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5화. >
아침부터 내 일과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게 있다면 아침 운동이 끝나고 마사지를 받았다는 것 정도.
근육통 따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심신의 안정과 피부 테라피를 위함이었다. 그래도 공중파 방송 모두에서 송출될 테고, 나름 한 그룹의 총수이니 화면빨이라도 잘 받아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의견을 적극 수용했기 때문이다.
여태껏 이런 것을 즐기지 않았는데, 제법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 할 수 있어서 자주 불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똑똑.
노크와 함께 루시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우진! 저번에 말했지? 여기는 팀 뷰티.”
할아버지와 루시의 강력한 권고 때문에, 나는 태어나 처음 ‘코디’라는 것을 받게 되었다. 연예인들이나 받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걸 내가 받게 되니 좀 어색하다.
방이 결코 적은 평수가 아닌데, 여러 명의 여성들이 방안으로 들어오니 어쩐지 좀 답답하게 느껴졌다. 머리를 만지고 피부를 만지고, 옷을 몇 벌 입었다. 그 과정이 무려 1시간이나 소비되었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연예인 할 팔자는 아닌 것 같다. 겨우 1시간이지만 지옥 같았으니까.
“손 줘봐 천.”
오른팔을 내미니 웃으며 반대쪽을 가리킨다. 해서 반대 팔을 내밀었다. 감춰두었던 시계 하나를 꺼내더니 내 손목에 감아준다. 디자인이 클래식하며 세련된 가죽 시계.
“시계를 좋아한다기에 사 봤어, 오늘 잘해?”
시계를 한번 만지며 말했다.
“고마워 루시, 잘 쓸게.”
예전이었다면, 전 삶의 나였다면.
이 시계는 얼마짜리일까 따위를 생각했을 것 같았다. 무려 미국의 유명 가문 록펠러 가문의 인물이 준 선물이니 ‘엄청비싸지 않을까?’따위를 생각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내가 여유가 되기 때문일까?
그런 것보다는 시계가 예쁘다. 나를 위해 마음을 써 준 루시에게 고맙다 정도의 감상이 먼저 떠오른다.
1층으로 내려가니 할아버지가 날 쳐다보신다.
“녀석, 배우라고 해도 믿겠구나.”
“그러는 할아버지야말로···”
할아버지도 대단했다.
딱 봐도, 누가 봐도 돈 많은 노인처럼 보였다.
갈색 헤링본 스타일의 더블 버튼 정장은 마치 미래의 흥행했던 영화 ‘킹스맨’에 나올 것 같았다.
굳이 더블 버튼 정장을 추천해주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자! 가시죠 할아버지, 이 나라 뒤집어엎으러.”
“오냐.”
***
딱, 딱.
손톱을 물어뜯으며 TV에 집중하고 있는 이희윤.
어째서인지 집이 아니라 호텔 방 안이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벌벌 떠는 그녀.
“누, 누구야!”
-룸서비스입니다.
“루, 룸서비스? 난 그런 거 시킨 적 없는데?”
-아, 하늘이 주는 선물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
“하늘··· SKY?”
혼잣말을 읊조리다 떨림을 멈춘 이희윤이 문 앞으로가 작은 구멍으로 출입구를 쳐다본다. 호텔 유니폼을 입은 사내가 밝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제야 안심하고 문을 열어준다.
언제 불안에 떨었냐는 듯, 도도하고 앙칼진 목소리로 짜증을 뱉어낸다.
“아, 나 아침에는 공복으로 있는 거 모른대?”
멋쩍에 웃으며 방 안으로 카트를 끌고 들어온 사내. 소파에 앉아 사내가 상을 차리는 걸 지켜보면서 TV에 집중한다. 국회 앞에서도 천우진의 모습은 당당하기 그지없다. 이희윤이 히죽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요?”
힐끗 째려보다 피식 웃으며 말한다.
“어, 좀 있으면 떼돈 벌 것 같거든. 평생 놀고먹어도 될 만큼.”
“와··· 부럽네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희윤은 제법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다부진 몸매와 굵은 턱선, 딱 봐도 거칠어 보이는 양손. 아마 이 직업을 갖기 전에 분명 운동 같은 것을 한 건 아닐까 싶었다.
