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0화. >
익숙하고도 침을 고이게 만드는 김치찌개 냄새를 음미하며 크게 한 수저 떠 올렸다.
호오, 호오. 입김을 불어 알맞은 온도로 식히고는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맛이다. 아산댁의 음식 솜씨야 두말할 나위 없이 최고였다.
반숙의 프라이를 찰보리와 현미 등이 섞인 잡곡밥 위에 비벼주고, 김 위에 밥을 얹었다.
옆에서 내가 하는 양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루시.
젓가락을 뻗어 찌개 속 꼭지만 떨어진 김치를 들어 올려 접시로 가져와 젓가락과 손을 이용해 쭉쭉, 길게 찢었다. 그리곤 그 김치를 김 위에 얹어진 밥에 얹었다.
“이렇게 해서, 한입에!”
찢은 김치 중 하나의 조각을 루시의 손 위, 김쌈에 얹어 주었다. 얼른 입에 넣고는 오물거리다 쌍 엄지를 치켜들어 나와 아산댁에게 보여준다.
흐뭇하게 웃던 할아버지가 물었다.
“그래, 루시 얼마나 머물다 갈 생각이더냐?”
“예정은 없어요, 충분히 즐길 만큼?”
“그렇구나, 숙소는 준비했더냐?”
“아니요, 그래서 말인데요 할아버지”
“오냐.”
“방 하나만 주실래요? 집에 빈방도 많아 보이는데.”
나와 할아버지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안 돼.”
“오냐, 편히 쉬다 가거라.”
“예?”
“자, 먹자.”
한동안 몹시 피곤할 것 같았다.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보는 루시가 어쩐지 얄밉게 느껴졌다.
***
으레 재벌가의 여식들이 그렇듯.
이희윤은 단 한 번도 갖고자 하는 것을 가지지 못한적이 없었다. 삼현이라는 거대한 그룹을 빼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이 가질 수 있을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천우진의 사진 위에 다리가 다 제거된 거미가 주둥이만 겨우 움직이고 있었다.
바늘로 거미를 찔러 들어 올리고는 천우진의 사진을 한참 내려다본다.
“너, 내가 가져야겠다.”
어렸을 적부터 제법 요녀의 자질을 타고난 그녀. 당장 아비인 이건도 이희윤의 기질을 알아보고 10대의 나이부터 유학을 보낸 것이었다.
‘문란하단 소리는 듣기 싫으니, 나가 있거라.’
국내에서 문란하게 놀면 소문이 안 좋다. 후에 시집갈 일에 방해가 될까 싶었던 이건의 선택은 옳다고 얘기하기도 옳지 않다고 얘기하기도 어려웠다.
처음엔 주변 경호원들에게 손을 대기 시작했던 이희윤의 마수는 일반인들에게 뻗쳤다. 유독 스포츠 선수를 좋아했었다. 열심히 관리받은 외모는 자연스럽게 혈기 왕성한 해외 스포츠 선수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테다. 거기에 재산까지 더해지면 그녀를 싫어할 남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 팩트.
“너도 남자지, 사내새끼가 다 거기서 거기지.”
그러니 이희윤은 자신이 넘쳤다.
남자를 꾀는 일 따위는 그녀에게 아주 쉬운 일이었으니까.
칙칙.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바늘에 찔려 고통을 느끼고 있을 거미에게 연기를 내뿜는다. 그러다 투명한 유리컵 안에 거미를 넣고는 그 안쪽에 담배 연기를 뱉어낸다.
“너는 얼마나 살아 있을래?”
그녀가 뒤집어 내려놓은 유리컵.
희뿌연 연기가 가득한 그 안에서 고통에 몸부림치고 싶을 거미. 그러나 아쉽게도 몸부림칠 다리가 없으니 바쁘게 입만 움직인다.
스륵.
자리에서 일어나 수없이 많은 플라스틱 채집통들을 쳐다본다. 온갖 종류의 곤충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다음 타겟을 고른다.
***
루시와 할아버지가 저녁 데이트를 즐기겠다며 바깥으로 나가고 나서야 한숨을 내 쉬며 잠시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확실히 아직은 여자와 지내기가 좀 껄끄럽다.
내가 아는 여인이라고는 안타깝게도 삼현 비서실의 여직원들, 삼현 여식을 담당하던 보안실 여직원들, 그리고 삼현가의 두 여식, 삼현가의 시집온 다른 재벌 집의 두 여식이 전부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전 삶은 생각할수록 진짜 뭣 같은 삶이었던 것 같다.
빠득.
절로 이가 갈렸다.
