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2화. >
이건의 저택에는 여야 할 것 없는 많은 정치인들이 모였다. 이재현은 죽고 이재영은 요양을 위해 사라진 상태. 저택의 별관은 거의 비었다 시피했고, 덕분에 저택의 별관 거실을 통째로 파티룸처럼 꾸몄다.
입장하는 재벌들마다 ‘호오’와 같은 작은 탄성과 함께 대접이 제법 마음에 드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고, 김대표.”
야당 대표의 아는체에 여당의 대표가 피식 웃으며 마주 악수를 받는다.
“쯧, 이거뭐 정치인 단합대회도 아니고 여기 다 모였구만, 얼굴보기 힘든 분들도 모이셨어?”
“쯧쯧 그 서류 보고도 강짜 부릴놈이 어디있겠어?”
평소 자주 부딪히는 사람들 답게 숨김 없는 얘기를 터 놓았다. 바깥에 얘기가 퍼진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지금 이곳은 삼현의 저택이었으니 굳이 숨기지 않았다. 솔직히 이제와 숨기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는 것을 그들 모두는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대충 올 사람들은 다 온 것 같은데?”
한 노쇄한 정치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 사람 다 왔으니 이제 초대한 주인을 불러오라는 통보와 같은 말이었다.
또각, 또각.
이희윤이 계단을 내려왔다.
“오셨어요 어르신들?”
모두 그녀의 미모에 작게 감탄했다.
20대 초반의 미녀가 우아한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무엇보다 노출이 많은 드레스에 그녀의 투명한 피부가 고스란히 드러나기에 정치인들은 모두 자신이 남자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자연스럽게 고개숙이는 그녀의 몸을 훑는다.
“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무료하실까 염려 돼 애피타이저를 준비했습니다.”
짝!
말과 함께 이어진 박수에, 이희윤이 내려왔던 2층에 여러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치인들은 짐짓 무표정한 얼굴을 지으며 시선을 옮기지만, 이내 그들의 얼굴은 파르르 떨렸다.
사전에 취향조사가 확실했는지 다양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성들이 줄지어 계단을 내려왔다. 이희윤이 시상식 연예인과 같은 모습이었다면 내려온 여인들은 미스코리아들이 저마다 수영복을 입고 본인의 아름다운 태를 자랑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크흠, 이 회장이 아무래도 작정을 한 모양이군.”
여당 당대표의 말에 정치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조했다. 그러나 싫어라 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인 하나에 젊은 여성이 둘.
이건이 이희윤에게 지시했던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노괴들을 구워 삶아 놔.’
짧은 내용이지만 어떻게 해야 늙은 사내들을 구워 삶을 수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이희윤.
“애피타이저는 어디까지나 애피타이저일 뿐입니다 어르신들.”
짝짝.
두번의 박수 소리와 함께,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와 007 가방을 한 켠에 잘 쌓아 둔다. 그리고는 그중 하나를 개봉해 정치인들에게 보여준다.
가방 안에는 누렇게 빛나는 황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
샤락, 샤락.
이건의 저택으로 들어간 모든 인물들의 사진을 하나씩 하나씩 넘겨보며 얼굴을 확인했다.
“아주 지랄들 났네요잉.”
시의적절한 김장원의 말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TV만 틀었다 하면 서로 못 물어뜯어 안달인 정치인 놈들이 야합하고 있으니 웃길 수밖에.
게다가 놈들보다 전에 이건의 저택에 들어간 여인들을 보건데, 대충 뭐 하고 놀지도 파악이 되었다.
“으따, 노인네들 아직 서기는 한 답니까?”
김장원의 이어진 말에 정호석이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아냈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사린 모양이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대놓고 웃어버렸다.
“하하하,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그렇다잖습니까?”
“암만 그랴도 그렇지··· 워따 이 어린아들 보십시오··· 손녀라고 해도 믿겄는디 캬~ 이런 아그들이랑 그짓거리가 될랑가 모르겄네잉.”
오늘 이후로 정치권은 분명 어떤 모션을 취할 테다. 대통령이 내 편을 들어주겠지만, 지난번과는 사정이 다르다. 방산은 이미 벌려놓은 일이니 대통령이 날 비호하는 리스크를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두려우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어차피 깨끗한 SKY다.
