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1화. >
정호석에게 이희윤이 끌려나가고, 뭣 같은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퍽 웃음도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정말 대단한 인간이다.
잠시 후, 이희윤을 쫓아낸 정호석이 돌아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직원들 교육을 더 철저하게 하겠습니다.”
“쯧,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입니다. 우리 SKY의 입지가 아직은 이 정도인 거죠, 직원들도 그렇게 느낄 만큼.”
비서들의 교육 얘기였다.
계급이 없는 사회가 되었지만, 직원들은 계급을 느끼고 자랐다. 눈에 안 보이는 천장은 분명 존재했고, 우리 비서들이 오늘 한 실수도 그 천장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재벌가의 여식, 그것도 대한민국을 호령하던 삼현의 여식이라는 소리에 이렇다 할 반항 한 번 제대로 못 한 것이다. 수행비서가 아닌 단순 비서이기 때문인 부분도 있다. 상대적 ‘서비스 마인드’의 교육을 위주로 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보여주면 될 일입니다. SKY의 위상을, 어쨌든··· 이건 그놈한테 전화 좀 연결해 주실래요?”
정호석은 익숙하게 전화기를 들어 올리고는 잠시 무어라 명령한 뒤, 수화기를 내게 건넨다.
-전화 받았소.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이제 와 화친을 요청합니까?”
-크흠, 내 여식이 마음에 차지 않았나?
“당신을 똑 닮아 꼴 보기가 싫더이다.”
-쯧쯧, 쓸모없는 것들.
“이건 회장.”
-혓바닥이 많이 짧아졌군.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회장, 회장 하니까 다 같은 회장 같습니까?”
-······
“사이즈가 다르잖아, 사이즈가.”
-이 놈이 뚫린 입이라고!
“좀 다른 참신한 방법을 통해서 방어를 해, 딸내미가 어디 술집 접대부도 아니고 그게 뭡니까? 쪽팔린 짓거리 좀 그만합시다.”
-이 놈아! 날 무너뜨리고 싶거든 대한민국을 상대해야 할 게다!
“착각들 하지 마, 네 놈들이 대한민국 전부인 것 같아?”
-기고만장하구나.
“전부면 어떻고? 상대하지 못할 이유도 없어, 명심해 곧 보자고.”
수화기 너머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리지만 개의치 않고 정호석에게 건넸다.
철컥.
그대로 전화가 끊기고 목을 한 번 돌리며 화를 가라앉혔다. 내가 화가 난 이유, 그것은 이건의 수가 너무 얕아서였다.
그래도 한때나마 동경했던 인물이, 완전한 윗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너무나 볼품없이 추락하는 모습에 치가 떨렸다.
“끝났군··· 끝났어.”
고개를 흔들며 뱉은 말에 정호석이 조심히 시가를 한 대 건넨다.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릇이 이렇게 작아서야.”
대접 정도는 될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종지 그릇이다.
그러니 이제는 좀 더, 빠르게 가도 되지 싶었다.
완전하게 정리하고, 내 삶에, 내 사업에 집중할 수 있게 말이다.
“찰리 박, 강기태 불러주세요.”
“예! 회장님.”
***
빠각!
휴대폰을 바닥에 던져버린 이건이 크게 외쳤다.
“왜 개 같은 놈들이 움직임이 없어!”
남종현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제 놈들끼리 회의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암암리에 전경련에서 비자금을 보내왔습니다.”
“얼마야!”
“총 4천억 원 규모입니다.”
“흥! 고작 이렇게 쓰려고 모은 게 아닌데···”
이건이 아쉽다는 듯 장부를 쳐다본다.
“황금보다 귀한 것들을··· 후우~ 헐값에 팔게 생겼구나.”
“지금이 그 황금만큼 귀한 시간이라 확신합니다 회장님.”
“쯧, 달달한 아부는 필요 없고, 여의도의 노괴들 오늘 초대해, 결판을 내야겠어.”
“예! 회장님.”
털썩 다시 회장실 소파에 앉은 이건이 담배를 입에 물어 몇 모금 태운다.
“언론사 놈들 당장 들어오라고 해.”
“예, 회장님.”
곧, 삼현그룹의 회장실에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언론사 오너들이 모여들었다.
“왜 기사가 없소?”
감정이 전혀 배제된 이건의 목소리에 언론사 오너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핀다.