“내가 돈을 많이 벌면, 우리 귀염둥이 좀 떼 줄까?”
“예?”
“아직 국감 시작하려면 시간이 좀 남은 것 같은데~ 그 시간 동안 즐겁게 해주면 우리 귀염둥이 팔자 내가 고쳐주고?”
과연 젊은 여인의 입에서 나올 소린가 싶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이희윤. 사내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얼핏 보기에 매우 분한 표정이다.
“푸핫! 자존심 상해? 네까짓 게 상할 자존심은 있고?”
“······”
“내가 대충~ 계산해보니까 한 조단위는 훌쩍 넘지 않을까 싶던데?”
직원이 매우 놀란 표정을 짓는다.
“호호호, 감이 안 오지? 어때? 누나한테 막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직원이 비릿하게 웃으며 은색 쟁반을 덮고 있던 스테인리스 뚜껑을 열며 말했다.
“천우진 회장님은 분명, 백화점 하나만을 약속하셨습니다만.”
열린 뚜껑 속에는 군용대검과 함께, 붉은색의 천 조각이 함께 들어있었다. 이희윤은 순식간에 사색이 된 얼굴로 뒤로 물러서려 했다.
군용대검과 붉은 천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천우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군용대검을 내리찍는 것 같은 환상이 보일 정도로 공포에 질린 그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로 달려가는 이희윤, 문을 열고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데,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문 앞에는 이재형이 부드럽게 웃으며 서 있었다.
“오랜만이다?”
당황은 짧았다.
살기 위한 본능 때문인지 얼른 소리치려는 그녀의 복부를 사정없이 걷어찬 이재형.
“끄읍!”
그 충격으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간 이희윤, 그리고 이재형은 따라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왜··· 도대체 왜!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
이재형이 웃으며 품에서 SKY팟을 꺼내더니 하나의 음성파일을 재생시켰다.
-흥! 내가 백화점 하나만 받자고 이 짓거리를 할까? 어차피 우리 아버지 죽으면 유산은 다 내꺼야! 얼추 20조는 되던데 그걸 홀라당 넘기라고? 웃기는 소리!
“천우진씨가 널 믿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
***
국정감사가 시작되기 전, 백철웅이 보온병에서 따뜻한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아 고맙습니다.”
“예, 회장님. 장미는 꺾였습니다.”
“그래요?”
“예, 까마귀가 장미를 좋아하더군요.”
장미는 이희윤, 까마귀는 이재형을 말하는 듯싶었다.
웃으며 차를 마시다 물었다.
“보도자료는 뿌렸나요?”
“예, 회장님.”
“석간에 낼까요?”
“글쎄요··· 언론사들도 삼현 쪽에 빨대를 꽂아 놓은 상황이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삼현뿐 아니라 재계의 기둥 전경련이 모두 언론사에 압박을 넣고 있을 거다. 그러니 우리가 준 보도자료를 보도할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인터넷’의 힘을 모른다. 전 세계 최초로 우리 SKY통신이 ADSL통신망을 깔았다. 초고속 인터넷 세상이 열렸다는 뜻이다.
“직원들 파일 변환은 잘하고 있답니까?”
“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희윤에게 가져온 장부.
그리고 이희윤은 보기보다 똑똑하게도, 이건 그놈의 비밀 무기쯤으로 보이는 것도 가져왔다.
“아마 오늘 이후로, 인터넷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저들은 깨닫게 될 겁니다.”
슬쩍 시계를 보니 9시 50분.
나는 늦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국감장으로 향했다. 나보다 먼저 온 정치인 놈들이 나를 죽일 듯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굳이 할아버지까지 이 자리에 앉히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세탁기를 돌려봐도 사채업자 출신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당연히 할아버지는 때가 많이 탔다.
할아버지도 인정하고, 나도 인정한다 나라고 때가 없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지만.
한국에는 그런 말이 있다.
문제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로 삼으면 문제가 된다는 말.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그 어두운 과거를 문제 삼지 못하게 하면,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야 거기, 여기로! 각도 잘 맞추고!”
