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6화. >
76화
아산의 천가키즈 수련원.
이곳은 이공계 계열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을 위주로 교육하는 곳이었다. 그들이 함께 어울려 시너지를 불러일으키게 하고자 천우진이 전문가들과 상의 후 엘리트들을 만들기 위한 최적의 커리큘럼을 적용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돈을 꽤 많이 썼다는 얘기다.
수련원 건물 안, ‘MY TUBE’라고 쓰여진 20평짜리 작은 방 안에서, 철수를 비롯한 몇몇 한국인 프로그래머들이 아이들을 도우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보스! 준비 끝났습니다!”
보스라 불린 인물은 놀랍게도 김철수였다.
구골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이제는 제법, 한국말보다 영어가 익숙한 그였다.
“마, 그람 준비 단디 하고! 신호 기다리자, 서버 단디 챙기라 순식간에 폭발 해불끼다.”
30대 초반의 프로그래머가 철수에게 다가와 말했다.
“에이, 서버가 터지기야 하겠습니까?”
철수가 날카롭게 그를 째리며 말했다.
“회장님 몰라서 그라십니까?”
“홍보도 제대로 하지 않은 서비스입니다. 동시접속자가 폭발할 수가 없죠.”
“당연하지예, 아직은 SKY랑 연관이 없어야 한다 안캅니까? 그라고, 서버 터져삐면 무조건 팀장님 잘못이니까네, 알아서 단도리 잘하시리라 믿습니다.”
“··· 예, 명심하겠습니다.”
SKY SOFT와 구골, 스몰 홈피로 인사 발령되지 않은 자신의 신세를 비관할 법도 하건만, 철수는 전혀 그럴 기미가 없어 보였다. 우진이 지시한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뚫어지게 40인지 브라운관 TV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진과 약속한 신호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되기에 더욱 집중해서 생중계되는 국감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곁으로 돌아온 팀장에게 눈짓하지 않고 말하는 철수.
“좌우당간 겁나 대단한 회장님 아닙미꺼?”
“예?”
“그, 뭐시냐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 뭐 그란말 있잖습미까?”
“아, 예. 있죠.”
“와따마··· 나라에 높은 양반들 앞에서도 우리 회장님 기세등등한 거 보이소.”
“아, 그게 대단하다고 하신 거였어요?”
철수가 피식 웃는다.
“설마 그까짓 걸로 대단타 하겠십미까?”
“그럼···”
“마, 이 기회를 살리가 우리 마이튜브를 제대로 홍보한다 안 캅니까? 정치인 섹스 비디오! 와따마 겁나게 자극적이지 않습니까? 적어도 이 한국땅에서는 안 보고 싶은 사람 없을낍니다.”
“아아!”
팀장이 우진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 모습이 내심 흐뭇한 철수였다.
***
정호영도, 이형택도, 기타등등의 모든 정치인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이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일까? 자꾸만 비죽비죽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가까스로 참느라 땀이 흐를 지경이다.
“다음! 민주한국당 대표 강구윤 의원, 심문석에 자리하세요.”
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
위원장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같은 정치밥 먹는다는 것들이 하나같이 썩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제 놈들이 열어달라고 난리를 치던 국감장에서 서로 심문을 피하려고 애를쓰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위원장의 말에 강구윤 여당대표가 살려달라는 표정으로 애처롭게 위원장을 바라본다.
‘너도 처먹었냐?’
‘살려주십시오!’
꼭 둘이 눈으로 그렇게 대화하는 것 같았다.
여당대표 강구윤이 심문석에 앉았다.
“이름, 천우진 맞습니까?”
“강구윤 여당대표, 삼현물산······”
“그, 그만! 제 심문은 여기까지입니다!”
서둘러 심문석을 떠나려는 강구윤에게 위원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강구윤 당대표! 그럴 거면 심문인 신청은 왜 했습니까!”
이제 이 쇼를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걸 느꼈다. 나는 왼손으로 이마로 가져갔다.
누가 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사인’이 될 수 있는 그런 일이었다.
위원장과 가까이서 뭐라뭐라 대화를 나누는 강구윤.
고개를 크게 끄덕인 위원장이 다시 마이크 앞에 서더니 말했다.
“SKY그룹 천우진 회장의 심문은 이것으로 끝냅니다. 잠시 휴회한 후, 두번째 증인 대한종합금융그룹의 천혁수 회장의 심문이 있겠습니다. 20분 뒤, 다시 시작할 테니 늦기 전에 자리에 앉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정호석이 절도있게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할아버지는 이미 바깥으로 나가신 모양.
“회장님은 차로 가셨습니다. 시가 한 대 태우실 모양입니다.”
“아, 우리도 가죠.”