“고조선일보 방경택 사장? 말해봅시다.”
“그, 아무래도··· SKY의 이미지가 있고, 또··· 청와대와 묘한 관계가 있다고 들어서···”
피식 비웃은 이건이 고개를 돌려 남종현에게 명했다.
“고조선일보에 들어간 우리 광고 얼마야?”
“예, 연에 110억 정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빼, 1원이 아까운 시국에 110억은 쯧.”
다급한 표정의 방경택이 얼른 말했다.
“회, 회장님! 지금 기자들 엄청 뿌려 놨습니다. 곧 좋은 소식 있을 겁니다! 조금만 말미를 주십시오!”
쾅!
이건이 테이블을 세게 내리치자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찻잔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뜨거운 차가 허벅지나 종아리 등에 튀었지만 언론사의 대표들은 움찔 놀라기만 할 뿐, 이건의 눈치를 보느라 아픔을 표현하지도 못했다.
“네 놈들에게 갖다 바치는 돈이 해마다 수백억이야! 네놈들 잘하는 짓거리 있잖아? 정치인들이랑 배꼽 맞추고 하는 쓰레기 기사 뽑는 거, 그거 하라고! 내 말이 어려운가 방 사장!”
“아, 아닙니다 회장님.”
“배때기에 기름이 가득 차다 못해 머리에까지 기름이 꼈어? 이제 배불러서 우리 삼현이 주는 돈은 받기가 싫은게야!”
치욕스럽지만, 그것보다 그들에게는 돈이 먼저인지 누구 하나 불쾌함을 표현하지 못했다.
큰 한숨을 내뱉은 이건이 벼락같은 호통이 아닌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틀, 딱 이틀을 더 주지··· 그 안에 부정적인 기사를 써 내.”
““······””
“대중은 어차피 개돼지야! 네 놈들 언론이 펜대를 굴리는 대로 이해하고 믿는다고! 그래서 우리 전경련이 해마다 수천억이 넘게 네 놈들 목구멍에 돈을 쑤셔 넣는 거잖아? 돈을 받았으면 돈값을 제대로 하라고! 이해했어?
““예!””
다짐하듯 대답한 그들을 한번 쓱 둘러본 이건이 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뭣들 해? 빨리 기사 쓰러 가야지?”
“아, 예 회장님.”
후다닥 삼현 회장실을 벗어나는 언론인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남종현이 이건에게 말했다.
“회장님, 너무 몰아붙이시는 것은 아닙니까?”
“쯧쯧, 언론이 움직여야 여의도 노괴들의 그 갈대같이 흔들리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한쪽으로 쏠릴 게다.”
“아···”
치이익.
담배를 비벼끈 이건이 날카로운 눈으로 말했다.
“오늘 불참하겠다 얘기한 노괴가 있더냐?”
이건의 눈빛으로 보건데, 남종현은 불참 의사를 밝힌 정치인을 절대로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든 끌어내려 그의 정치 인생을 끝낼 터.
어쩌면 보안실 직원들을 동원해 숨통을 끊어 놓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없습니다.”
눈치 빠른 정치인답게, 이건의 부름을 거절하는 인간은 없었다.
“그래야지··· 개새끼들이면 개새끼답게 주인이 부르는데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야지, 안 그렇더냐?”
“그렇습니다.”
***
회장실의 열기가 뜨겁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삼현을 삼킬 궁리를 하느라 절로 열정이 샘솟는 모양이다. 가장 신나서 떠드는 인물은 바로 강기태였다.
“캬~! 회장님 시나리오 대로만 흘러가면 정말 명실공히 대한민국 재계서열 부동의 1위가 되겠습니다.”
찰리 박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이미 부동의 1위입니다. 상장하지 않은 계열사들까지 포함하면 어마어마하지요.”
맞는 말이었다.
전 세계는 지금 IT 열풍으로 때아닌 호황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일부분 거품이 끼어 있고, 그 거품이 추후에 사그라들었을 때, 경제 위기가 올 만큼 심화되고 있는 중이긴 했다.
당장 사명이 ‘00소프트’라 명명한 회사가 상장되면 미친 듯이 상한가를 치며 주가가 오른다. 무슨 회사인지, 어떤 소프트웨어를 만드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광기에 사로잡힌 투자자들은 그냥 ‘살’뿐이다. 그리고 그 욕망이 가득한 주식시장에서 돈을 버는 부류는 냉철하고 냉혈한 있는 놈들이다.
