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8화. >
깜빡, 깜빡.
이희윤이 힘겹게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려 몸에 힘을 주지만, 팔은 뒤로해서 케이블타이로 묶여 있었고, 다리도 마찬가지로 묶여 있었다.
절망적이고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훑어본 주변은 자신이 묵고 있던 호텔 방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곳 같은 느낌이었다.
“듣기로는 약도 한다는 것 같던데, 보기보다 내성이 별로인 모양이야 제법 오래 잠들었어.”
듣기 싫은 목소리에 흠칫거리는 이희윤, 그녀의 앞에 등장한 이재형이 입에 붙여져 있던 청테이프를 떼고 입속에 구겨 넣어 놓은 양말 뭉치를 꺼내었다.
“기억나? 여기.”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이희윤, 그녀는 그저 살고 싶었다. 자신의 아비 이건의 가슴에 칼을 꽂던 이재형의 얼굴을 잊을 수 없기에.
“사, 살려줘··· 재형 오빠.”
“크크크큭, 오빠는 지랄, 원래 하던 대로 하지 그래? 이 새끼 저 새끼, 첩실년 자식새끼, 더러운 핏줄 따위로 부르라고. 어색하잖아? 이거 보여? 소름 돋은 거.”
“제, 제발.”
“여기가 어딘지 기억해 봐, 그러면 살려줄지도 몰라.”
이희윤은 필사적으로 눈알을 굴려 이곳이 어디인지 살폈다. 알 것 같으면서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 시발.”
자조섞인 목소리로 욕을 하며 말을 잇는 이재형.
“피해자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고 살지, 근데 가해자라는 것들은 금방 잊어버려, 맞은 놈이 밤잠을 설치는 이유랄까?”
거칠게 이희윤의 머리를 잡아채 주변을 확인시켜준다.
“여기야, 우리 희연이가, 우리 연아가! 네년에게 장. 난. 이라는 고문을 받던 곳.”
그제야 이곳이 떠오른 이희윤,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말했다.
“서, 설마?”
비릿하게 올라간 이재형의 한쪽 입꼬리가 지금 이희윤이 하는 생각이 맞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희윤은 늘 가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살았다. 심지어 성적으로도 누군가를 학대하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단지 세상의 법규에 맞춰 그 성격을 감추고 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릴 적, 생각이 훨씬 더 단편적이던 시절, 이희윤은 삼현의 막내딸 이희연을 무던히도 괴롭혔다. 정확히는 ‘학대’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곤충 다리는 잡아 뜯으면 뜯기던데? 너는 왜 더러운 곤충 같은 존재인데 팔이 안 뜯겨? 다리도 안 뜯기네?]
[야야! 더러운 년! 오늘은 네 피도 곤충들처럼 특이한지 구경해보자!]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억에 아찔함을 느끼는 이희윤. 아이러니하게도 곧 이재형이 자신이 이희연에게 했던 것처럼 할 것이란 걸 알면서도, 이희연에게 했었던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는 것으로 성적 흥분이 동반되고 있었다.
드르륵, 드르륵.
차가운 쇠사슬이 이희윤의 왼쪽 팔을 감싼다.
“너희 삼현 ‘이’가의 핏줄은 한 놈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게 천우진 회장의 뜻이야.”
“너는! 너도 우리 핏줄이잖아!”
“지랄하지 마, 나는 우리 엄마 핏줄이지 그 더러운 이가 놈의 핏줄이 아니니까, 단 한 순간도 너와 같은 핏줄이라 생각한 적 없어.”
“도대체 네가 천우진 그 새끼한테 충성하는 이유가 뭔데!”
피식 웃으며 이희윤의 오른쪽 팔에도 마저 쇠사슬을 감은 이재형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복수, 그리고 돈.”
“나랑 한 약속도 어긴 놈을 믿는다고!”