나라고 어찌 연애와 사랑이란 그 달달한 것을 모르겠는가, 보통의 회사원들이 그렇듯 회사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특히나 비서라는 업무 특성상 아침저녁, 심지어 새벽 할 것 없이 불려나가기 일수 였으니 더욱 그랬다.
“역시, 잘한 일이야.”
굳이 이재영놈의 성적능력까지 상실하게 만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이 맞는 것 같다. 아마 수행 비서놈들은 모두 날 칭찬하지 않을까?
쌀쌀한 늦겨울의 찬 공기를 마시며 2층 발코니에서 크게 숨을 들이쉬며 상념을 털어내는데 정호석이 다가와 할아버지가 가끔 즐기는 시가를 내민다.
“아, 감사합니다.”
“향이 좋습니다.”
확실히 향이 좋았다. 즐기지 않기에 조금 독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무렴 시가 주제에 인생보다 독하겠는가.
“이건 회장이 대현 총수를 만난 뒤 ‘전경련’ 모임이 오늘 저녁에 성사되었습니다.”
슬쩍 시계를보니 막 6시가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긴 한 모양이네요, 뒷구녕으로 수작질이나 하다가 직접 뭔갈 해보려는 모양입니다.”
“예, 지금 이건의 차량이 여의도에 진입했다고 합니다.”
“국회의사당이 목적인가 보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정호석이 옆에서 공손히 서 있으니 좀 불편했다.
“삼촌도 시가 한 대 태우세요? 퇴근했으니까.”
삼촌 소리가 나오고 나서야 자세를 풀고 편안하게 나의 맞은편에 앉는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시가를 손질하고 입에 문다. 손수 손을 뻗어 정호석의 고급라이터를 들어 불을 붙여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삼촌? 이건 그놈이 뭘 꾸미고 있을까요?”
“놈들이 하는 방식이랄게 별것 있을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정치인들 구린 구석 긁어서 협박 모략 질이나 하겠지, 전경련 놈들에게는 같이하자, 협동하자, 협작질 할 테고.”
씨익 입꼬리가 올라간다.
정확한 판단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 이건의 움직임이 예측 불가인 것은 아니다. 정호석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을 누구보다 이건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내가 모른다면 그거야말로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이희윤만큼은 정말 모르겠다.
설마 하는 그것은 아니길 바랐다.
정말 너무 짜치니까.
그런 유치한 방법이라면··· 제법 화가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쩐지 예상이 맞을 것도 같다. 자식새끼가 1초라도 인생에 도움이 된다면 망설임 없이 써먹을 인간이 이건 그놈이니까.
“너무 허접하잖아요, 안 그래요?”
정호석이 눈을 꿈뻑이다가 잘 모르지만 일단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저나 록펠러 아가씨가 참, 참하더라.”
굳이 저런 언급을 하다니, 나는 손을 들어 삼촌의 이어질 말을 제지했다.
“그 얘기는 거절하겠습니다 삼촌.”
“녀석···”
***
다음날.
평소와 다르게 일찍부터 출근했다.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집에 젊은 처자가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좀 불편했달까? 또, 유교적인 교육에 익숙한 입장에서 보았을 때 미국인의 어떤 자유분방함 다른 사람들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모습 등은 불편하게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아주아주 개방적인 루시와 문화적 차이 때문에 불편함이 크다는 얘기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니 문득 아침의 일이 떠올랐다.
시원한 오이냉국에 채소만 들어간 라이트한 비빔밥은 해장으로도 아주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 찰나. 숙취에 시달리며 식탁에 마주 앉은 루시를 바라보기 어려웠다. 두 개여야 할 눈이 분명 네 개가 되어 있기 때문. 누가 보아도 속옷을 입지 않은 모습이다.
의외인 것은 할아버지와 아산댁의 반응.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산댁 아주머니야 같은 여자이니 그렇다고 치지만, 할아버지는 무려 일제강점기 시절도 보내던 분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속옷을 착용하지 않은 여인을 보고도 아무런 데미지가 없다니 나만 시대에 뒤떨어진 이상한 놈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 내 상황을 눈치챘을까? 할아버지가 루시가 못 듣게 한국말로 말했다.
“쯧쯧, 이놈아 손님 불편하게 자꾸 쳐다보느냐.”
“아, 저도 모르게.”
“시대에 뒤떨어진 놈 같으니라고··· 쯧쯧.”
내가 할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세계적 혁신의 아이콘인 SKY그룹의 헤드가 이런 소리를 듣다니.
“어르신, 아직 혈기왕성해서 그렇죠.”
아산댁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할아버지.
루시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산댁이 잠시 나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한국말로 말했다.
“도련님, 정 불편하면 이따가 루시 양에게 따로 조용히 말할까요?”
“아, 아닙니다. 제가 시대에 뒤떨어진 거죠.”