국감장 안은 어수선했다. 생방송이 10분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기에 이해 할 수 있었다. 지상파 3사는 물론, 해외에서도 관심도가 높은지 정말 수많은 중계 카메라들이 보였다.
먼저 앉아 있었거나 새로 들어오는 정치인들 모두, 얼마 전 이건의 저택에서 불타는 파티를 했던 놈들이었다. 우습게도 무서워 이건에게 풀지 못한 분노를 나에게 풀어놓고 싶은 모양이다.
여유롭게 SKY 식품에서 생산하는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그저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뭔 놈에 허례허식이 이리도 많은지, 10시가 땡 치자마자 시작한 국감은 30분이나 ‘신문인’ 단의 소개와 인사로 시간을 끌었다. 절로 짜증이 나지만 애써서 참았다. 놈들이 원하는 것은 나의 짜증일테니까. 그러고도 몇분이 더 흐르고 나서야 시작되었다.
내 선서가 끝나고, 먼저 신문인 석에 앉은 인물은 정호영 4선 의원.
“청문회 시작전부터 증인의 얼굴엔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더군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개소리로 포문을 연다.
“SKY그룹의 폐해가 얼마나 깊으면 이런 청문회까지 열겠습니까? 그런데 반성은커녕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다니요?”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죄가 없고, 부끄러울 일 없으니 반성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 죄가 없어? 지금부터 내가 증인의 죄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증인은 어떻게 SKY그룹을 만들었습니까?”
“돈을 벌었고, 회사를 샀습니다.”
“돈은 어떻게 벌었습니까?”
“투자를 통해 벌었습니다.”
“증인의 현재 나이는 만으로 19살입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일순간 회장에 소요가 일었다.
너무 어린 나이 때문이었다. 아마 그 점을 노리고 굳이 ‘만’나이를 물어보았을 터. 어차피 이 회장에 할아버지와 우리를 따라온 백철웅 정호석을 빼고는 우리 편이 없었다.
“증인은 언제부터 투자했습니까?”
“1996년도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세요!”
“1996년 6월쯤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학생의 신분이었습니다. 맞습니까?”
“학교는 자퇴하였으니,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미성년자였다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소리를 꽥꽥 지르는 게 꽤나 시끄러웠다.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저 꼬라지도 보기가 싫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답변이나 하세요!”
답변을 재촉하지만, 난 내 페이스대로 물었다.
“정호영 신문인께서 제게 자질을 물으셨습니다. 저는 여기 앉아 계신 신문인께서 신문인의 자질을 가졌는지 궁금합니다.”
“어허! 국민들이 뽑아주신 국회의원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가 자질이 없다면 과연 누가 신문인 자질에 어울립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답변이나 하세요!”
샤락, 샤락.
나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서류에서 정호영의 이름을 찾았다. 백철웅은 센스 있게, 신문인들의 순서대로 서류를 세팅해 주었다.
“1992년 삼현중공업 울산공장 건설 허가 명목으로 2억원, 같은 해 삼현생명 보상문제를 무마시켜주는 명목으로 2억원······”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사색이 되어가는 정호영.
“그만그만! 증인은 질문한 것에 대답만 하세요! 이상한 소문 퍼트리지 말고!”
“대충 정호영 신문인의 비리 내용을 보니 총액 40억 정도가 훌쩍 넘어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삼현과 연루되어 있죠, 과연 정호영 국회의원 당신이 신문인의 자질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위원장님, 비리로 점철된 정치인의 신문을 거부하겠습니다.”
내 발언에 국감장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고개를 돌리니 백철웅이 밝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사인을 보내온다.
“아닙니다! 이건 억측입니다! 국민 여러분 저 서민의 피고름을 뽑아먹던 사채업자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정호영이 카메라에 호도한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직, 한 발 남았다.’
겨우 국감장에서 비리 장부의 내용을 읊는 게 끝이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비리 장부가 저격총이었다면, 이제 미사일이 한 방 쏴줄 차례니까.
굳이 할아버지가 이 증인석에 앉을 필요 없게 말이다.
< 제 75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