“예.”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걸 알았기에, 제법 커다란 차량을 가져왔다. 흔히 연예인들의 차라고 불리는 그것이었다.
리무진 시트는 제법, 정자세로 앉아 있었던 내 근육을 쉴 수 있게 만들어준다.
힐끗 할아버지를 보니 말없이 시가만 태우신다.
“긴장되세요?”
“쯧, 언젠가 먹을 욕이었어 덕분에 오래 살고 있지 않느냐?”
“글쎄요, 욕 먹을 일 없을 것 같은데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보신다.
“이놈··· 뭔갈 꾸며 놓았구나.”
“질문 한마디라도 할 수 있다 없다. 내기 한번 하실래요?”
“일없다. 네 놈이랑 내기해서 이겨본 적이 없어.”
어느새 시가를 반쯤 태우신 할아버지, 백철웅이 조용하게 말했다.
“시간 되었습니다 회장님.”
고개를 끄덕인 할아버지가 날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먼저 들어가거라, 제법 오래 걸릴 테니.”
“에이,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질문 한마디도 못 할 거라고?”
“음···”
“시가 불이 꺼지기도 전에 돌아오실걸요?”
피식 웃은 할아버지가 백철웅의 에스코트를 받아 국감장 안으로 향했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시가를 입에 물었다.
“후우~ 맛 좋네.”
***
이건의 비밀금고 안.
“으아아아아!”
으아아 으아아.
30평 넓이의 금고가 텅 비어 있으니 이건의 악이 메아리치듯 울렸다. 누가 보면 노래방에서 고음이라도 지르는 거로 느낄 만큼.
잔뜩 붉어진 이건.
“설마, 설마 했건만!”
TV속 국감장에서 천우진이 줄줄 외고 있던 삼현과 관련된 정치인들의 비리 내용. 어쩐지 그 내용이 섬찟할 만큼, 자신이 정리해 놓은 것과 같기에 화들짝 놀라 달려온 참이었다.
평소라면 남종현을 집무실 바깥으로 내보내고 들어왔을 테지만, 지하로 내려오지만 않았을 뿐, 이건이 비밀금고에 들어가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을 정도로, 이건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만큼 다급했다는 방증.
-회,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계단 위로 남종현의 음성이 들려왔다.
언제 뛰어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걷기 이상의 속도로 움직여본 적이 드문 이건이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려 하다 넘어졌다.
어두운 계단을 노구가 다급하게 오르니 당연한 일.
쓰라린 무릎 따위는 신경 쓸 틈도 없이 서둘러 올라간 이건이 남종현의 뺨을 후렸다.
“이 새끼가! 도대체 직원들 교육 어떻게 시킨 거야!”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없는 사이에 어떤 개새끼가 여길 들어왔어! 누구야!”
“다, 당장 찾아내겠습니다.”
“서둘러!”
이건은 제발, 천우진이 가지고 있는 것이 ‘사본’이길 원했다. 원본은 아니길 속으로 간절히 빌고 빌었다. 뒤가 없는 올인을 했는데, 믿고 있던 패가 사라진 상황 아직 전경련에게 받기로 한 비자금이 많이 남은 상황.
장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장사치 놈들이 약속을 이행할리 없었다.
그것은 곧.
삼현이 풍전등화나 마찬가지란 말이었다.
***
할아버지가 다시 나올 때까지,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네 놈 말처럼 되었구나.”
“기름낀 금배지들 표정이 볼만했죠?”
“오냐, 저러다 터지겠거니 했다.”
조수석에 오르는 백철웅에게 물었다.
“언론사들 연락 있습니까?”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철웅이 휴대폰을 꺼내어 들면서 고개를 숙여 양해를구한다.
“예··· 예··· 그렇게 보도하시죠··· 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 원본으로 확인됩니다··· 예, 예.”
잠시동안 각종 언론사에 백철웅은 시달리겠거니 하는 찰나, 내 품에서도 휴대폰이 요란하게 떨렸다.
“여보세요.”
-천 회장··· 대통령입니다.
“아, 예.”
-당대표 강구윤을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바빠서요, 본론만 부탁합니다.”
-비디오가 공개된 마당에 비리 내용을 부정해도 소용이 없겠죠··· 단체로 자리한 동영상에 이건 회장의 얼굴도 선명하더이다.
이때까지는 동영상이라는 말이 어색하던 시기.
비디오라고 얘기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다.
“비리타도 대통령, 곧 다가올 레임덕 시기에도 좋지 않겠습니까?”
-원본인가 싶어 묻고자 전화했습니다. 특검이 꾸려질 겁니다.
“예, 넘기죠.”
-타타다우 조사하던 정의찬검사 라인이 대거 등용될 겁니다. 모쪼록··· 잘 부탁합니다.