죄가 없으면 죄를 만드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살지만, 그것도 아무에게나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국정감사라도 열 모양이네요, 대한종합금융그룹, 그리고 SKY까지··· 대충 언론에서 기사 뿌리고 정치인들은 철저하게 밝혀내겠다며 설레발치고, 국정감사 열리고 이미지 실추시키고··· 하! 너무 뻔한 얘기네요.”
내 말을 정확히 이해한 모양인지 정호석 김장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백철웅도 등장했다.
“늦었습니다 회장님.”
“아니에요, 이제 막 시작하던 참이라. 할아버지는 잘 쉬고 계신가요?”
“예, 루시양과 샴페인을 즐기고 계실 겁니다.”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할아버지가 나 대신 루시를 접대해주고 있지만, 사실 본인이 즐거워서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
손님이라고 먼 타국에서 왔는데 대화도 제대로 나누기 쉽지 않은 상황이니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백 사장님, 저번에 보니까 ‘안기부’쪽이랑 연이 있는 것 같던데요?”
“아, 예··· 그랬습니다만 현재는 아닙니다.”
“아아 올 초에 국정원으로 바뀌었죠?”
“예, 대대적인 인사개혁이 단행되었습니다.”
정호석이 가져왔던 사진들을 백철웅에게 건네며 물었다.
“그치들 구린 구석 다 캐오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으음··· 죄송합니다 회장님 확답이 어렵습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정계에서 나름 방구 좀 뀌고 다니는 놈들이니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빠른 시일 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안함을 표하는 백철웅.
다시 고개를 돌려 김장원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이건 침실에 침입할 때, 어렵던가요?”
“아따, 쉬웠습니다만··· 지금은 저놈들도 대구빡이 있다면 쪼까 단도리를 쳐놨지싶은디요.”
절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경계심이 극도로 올라와 있을 이건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내게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둘 중 뭘 고를까···”
원래는 세 개의 선택지가 있지만, 조금 전에 생각이 바뀌었다. 대대적인 이미지 공격을 오히려 제대로 이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저번 국세청과 검찰의 조사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큰 판을 벌릴 것 같으니 놈들의 계획에 그대로 따라주고 싶으니 하나의 선택지는 배제.
그럼 둘이 남았다.
“흐흐, 그냥 다 해불믄 되지 않겄습니까?”
“하하하하, 명답이네요.”
명답이다.
전부 다 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하나의 선택지는 과연 뜻대로 될까 싶지만 혹시 모르니 도전해보고 싶은 의욕이 샘솟는다.
요즘 들어 부쩍 손만 대면 다 되니 재미가 없던 찰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흥미롭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
집에 들어오자마자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친 이건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 찰나. 방으로 드레스를 예쁘게 차려입은 이희윤이 들어왔다.
“그래, 천우진 그놈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것 같더구나.”
“······”
“쯧쯧, 쓸모없는 것들··· 나가 봐!”
“네··· 아버지.”
자신을 보지도 않고 옷 갈아입는 것에 집중하는 이건이 몹시도 미웠던 이희윤이지만, 한마디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걷는 걸음걸이에 구둣발 소리가 더욱 큰 것이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딛고 있음이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하이힐을 벗어 대충 집어던져 버리는 이희윤.
“시바아아아아아아아아알!”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보지만, 이 넓은 집구석에 그 욕에 반응할 인물은 없었다. 그저 미친년이 또 지랄하는구나 생각할 터.
드레스를 찢듯이 벗어 던지고 플라스틱 우리 안 햄스터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해바라기씨를 열심히 씹고 있는 햄스터를 손을 넣어 꺼냈다.
한창 바쁘게 입을 움직이던 햄스터가 해바라기씨를 놓고 발버둥쳤다. 본능적인 어떤 위혐을 느낀 것 같았다.
성큼성큼 걸어 어째서인지 비닐이 가득 깔려있는 책상위에 앉은 이희윤. 문구용 가위와 커터칼, 조각칼 따위부터 목재를 자르는 톱이나 작은 손도끼등, 별의별 공구들이 가득한 책상, 정확히는 작업대 위.
도마와도 비슷한 크기의 목재 판 위에 햄스터를 올려놓는다. 햄스터는 도망도 가지 않고 양손을 가슴께로 모으고 가만히 이희윤을 올려다본다. 파르르 떨리는 수염이 햄스터가 긴장하고 있음을 알린다.
