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4화. >
세상은 SKY를 욕하느라 분주하지만, 오히려 SKY와 대한종합금융 그룹은 평소와 같았다.
직원들의 가족이 염려 한다고 들었지만, 오히려 직원들은 가족에게 큰소리 치며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이미 국세청과 검찰의 검사에서도 깨끗함이 여실히 드러났으니 믿는 것이었다.
또, 불안에 떨거나 뉴스에 뭔가 의혹이 나오면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 입원하는 일반 재벌들과 달리 할아버지 천혁수 회장과 나, 천우진은 다른 모습을 취하니 더욱 신뢰하는 것 같았다.
“신제품 발표,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실무진들이 의아한 모습을 보인다.
현재 이미지가 수직하락하고 있는 가운데, 강수를 내놓기 때문이다.
두번째 스카이 로고가 선명한 신제품은 바로 휴대폰이었다. 직접 연구 개발하고 유명 휴대폰 모로로라와 제휴를 맺어 생산한 휴대폰.
이름하야 SKY슬라이드.
여타 폴더 형태의 뚜껑을 열어 다이얼을 누르는 방식과 다르게 화면을 아래서 위로 밀어 올리면 숨어 있던 다이얼이 등장하는 방식.
게다가 SKY특유의 심플하며 모던한 디자인이 유독 눈에 띄었다. SKY전자의 임직원들 중 특히 여성들은 해당 휴대폰이 출시되면 무조건 자신이 먼저 살거라고 벌써부터 소문이 자자하다 들었다.
“으음··· 이미지 쇄신이 끝난 뒤에 출시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얼핏 괜찮은 얘기 같았다.
그러나 난 지금 화제성을 더 이용하고 싶었다. 결국 정치인들의 얕은 수 따위는 얼마든지 헤쳐나갈 자신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
“강행합니다.”
삼일 뒤로 예정되어 있는 국정감사.
그러니 예정대로 이틀뒤에 프레젠테이션을 하는게 아주 이상적이라고 생각되었다.
프레젠테이션 연출 과정을 바쁘게 회의했다. 마케팅 부서와 홍보팀까지 총 동원되어 연출적으로 어떤 것이 더욱 극적인지에 대한 회의가 주를 이루었다. 한창 바쁘게 회의를 이어나가는 중에 품 속 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실무진들에게 알아서 진행하라는 손짓을 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기다리던 전화기에 받은 것이다.
“여보세요.”
-나야.
누가 들으면 아주 친근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연인이거나 혹은 그 전 단계인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그런. 미래에는 이것을 썸이라 부르지만 어쨌든, 통화 상대는 이희윤이었다.
“그래.”
-지금 아버지 집무실에 들어왔어···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위치를 빨리 말해!
조용하게 소곤거리는 목소리지만 몹시 다급해 보이는 태도였다.
이희윤과 통화를 하는 이유.
그것은 이건 그놈이 가지고 있을 정치인들의 비리 장부와 함께, 대한민국 기업집단들의 다양한 더러운 비밀들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가능하다면 무기로도 만들고 싶었다.
며칠 전.
이건의 저택에서 정치인들의 광란의 파티가 일어나던 밤. 서울 외곽에 마련된 천가의 안가에서 나는 이희윤과 만남을 가졌다.
“네 오빠, 동생이 없으니 이제 이건 만 없다면 삼현은 네 손에 들어가게 될 거야.”
“무, 무슨··· 우리 아버지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거야?”
“이건이 살아있다면, 삼현에 네 지분이 있을까? 이건이 과연 너에게 삼현을 물려줄까?”
이건의 자식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에게 불신을 품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건의 자식교육 방식은 약육강식과 순종. 자신의 권력을 결코 자식에게도 허락하지 않던 영조와 같은 인물이다.
이희윤도 이미 충분히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입술을 깨물 뿐이다. 그들이 가진 이건에 대한 신뢰가 그정도인 것이다. 언제나 자식들에게 불안감만 조성하는 철면의 경영자.
게다가 그녀가 오자마자 건네 받았던 서류에는 현재 SKY의 자본력과 삼현의 자본력을 보여주는 서류였고, 찰리 박이 일목요연하게 작성한 삼현그룹 적대적 M&A방안이 적혀있는 서류였다.
머리가 있다면 삼현은 결코 스카이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테고, 재벌가의 여식답게 경영쪽으로도 공부 했을테니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터.
“자, 생각해봐 네 오빠 이재영은 반병신이 되었고, 동생 이재현은 요단강을 건넜어, 그럼 남은게 누가 있어?”