“왜? 네년은 그 돈 때문에 그렇게 존경한다던 네 아비를 엿 먹였잖아? 난 그렇게 큰돈을 바라지 않았어, 주제를 알았지. 감히 천우진 회장은 우리같은 것들이 상대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
“그리고 약속은 내가 먼저였어,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켰고.”
“뭐?”
“내가 부탁했던 모든 약속을 이행했다고, 네년의 목숨도, 이재영의 목숨도.”
어떤 리모컨을 누르니 이희윤의 팔을 감싸고 있던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나무상자 하나를 가져와 뚜껑을 열어 보여준다.
“허업!”
겨우 사람 머리 하나가 들어갈 사이즈의 박스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자, 네 오라비 이재영 외롭겠다. 근데 어떡하지? 조금 더 기다려야 될 것 같은데, 나는 네가 오래 버텼으면 좋겠어.”
“··· 제발···”
“아아, 걱정하지 마 원망하고 싶거든 곧 따라갈 네 아비 이건을 원망해, 모든 일의 원흉은 그놈이니까. 이재현 그 빌어먹을 새끼가 먼저 뒤진 게 아쉬운 날이네.”
***
이건의 저택이 아닌 서울 외곽의 안가.
삼현물산의 재무이사 김종서가 다급한 모습으로 주변을 살피며 안으로 들어간다.
“찾으셨습니까 회장님!”
“앉아.”
“예.”
자신이 태우던 시가와 같은 것을 김종서에게 건네고 불을 붙여주는 이건.
“우리 금 모으기 운동 때 금 빼돌리면서 만들어 놓은 페이퍼 컴퍼니 있지?”
“지금은 없습니다 회장님.”
“그래?”
“예, 지금은 파나마에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이건이 반색하며 물었다.
“그래? 파나마?”
“예. 자본금 10억 규모의 작은 회사로 아직 유지 중입니다. 세탁기 역할을 하는 중입니다.”
“재영이가 쓰던 것이냐?”
“예, 회장님.”
“얼마나 있어?”
“현재 약 600억 정도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건이 제법 만족스러운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사내 유보금, 그 페이퍼로 돌리는 데 며칠이나 걸려?”
재무이사가 매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전부를 말씀이십니까?”
인상을 찌푸리는 이건.
“토 달지 마.”
“그, 금액이 너무 커서···”
“파나마 안전한 곳 아니야?”
“그렇습니다만···”
“이 새끼, 김종서.”
“예, 회장님!”
“정신 똑바로 차려, 조금만 삐끗하면 다 골로 가는 상황이야.”
“며, 명심하겠습니다.”
몇 모금의 시가를 태우고, 재무이사가 심호흡과 함께 말을 시작했다.
“현재 그룹 내 유보금은 총 8천700억 정도가 됩니다.”
“그래··· 자동차 지키려고 없는 돈 있는 돈 모조리 긁어 왔으니까.”
“먼저 제3국으로 돈을···”
“며칠, 그것만 얘기해.”
“아, 예. 최소한 8일은 필요합니다.”
“좀 더 무리하면?”
“······”
“나흘, 나흘안에 가능한 금액이 얼마야?”
“그러면 손해가 큽니다 회장님.”
조용히 남종현이 다가와 가죽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김종서는 본능적으로 저것이 무슨 시그널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손해는 감수하고 진행해.”
“예, 예!”
“가, 지금부터 일해, 무슨 일이 있어도 일해! 알겠습니다!”
다급하게 안가를 벗어나는 김종서.
“종현아.”
“예, 회장님.”
“차명으로 돌려놓은 지분들 싹 다 처분하고 스위스 계좌로 넣어.”
“··· 회장님 잠시 도피하시려고 합니까?”
“살아 있어야 다음이 있어!”
“··· 예.”
“행장들 좀 만나기로 하지.”
“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서둘러 나흘 남았어.”
“예!”