“아니요, 생각하기 나름인 일이죠”
띵~!
엘리베이터 도착 알림음에 상념에서 벗어나곤 피식 웃어버렸다.
“확실히 할아버지는 난봉꾼이셨을 거야.”
“예?”
“아닙니다.”
문이 열리자 정갈한 모습으로 앉아 있어야 할 비서들이 어쩐지 불안한 기색을 내비친다.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 진다.
“무슨 일이죠?”
“아, 저, 그···”
가장 선임자이자 수행비서 직책의 김지연을 바라보았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여는 그녀.
“삼현의 장녀, 이희윤씨가 아침부터 찾아왔습니다.”
시계를 보니 이제 오전 10시였다.
도대체 몇 시부터 나와 있었다는 얘기일까.
“회장님의 출근이 늦거나, 나오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얘기했음에도 강짜를 놓는 바람에···”
대충 비서들의 사정은 알 수 있었다.
일반인이었다면 비서들은 아무리 강짜를 놓는다고 해도 허락하지 않았을 테다. 연락처를 받는 선에서 끝내고 후에 보고했을 터.
그러나 삼현의 장녀라는 그녀의 배경에 손을 쓰기 부담스러웠던 모양. 정호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비서들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그 어떠한 인물도 회장님의 허락 없이 감히 저곳에 발을 들이게 하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네, 네!””
서릿발 날리는 차가운 명령에 비서들이 잔뜩 긴장했으나 정호석이 틀린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기에 굳이 말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타일렀다.
“혹 비슷한 경우가 생긴다면, 먼저 여기 정 사장님께 보고하세요, 출입 허가 여부는 정 사장님이 결정 하실 겁니다.”
““네, 회장님.””
정호석이 만족스럽고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말했다.
“회장님, 안전상의 이유로 제가 먼저 들어가 방을 좀 살피고 나오겠습니다.”
워낙 전적이 화려한 이씨 핏줄을 믿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게다가 참신한 또라이인 이희윤이 왔다니 살짝 긴장도 되었다. 그러나, 똥개도 제집에서 삼 할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무려 SKY의 수장인 내가 내 집무실의 안전을 걱정한다는 것은 우수운 일이다.
피지컬 적으로 상대적 약자인 여자에게 긴장할 정도로 내 몸뚱이가 만만한 것도 아니었고, 바로 지근거리에 스페셜리스트인 정호석이 있으니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됐습니다.”
벌컥.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 여길 보고 저길 봐도 무기 따위를 숨길 수 있는 옷차림이 아니었다. 저런 원초적인 육체미에 평정심이 어긋날 만큼 날 허접스럽게 봤을까?
게다가 아침부터 루시를 보고 왔던 내게 이윤희의 육체미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
“뭐 하는 짓거립니까?”
대뜸 공격적으로 묻는 말에 손가락으로 굳이 제 몸뚱이를 훑으며 말한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돈에 홀려, 혈기에 홀려 제 년에게 환장하고 달려드는 다른 남자들과 나를 동일 선상에 두었을까? 미인, 미녀와 같은 칭찬 세례에 자신이 정말 대단한 경국지색이라도 된다 착각하는 것일까?
“뭐 하는 짓거리인지 물었습니다만.”
“잠시 시간 좀 내어주시겠어요?”
“보시다시피 옷차림에 신경 쓰기보다는 하루 일정이 빡빡한 사람이라 어렵겠네요.”
스륵.
겁도 없이 손을 뻗어 내 팔을 잡아끈다.
노골적으로 팔에 자신의 몸을 비비려 한다.
설마 이건이, 설마 했던 이건이 노렸던 것이 미인계라고?
“정신 차려 아줌마, 사이즈가 다르잖아 사이즈가.”
덜컥 굳어 부들부들 떠는 이희윤.
“걔, 걔는 유, 유전적으로··· 아냐! 걔도 의학의 힘을 빌렸을걸?”
사이즈란 말을 오해한 모양이다.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자격지심일까? 아니면 어제 맞닥뜨렸던 루시의 몸매를 벌써 스캔했던 것일까?
“뭐라는 거야? 정 사장님, 이 미친년 치우세요.”
“예, 회장님.”
정호석의 거친 아귀힘을 여인이 이길 순 없다.
“아악! 이거 놔! 내가 누군 줄 몰라? 천우진 나 봐봐! 안 예뻐? 어? 자빠뜨리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무슨 꿈을 꿨는지 모르겠는데, 그거 헛꿈 꾼 거야 가라, 너는 딱 보니까 술집이 더 어울리겠네.”
열린 문틈 사이로 내 말이 들렸을까?
““풉!””
비서들의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 제 70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