“나지···”
“그래, 그런데 아쉽게도 이건이 여자 경영가를 믿을까? 아무리 제 핏줄이라지만 널 믿을까? 아니면 차라리 첩실의 자식 이재형을 믿을까?”
“······”
내가 손짓하자 김장원이 비디오플레이어를 실행시켰다. 내 어깨너머 TV에 이재형이 이재영 앞에 서 있는 장면이 재생되었다.
-끄아아아아악!
그 잔인한 장면에 이희윤이 입을 떡 벌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저 이재형을, 네 아버지의 심장에 비수를 꽂던 그 이재형을 넌 믿을 수 있을까? 너와 나눠 갖느니 모든걸 가지려 할 것 같은데?”
“저, 저거 사실이야?”
“거짓을 말 할 필요가 있나? 당장 남종현에게 전화로 물어 봐.”
이희윤이 황급히 자신이 들고왔던 작은 백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안 실장! 최근에 이재형이 온 적 있어?”
통화 상대는 제2비서실장이였다.
남종현에게 전화하기는 뭔가 껄끄러운게 있는 듯 보였다.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온 적이 있는지 없는지! 또, 우리 오빠가 다친 것에 그 새끼가 연관되었는지나 말해!”
탁.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닫은 이희윤이 날 올려다 본다. 표독스러운 눈으로 묻는다.
“왜, 이재형을 살려줬어?”
어깨를 으쓱이고 편안한 표정으로 시가를 태우다 말했다.
“그저 거래를 했을 뿐이지.”
“거래?”
“그래, 지금 너와 내가 하고 있는 것 처럼 말이야.”
“······”
두 눈에 고민이 스친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네게 제시하는 조건은 더 좋아, 이재형에게는 ‘죽음’을 택할 것이냐, ‘삶’을 선택할 것이냐 두가지만 쥐어주었거든.”
무슨 말이냐는 듯 날 빤히 쳐다보는 이희윤.
“그런데 너에게는 살려주는 것과 더불어 돈까지 주겠다는 얘기야, 물론 거래에 응했을 때 말이지.”
내게서 뭘 느꼈을까? 최대한 무덤덤하게 얘기하는 중이었는데 어쩐지 이희윤의 떨림이 심해졌다. 하얗던 피부가 이제는 창백하게 보일 정도다.
아마 지금쯤 이희윤의 머릿속에 백치가 되어 악몽에 시달리는 제 오빠의 모습이 오버랩되고 있을테다.
“아, 참고로 네가 앉아 있는 그 의자에 이재영이 앉아 있었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이희윤.
나는 들고 있던 군용 대검을 망설임 없이 내려 찍었다.
“꺄악!”
본능적으로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 다리를 쫙 벌린다. 군용 대검이 그녀의 가랑이 사이 빈 곳을 찍고 의자를 뚫어버렸다.
***
이건의 집무실에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 오직 이건만이 앉을 수 있는 책상의 의자를 치우는 이희윤.
“와, 왔어.”
-카펫 들춰봐.
천우진의 설명에 따라 카펫을 들추니, 음푹 파여 있는 손잡이가 보였다.
-손잡이가 있지? 그걸 들어 올려, 그럼 뚜껑이 열리듯 열리면서 계단이 나타날거야.
끼이이이익.
경첩이 오래되었는지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마치 접근을 불허하는 것 같은 어두운 지하가 드러난다.
-내려가.
침을 크게 삼키고는 보이지도 않으련만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계단을 내려간다.
어두웠지만 계단을 따라 작게 발광하는 형광등이 있어 어렵사리 내려왔다.
벽면을 손으로 더듬다가 뭔가 익숙한 질감에 꾸욱 힘을 주어 눌러본다.
탁.
주광색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고, 커다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 문이 있어.”
-열어.
“못 열어.”
-왜?
“다이얼 방식의 잠금장치야.”
영화에서 보면 도둑들이 귀를 금고에 대고 열심히 돌리는, 그런 방식의 잠금장치. 그녀의 말에 수화기 너머 천우진은 잠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시발···”
그럴수록 이희윤은 불안했다.
이건의 집무실에 들어오기 전, 분명 가사도우미와 눈을 마주쳤다. 해당 가사도우미를 불러 경고를 했지만, 그래도 못내 불안했다.
얼마의 침묵이 흘렀을까? 돌연, 천우진이 숫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19, 72, 3, 28, 220.
“뭐, 뭐?”
-돌려, 불러준 숫자 순서로.
다라락, 틱.
다라라라락, 틱.
철컥.
우우우웅.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너무커 이희윤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여, 열렸어.”
-가져와.
***
탁.
슬라이드 휴대폰을 접었다.