남종현이 사라지고, 이건이 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품질 문제로 휴대폰 ‘화형식’이라는 쇼까지 하면서 어떻게든 끌어올렸던 휴대폰 점유율.
“망할 스카이 놈들···”
슬라이드 폰을 등장시키며 빠르게 점유율은 수직으로 하락했고,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디자인이 된 휴대폰을 잠시 쳐다보다 입을 앙다물고 열어 다이얼을 누르는 이건.
“새벽에 실례가 많소, 나 삼현의 이건이오.”
-아니···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부탁 하나 합시다.”
-크흠.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표현하는 상대방.
“100억. 100억을 약속하겠소, 어려운 부탁도 아니외다.”
-흠흠, 뭡니까? 그 부탁이.
“딱 7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일주일만 시간을 주시오, 지금의 위기를 어떻게든 타파할 길이 보이니.”
-크흠··· 확실합니까?
“그렇소, 박 판사가 힘 좀 써 주시오. 100억은 4일 뒤에 먼저 드리리다. 깨끗하게 세탁된 놈이오··· 은퇴도 멀지 않았는데 편안한 노후에 충분한 금액 아니오?”
-최대한··· 힘 써 보겠습니다.
“박 판사만 믿소.”
***
부스스한 모습으로 잠에서 깨어나 발코니로 나갔다.
마당에서 쉬고 있던 정호석이 날 발견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온다.
“일어나셨습니까 회장님.”
“일찍 나오셨네요, 오늘은 푹 쉬시라니까.”
“보고드릴 내용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정호석이 내미는 서류 봉투를 확인했다.
몇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는데 평범한 사람이 본다면 기겁할지도 모를 사진이었다.
창문 방범창에 목을 매고 죽어있는 젊은 여성의 사진을 시작으로, 이건과 남종현의 사진이 모습을 보인다.
“놈들이 죽였나요?”
“예.”
“흐음··· 이건놈이 급한 모양입니다. 직접 움직이는 놈이 아닌데 말이죠. 뒤가 없는 짓거리를 직접 한다라···”
돌연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정 하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이 새끼··· 지가 김유중이야 뭐야?”
전 삶.
희대의 사기극 분식회계를 펼쳤던 김유중이 해외 도피 행각을 벌였던 것처럼.
이건 그놈은 그 잘난 ‘삼현’을 버리고 도망갈 생각인 듯 보였다.
“네 놈 뜻대로 될 리가.”
이런 상황에서 아주 적절한 카드가 손에 들렸다. 놈은 욕심이 많을 테니 고작 몇백억 푼돈만 들고 튈 리가 없다. 김유중이 그랬던 것처럼.
제 놈들이 ‘제왕’인줄 착각하는 놈들은 항상 비슷하다. 분명 크게 한탕 할 준비를 할 터.
손에 들린 카드를 다시 정호석에게 건넸다.
“이 서류, 바로 정의찬 검사에게 보내고 이건 그 새끼 출국 정지부터 시키세요, 남종현 비서실장을 비롯한 재무이사 김종서까지.”
이건과 남종현이 젊은 여인 살해사건에 가담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다. 현재 ‘의혹’수준에 머물러 있는 비리 내용과는 달랐다.
물론 비리도 사실이다.
모든 국민이 아는 사실이지만, 망할 법은 법리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외치고 있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살인 사건’은 달랐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명확한 증거는 반드시 ‘영장 발부’가 가능할 테다. 최소한 출국 금지는 손쉬운 일.
“예, 회장님.”
“피곤하시겠지만, 빠르게 처리하세요.”
“예!”
마침 마당에 모습을 드러낸 백철웅.
“백 대표님!”
부름에 고개를 올려 날 바라본다.
“잠시 시간 괜찮죠?”
빙그레 웃으며 ‘예’하고 대답하고는 정호석과 교대하듯, 내 곁으로 올라온 백철웅.
“삼현이랑 친한 은행들 있죠?”