“요즘 수익률이 좋죠?”
내 질문에 강기태가 스륵,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어마어마합니다.”
미국 시장에 투자했던 3천만 달러.
그것이 공을 2개나 붙여서 돌아왔다. 정말 미친 수익률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고, 어떤 이에게는 ‘팔자를 고칠 만큼’의 돈 일지 모르지만, 강기태와 찰리 박은 덤덤할 뿐이다.
SKY인베스트 먼트가 굴리는 80억 달러도 거진 400% 이상의 수익률을 보이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강기태 본부장은 포트폴리오 올리세요, 이제 정리할 건 정리해야 합니다.”
“예, 회장님.”
“찰리 박은 오늘부터 삼현자동차 주주들을 만나보세요.”
“예, 회장님.”
“원한다면 두 배를 주겠다 살살 꼬시라는 얘깁니다. 그들의 마음이 흔들리게, 그리고 그 흔들림이 이건에게 전해지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정호석에게 물었다.
“전경련모임에서는 어떻게 했답니까?”
“삼현 측에 몰래 비자금을 전달한 것 같습니다.”
“규모는요?”
“4천억 원입니다.”
“영감탱이들··· 무슨 협박을 받았길래 곳간을 열었을까요?”
정호석이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서류를 내밀었다. 뭔가 확인을 하니 복사된 장부의 일부분이었다.
“조심스럽게 빼 오느라 아주 일부분만 가져왔습니다.”
그가 말한 조심스럽게란 ‘절대 걸리지 않을’이란 말이었다.
“아하, 삼현이 여태껏 가지고 있던 재벌 놈들의 더러운 구석을 긁은 모양이군요··· 일종의 동귀어진인 모양입니다.”
“예, 죽어도 혼자 죽지 않겠다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어쩐지 그 장부라는 게 탐났다.
전 삶.
단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장부.
그 누구도 그 장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오직 이건만이 입장 가능한 비밀 금고 안에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그 장부 욕심나네요?”
정호석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한다.
“가져올까요?”
분명 그는 할 수 있을 테다.
손을 들어 올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느새 시간은 오후 5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자, 퇴근들 합시다.”
강기태와 찰리 박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회장실을 벗어났다. 나는 자리에 앉아있는 정호석에게 말했다.
“장부 빼 오는데 얼마나 필요하실 것 같습니까?”
“넉넉하게 일주일이면 됩니다.”
“피해는요?”
“피해없게 하려고 일주일을 말씀드렸습니다.”
“좋네요, 진행하세요.”
“예, 회장님.”
정호석이 막 전화에 손을 뻗는 찰나.
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몸을 떨었다.
“그래··· 뭐? 그리고···”
정호석이 업무상 전화를 받는 찰나, 나는 퇴근할 준비를 끝냈다.
어쩐지 퇴근할 생각을 하니 루시의 얼굴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불쑥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찰나, 어느새 다가온 정호석이 낮게 날 불렀다.
“회장님.”
“네.”
“이건이 언론사 대표들과 만났고, 지금 그의 저택으로 여의도의 거물 정치인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언론사 대표들과 만났다라···”
언론사 대표들과 만나서 무슨 짝짜꿍을 했을지는 충분히 이해하겠다. 대충 SKY에 대하여 혹은, 대한종합금융에 대하여 부정적인 유언비어를 쏟아내라 지시했을 테다. 또, 정치인 놈들을 불러오는 이유는 얼마 전 놈들과 만남 이후, 별다른 행동이 없으니 오늘 제대로 결판을 낼 생각인 모양.
“급하네요, 이건.”
“예, 최후의 발악인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정호석의 말에 나도 공감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 복수의 끝이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안가로 김장원 사장 호출하세요, 퇴근은 잠시 미뤄야겠습니다.”
“예, 회장님.”
막 전화를 들어 올리는 정호석에게 말했다.
“아, 칼춤 출 준비 좀 해 놓으라고 하세요.”
잠시 멈칫거린 정호석.
그러나 이내 입꼬리를 쓰윽 올리며 말했다.
“대한민국이 유례없이 깨끗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워낙 썩은 곳이 많아서.”
< 제 71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