출시 전이지만 난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내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있는게 티가 났을까? 정호석이 밝은 표정으로 말한다.
“잘 처리된 모양입니다.”
“네, 그렇게 되었네요.”
“비밀번호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삼현의 직원이라면.
아니 정확히는 삼현 일가의 최측근이라면 반드시 알아야할 삼현가의 역사가 있다.
그중 하나.
이건의 아비, 삼현물산으로 시작해 커다란 그룹사를 일군 입지전적인 인물, 이일용에 임종.
1972년 3월 28일 22:00분.
그리고 그날을 시작으로, 삼현가엔 피바람이 불어왔다. 모두가 그 피바람을 일으킨 주인공이 이건이란 사실을 알고 있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이건의 시린 칼날이 제 목을 꿰뚫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하여튼, 지겹도록 외웠던 삼현 일가의 역사.
그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줄은 몰랐는데, 기분은 솔직히 좋지 않다. 전 삶과 더불어 무려 30년이 훌쩍 지났던 시절에 했던 공부가 아직도 떠오른다는 사실에 말이다.
“뭐, 다 아는 수가 있죠.”
의문가득한 표정을 짓는 정호석, 그러나 그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은 없다. 전 삶과 과거의 내용을 모두 설명하기엔 납득 할 수 있는지 미지수니까.
“이재형, 부르세요 마무리 짓자고.”
“예, 회장님.”
나는 사람을 불신한다.
그게 특히나 내가 보고 경험했던 삼현가의 인물이라면, 이희윤이 순순히 내 말을 따른다?
절대 그럴리 없다는 것을 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예정되었던 SKY전자의 신제품 발표회.
여느때보다 더욱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발표회 바로 다음날 국정감사가 예정되어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천우진 회장님! 타타다우 인수 과정에서 불법 로비가 있었다는데 사실입니까?”
“SKY인베스트먼트 뒤에 미국의 거대 자본이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천우진 회장님이 미국과 한국, 이중 국적을 소유하고 계시다는데 사실입니까?”
“SKY인베스트먼트는 물론, 대한종합금융그룹도 사채업 시절 서민들의 피고름으로 일군 기업이라는데 동의하십니까?”
역시 한쪽으로 치우친 기사들을 뽑아내던 언론 답게, 혓바닥이 칼과 같다. 어느 질문 하나 선의가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나는 떳떳하다 외쳐도 되겠지만, 일부러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몸으로 밀어오는 취재진들의 힘은 과연 우리 SKY가드의 경호원들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나는 편안하게 대강당으로 향했다.
한국 언론들과 다르게, 외국의 언론들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굳이 내게 달라붙어 질문을 퍼붓지 않았다.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SKY전자의 발표지, 비리에 얽힌 국정감사 따위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
“SKY는 지금, 또 한번의 도약을 준비합니다. 여태껏 없었던, 상상하지 않았던 새로운 디자인의 셀룰러 폰을 소개합니다.”
내 외침과 함께, 대강당이 암전되고,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무용수들이 무대에 올라 저마다의 춤 선을 자랑한다.
그 모든 춤 선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위, 아래.
오른쪽 왼쪽.
두 명의 무용수는 완벽하게 대비되는 움직임을 표현했다. 이번 SKY슬라이드 폰의 핵심이다.
무용수들이 입고 있는 옷 또한 의도한 것이다. 슬라이드 폰에 적용할 색상들이었다. 은색, 혹은 검은색. 단조로운 색상들만 가득했던 휴대폰 시장에 우리 SKY는 조금 더 단가가 올라가더라도 새로운 색상을 출시 할 것이다.
쾅!
웅장한 울림에 다시 한 번 무대가 암전되고.
그 옛날 유명했던 CF의 한장면 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새하얀 분장을 한 남녀가 마주보고 서 있다.
쿵!
음악에 맞춰 여자가 남자에게 완전히 안겼다. 그러곤 여자가 남자의 양 손을 지지대 삼아 그대로 일어선다.
팟.
무대가 암전되고 이윽고 스크린 가득, 색색 물방울이 퍼져나가다 끝내는 휴대폰의 형태를 갖춘다. 그리고 휴대폰에 숨겨졌던 다이얼이 드러난다.
[ SKY, 세상에 없던 디자인. ]
문구를 끝으로 프레젠테이션은 끝났다.
100마디 말 보다 나는 화면으로 보여주기를 결심했다. 심금을 울리는 프레젠테이션, 오늘은 타이밍이 아니다.
임팩트.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아마 내일 국정감사가 시작되면, 적어도 한국에서 SKY를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다. 아마도 모두가 SKY의 제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지 않을까?
< 제 7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