“예, 현재 대한 은행을 제외한 모든 은행과 연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해당 은행의 행장들 보자고 해 주세요. 아, 점심시간 안에.”
“예! 회장님.”
가타부타 질문 없이 예스를 외치는 백철웅.
이런 모습이 오히려 믿음직스러웠다.
***
딱딱딱딱.
현재 이건의 모습은 누가 봐도 초조한 모습이었다.
아침부터 안가에서 은행장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시큰둥한 모습이었기에 그랬다.
“담보가 부족하긴 개새끼들이!”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 처럼 굴던 놈들이 IMF이후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삼현은 튼튼하다 그렇게 어필해도 타타다우의 분식회계 사건도 그렇고, 현재 SKY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삼현의 상황 때문에 쉽게 돈을 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역으로 삼현자동차의 부채를 먼저 변제해달라는 요구를 할 정도로 그들의 태도는 미적지근했다.
거기에, 부정부패, 정경유착의 아이콘이 된 이건에게 보내는 그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특검까지 출범한 형세에 이건의 신뢰도는 바닥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겨우 1조도 안 되는 돈이 끝이라고!”
당장 들고 갈 수 있는 돈이 그것이 전부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재산, 주식만 해도 시장가로 8조원이 훌쩍 넘어간다.
이건의 명의로 되어있는 것만 그렇고, 차명과 자식놈들, 그리고 처가에 있던 것까지 포함하면 20조가 넘는다.
그런데 급박한 상황 속, 자신이 쥘 수 있는 돈이 고작 1조라는 사실에 비통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말없이 고독하게 담배를 태우기도 한참.
지이이잉, 지이이잉.
드디어 그의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 받았소.”
-아, 회장님 한결은행장입니다.
“예, 은행장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식을 담보로 잡는다면 대출해 드리리다.
“뭐야?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분노에 의해 대뜸 반말이 튀어나온 이건.
평소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윗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는 인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태도였다.
-크음, 제대로 들으셨소, 주식을 담보로 하는 대출이 아니라면 승인할 수 없소.
강경한 은행장의 태도에 심호흡한 이건이 짧은 갈등을 이었다.
“내 금방 전화 드리리다.”
-벌써 오후 2시요, 특별히 회장님은 오후 8시까지 감안 하겠소.”
“크흠, 알았소.”
전화를 끊고 홧김에 휴대폰을 던지려다 참는 이건.
남종현도 차명 계좌 처분을 위해 바깥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전화마저 없다면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음을 잘 아는 것이다.
이후로 다른 은행들에도 비슷한 전화가 걸려왔다.
모두 ‘주식’담보 대출을 얘기하고 있었다.
“제기랄··· 결국···”
이제 떠나는 길, 되돌아올 곳은 없다.
본래의 계획은 잠시 도피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에게 잊힐 때 다시 복귀할 예정이었다.
이제 선택의 순간이 왔음을 느꼈다.
삼현을 버리고 다시 일어설 발판을 마련하느냐, 아니면 삼현을 지키고 교도소 생활을 버티느냐.
“제기랄··· 진즉에 없애 버렸어야 했어 망할 장부!”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가 인터넷이라는 신세계에 퍼져버린 상황, 변호사와 얘기를 통해 전해들은 형량은 최소 7년, 줄이고 줄여도 꼬박 3년은 교도소의 차디찬 바닥에서 생활해야 했다.
휴대폰 폴더를 열고, 한결은행장에게 전화를 거는 이건.
“주식 담보 대출··· 실행합시다.”
그는 죽어도 천한 것들이나 가는 교도소 따위에 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식 담보 대출을 통해 마련한 자금으로 언젠가 삼현에 버금갈 기업을 세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당장 자신이 천하디천하다 생각하는 사채업자의 손자놈도 SKY라는 기업을 만들었는데, 자신이라고 못할 것 없잖은가?
< 제 78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