막 손을 뻗어 도구를 선택하려는 찰나.
삐리리리, 삐리리리.
시끄러운 벨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힌다.
“에이, 시발!”
이희윤은 다시 햄스터를 왼손으로 쥐고 전화를 받았다.
“누구야?”
전화에도 고스란히 인성이 드러난다. 자신의 아비가 자신에게 직접 전화할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아비를 제외한 모두가 자신의 아랫사람이라 생각하는 그녀의 태도가 드러난다.
-여전히 매너가 없네.
“천우진?”
-목소리는 기억 하나 봐?
기이한 표정으로 왼손에 들린 햄스터를 바라보며 말한다.
“왜, 갑자기 내가 생각났어?”
목소리 톤도 갑자기 급격하게 바뀌었다.
-좀 볼까?
“어디서?”
-차를 보내지.
“지금?”
-왜, 싫은가?
햄스터를 한번 쳐다보고, 자신을 비추고 있는 전신거울을 다시 한번 쳐다본다. 거울 속에는 전신에 돈을 쳐바른 아름다운 여인이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 좋아.”
-바로 보내지.
“30분 뒤에 나갈게.”
-일러두지.
전화를 끊은 이희윤이 햄스터의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는다.
“너는 운이 좋은 아이구나? 어머머, 그러고 보니까 네 이름도 안 지었다 그치?”
햄스터가 대답할 리 없으니 저 혼자 제 말에 맞장구를 친다.
“어이구, 서운했어요? 너는 오늘부터 럭키로 하자, 럭키야··· 오늘 럭키가 아야 할 뻔했는데 천우진 그 망할 자식이 도와주네? 럭키야 천우진 그놈도 아무래도 이 언니를 자빠뜨리고 싶은가 봐, 호호호! 사내놈들이 그러면 그렇지~”
방으로 처음 들어올 때와는 전혀 딴판이 표정으로 대충 던져 놓았던 드레스를 다시 입기 시작하는 그녀, 전신 거울에 허리를 좌우로 돌리며 태를 한 번 확인하고는 잠시 뭔가를 고민한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드레스를 안쪽으로 손을 넣어 속옷을 벗어버린다.
“아직 어려서 경험이 없을지도? 키킥.”
***
편안한 복장이 된 이건이 별채로 들어가자 이미 노인네들은 태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머저리 같은 것들.”
아무도 이건의 작은 읊조림은 듣지 못한 모양.
“오! 이회장님!”
“으응? 이회장님이 오셨어?”
몇몇 정치인들은 벌써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이래서야 제대로 일 얘기나 할 수 있나 모르겠지만, 이건이 원하던 것도 지금 당장 일 얘기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자, 이미 분위기도 이렇게 된 거 오늘은 모든 걸 내려놓고 즐깁시다!”
“캬! 역시 우리 이회장님이 화통하시구만!”
“흐흐흐, 저러니 재계 수장 자리에도 올랐지!”
어느새 이건의 곁으로 다가온 여인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건이 입고 있던 편안한 옷들을 훌훌 벗기기 시작했다.
이건에게서 시선을 옮겨 자신의 시중을 드는 젊은 여인에게 취한 노괴들은 싸늘하게 변한 이건의 얼굴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같은 시각.
2월 초 칼바람이 불어오는 겨울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맨살이 고스란히 드러난 드레스를 입은 이희윤이 천우진이 보내온 차량에 올랐다.
“아저씨, 우리 어디로 가?”
“회장님이 조용한 곳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오오~ 나 막 두근두근해.”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아~ 설레~ 어디 호텔이나 이런 데는 아니지?”
“네, 조용한 곳입니다.”
어쩐지 운전기사의 뒤통수가 음흉하게 느껴지는 이희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이 싫지 않은지 피식 웃어버린다.
“조용한 곳 좋지~ 우진씨 그런 취향이구나?”
운전기사는 대답이 없었다.
“뭐야? 사람이 물어보는데 재미없게.”
그것이 불만이었는지 불만을 표현해보는 이희윤이지만 여전히 운전기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야, 대답 안 하냐? 나 내릴까?”
콧소리가 사라지고 싸늘한 목소리로 변한 이희윤.
“아무나 쉽게 찾을 수 없고, 외부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운전기사의 말에 이희윤이 다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뭐야뭐야! 비밀스럽게~ 그런 데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거양!”
< 제 72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