며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어떠셨어요? 제 연기. 놈이 깜빡 속아 넘어갔겠죠?”
“오냐, 정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하하하, 이참에 배우나 해볼까요?”
“뻑하면 출근은 안 하고 빈둥거리는 놈이 쯧.”
할아버지의 잔소리에 잠시 딴 곳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려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할아버지 그런데 도대체 어떤 방법인데요? 3년 뒤에야 직접 손을 쓰실 건 알겠는데, 도대체 그 3년이 얼마나 어떻게 지옥 같을지는 좀 설명을 해주세요.”
“비밀이다.”
“저도 이건 그놈한테 지분 있습니다!”
굳은 얼굴로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말하지 않았더냐? 저놈 숨은, 내 것이라고.”
절대 알려주지 않겠다 하는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아 정말 미치도록 궁금했다.
“후우···”
탐탁지 않아 함을 느꼈을까?
할아버지가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부디 놈이 3년을 버텨주었으면 좋겠구나··· 과연 그럴 깜냥이 될까 싶어.”
위험하다.
매우 위험한 냄새가 할아버지에게서 풍겨나왔다. 조금 전 면회실에서 보여주었던 모습과도 차원이 다르다. 이건의 심신을 위해 참고, 참고, 참았던 모양.
입은 웃고 있지만 할아버지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결국 할아버지에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저 멀리 차량 문을 열고 대기 중인 백철웅에게 황급히 달려갔다.
할아버지보다 먼저 도착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후우, 후우, 대표님 도대체 할아버지가 감방 안에 뭘 꾸며 놓으신 거예요?”
할아버지를 힐끗 쳐다본 백철웅이 다시 날 바라보더니 입은 움직이지 않고 복화술로 작게 말한다.
“남즈 즈아하는 남즈.”
오소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상상만 해도 너무나도 끔찍한 일, 과연 이건이 3년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내가 했던 그런 원초적인 복수와는 차원이 다른 할아버지의 클라스를 새삼 다시 확인 할 수 있었다.
***
샤워시간.
어째서인지 천혁수와 천우진이 다녀간 밤부터 교도관들이 이건의 편의를 봐주기 시작했다. 이건은 더욱 희망을 품었다. 천혁수가 진심으로 자신이 살아나오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였다.
“미친놈.”
절로 욕이 튀어나오지만 얼마 있지도 않았던 교도소 생활에 점점 피폐해짐을 느끼던 찰나에 소소한 편의는 놀라울 정도로 행복했다.
솨아아아아.
떨어지는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니 어찌나 따뜻한 물이 귀한 것인지 새삼 다시 느끼는 이건. 한껏 심취해 있느라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건장한 사내들을 느끼지 못했다.
“크크큭.”
웃음소리에 흠칫 놀란 이건이 몸을 돌렸다.
양쪽에서 이건의 팔을 단단히 고정하는 사내 둘. 거짓말을 보태 2m는 될 법한 덩치의 사내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안녕 자기야? 오늘부터 자기가 내 애인이라며? 어머머, 어머머, 자기 나이에 비해서 피부가 너무 좋다~ 재벌 회장 출신이라더니 역시 돈이 좋아~”
“이거 놔라 이놈들!”
“어머! 제법 박력도 있잖아? 아항, 더 좋아. 나는 너무 쉬운 남자는 재미 없더라!”
거구의 사내가 이건이 사용하던 비누를 들어 바닥에 툭 떨어뜨리더니 말했다.
“자기야, 비누 좀 주워볼래? 이왕이면 그 희고 고운 엉덩이 뒤태를 살려서? 난 그 라인이 제일 흥분 되더라.”
< 제 7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