대통령은 한 나라의 행정을 핸들링하는 사람 답게, 현 시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이제 정치한다는 놈들은 SKY를 건드리기 어렵다. 오늘 이후로 SKY의 이미지는 청렴함과 더불어 정·재계의 거물들을 대차게 부숴버리는데 두렵지 아니할 수 없다.
정호석이 룸미러로 뿌듯한 눈빛을 보내온다.
퍽 부담스러웠다.
마치 ‘역시, 나라가 깨끗해집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천가가··· 우리가 날아가는구나.”
할아버지의 혼잣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아직 승천 전입니다. 여의주가 완성이 안 되었거든요.”
“여의주?”
“예, 겨우 대한민국을 담았을 뿐이라.”
“하하하, 이놈 포부가 마음에 드는구나!”
그 사이, 거칠게 휴대폰 배터리를 뽑아버리는 백철웅. 짧은 시간이었지만 6개의 언론사의 전화를 받았고, 7번째 언론사의 전화가 오던 참이었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전경련, 싹 다. 우리 호텔로 부르세요.”
“예! 회장님.”
정호석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낸 백철웅이 바쁘게 전화를 시작했다.
***
남종현이 내미는 서류를 받아든 이건.
“이 년이야?”
“예··· 큰 아가씨의 지시로 7일 휴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희윤이?”
“예.”
쿵!
집무실 책상을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집기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내 딸이··· 내 핏줄이··· 나를 배신해?”
이성을 잃은 이건이 경보하듯 빠르게 걸음을 옮겨 이희윤의 방에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희윤이 그곳에 있을리 없었다.
“어디 갔어!”
“소재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찾아! 반드시 찾, 어헉.”
이건이 버럭 소리를 지르다 뒷목을 잡으며 비틀거렸다.
“회장님!”
잔뜩 사색이 된 얼굴로 손짓했다.
“나가, 나가서 찾아···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
“···예.”
이건의 저택을 나서자마자, 한기 가득한 바람이 남종현의 온몸을 두드렸다. 공항에서 이재형을 보았을 때 들었던 생각.
“역시 봄은 없나.”
삼현에 봄은 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
스카이 호텔의 대연회장.
기다랗게 세팅된 식탁 앞에 어깨에 힘깨나 주고 다니는 재계서열 50위까지의 오너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가장 상석으로 당당히 걸어가 자연스럽게 앉았다.
알아서 상석을 비워 놓았다. 이제 SKY의 위상이 어떤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와 같았다.
그들은 말없이 긴장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GL그룹의 총수만이 반갑에 웃으며 날 맞이했다. 확실히 그는 이건 그놈이 가지고 있던 명단에 없던 사람이었다. 여기 모인 인물 중, 몇몇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태반 이상이 연루되었다. 재계 30위 안에도 이럴진대, 그 아래로는 얼마나 더러울까 싶었다.
품에서 담배를 꺼내고 불을 붙였다.
어째서인지 GL그룹 회장이 움찔 몸을 떨었다.
“조온마난색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고 있음을 표한다.
“그걸 아시는 분들이 왜 조온마난색기를 비호해주셨을까요? 이건 회장이 아주 좋은 장부를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거 때문인가, 어디서 자꾸 돈을 가져오던데.”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인물들이 제법 보인다.
저런 심장을 가지고 있으니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는 것이다.
“지금 물고 있는 것까지, 남은 담배는 총 세 개비입니다. 담배를 다 피우면 난 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할 말 있는 분들은 알아서 먼저 말 꺼내세요.”
삼현을 끝으로, 몇가지 아이템이 더 탐나기는 하지만 이제 한국시장에 대한 투자는 삼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현재 있는 것을 발전시키고 R&D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내가 삼현에게 꼬리를 말았던 인물들에게 기회를 주는 이유다. 물론 공짜는 말이 안 된다. 대현의 정상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와 불쑥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미안하게 되었소, 천우진 회장··· 깨끗하지 못했던 내 부덕함을 용서하시오.”
눈치빠른 노인네, 한때 재계의 수장 자리에 군림하던 대현다운 대처법이다. 정공법, 대쪽같던 대현의 핏줄임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맨입입니까?”
정상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부동산 좋아하시오?”
그제야 나는 정상영이 내민 손을 잡아주었다.
“좋죠, 부동산.
악수가 끝나고 시선을 돌리려는데 말을 잇는 정상영.
“삼현은 어떻게 되겠소?”
“아실만한 분이 굳이 물어보고 그러세요?”
“······”
“찢고, 뜯고 잘게 다져 그대로 삼켜서 소화 시킬 겁니다. 뿌리까지, 쌀알 한 톨도 남김없이.”
< 제 7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