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69화 (69/458)

< 제 69화. >

이희윤.

전 삶 그녀를 부르던 별칭은 악녀였다.

그 밖에 쌍욕도 제법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캐릭터였지만, 완성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악녀의 얼굴을 보자니 조금 묘하다.

‘화상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예술을 한다는 종자들이 다 이희윤 같을 순 없었다.

고통과 고뇌가 곧 예술이 된다는 같잖은 핑계로 무장한 이희윤은 동물을 실험 재료로 사용했다.

처음엔 실험용 쥐로 시작해 날이 갈수록 인간에게 친숙한 동물들까지 마수를 뻗쳤다.

‘찍찍. 찍찍.’

‘아, 쥐는 3분 10초를 버텼네.’

‘캬아앙!’

‘고양이는 6분!’

‘깨엥 깨엥.’

‘개는 7분20초!’

원초적인 고통으로 시작된 그 시험들. 언제나 동물들은 그녀가 다가가면 본능적으로 회피했다. 도망쳤고 꼬리를 말았다.

종래엔 인간에게도 마수를 뻗쳤다.

다양한 감정표현이 가능하고, 같은 ‘종’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표정과 표현들, 그런 것이 그녀에게 어떤 희열을 주는 것 같았다.

‘채찍에 맞은 인간.’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

‘가족이 떠나갔을 때.’

‘재산을 잃었을 때.’

작품의 이름부터 악독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 과정을 감시하듯, 사진에 담아 저장하고, 그리고 싶은 부분을 그대로 가져와 그린다.

이희윤은 그런 악녀였다.

아마 지금은 동물 단계로 발전하지 못한, 곤충 단계에 머물러 있을 테다. 아직 머리가 여물지 않았으니까, 물론 나쁜 쪽으로.

“안녕하세요? 저는 삼현 이가의 장녀 이희윤이라고 합니다.”

굳이 앞길을 막아서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건 그놈의 뜻은 무엇일까.

아니면, 이건의 뒤를 이을 씨가 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이제 장녀가 삼현에 욕심을 내는 걸까?

“볼 일 있습니까?”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시간은 남아돈다.

SKY그룹의 모든 사장단은 유능했다. 철저하게 검증했고 미래에 이름을 날릴 경영자들을 데리고 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황금보다 귀한 내 시간을 이 여자에게 낭비하고 싶은 마음은 일절 생기지 않는다.

“우진!”

뒤에서 날 반갑게 부르는 약간은 어눌한 한국어.

뒤를 돌아보니 금발에 아름다운 백인, 루이지나 록펠러 루시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와 두 팔을 벌리며 내게 안겨 왔다. 그러고는 자신의 페이스로 그대로 뺨키스.

이희윤의 표정이 좋을 리 없다.

루시는 이희윤은 안중에도 없이 나만을 바라보았다.

“어쩐 일이에요?”

“호호, SKY의 새로운 발표가 궁금해서?”

그래, 이 정도는 돼야 황금 같은 시간을 쓸 가치가 있다. 이희윤 따위와는 가치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밥은 먹었어요?”

“아니요! 우진의 할아버지가 끓여주던 킴취쯰개가 생각나 며칠을 굶었다고요!”

보란 듯이 자신의 배를 팡팡 두들긴다.

“이것봐요, 배가 등가죽에 붙어버렸어! 이게 말로만 듣던 강제 다이어트일까요?”

“하하하, 어떡하죠? 우리 할아버지는 한국인을 기준으로 보자면, 요리를 못하시는 편이거든요.”

“맙소사! 믿을 수 없어요!”

“원래 김치찌개는 김치의 맛이 좌지우지하는 법이랍니다. 그리고 그 김치를 만드신 분은 바로 우리 집에 계시는 셰프님이죠.”

가뜩이나 크고 똘망한 눈망울을 과장되게 크게 뜨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 부근을 가리키며 말한다.

“보여요 여기? 침 고인 거?”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겨우 오후 2시 30분이 넘어가는 시점.

“흠, 늦은 점심일지 이른 저녁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면 가실까요?”

와락.

내 팔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잡는 그녀.

“좋아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이희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시간이 없어서.”

이희윤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얼굴을 붉혔다.

록펠러의 손녀.

무려 록펠러가의 손녀가 혼자 왔을 리 없다. 차갑게 이희윤을 지나치는 우리의 곁으로 덩치가 산만 한 사내들이 에워싼다. 자연스럽게 이희윤의 얼굴이 가려진다.

***

고개를 푹 숙인 이희윤은 치욕스러움에 손아귀를 꽉 쥐었다. 곧, 강당에서 취재진과 발표회에 참석한 귀빈들이 쏟아져 나왔다.

널따란 복도 한 켠에 홀로 고립된 것 같다는 착각이 들 만큼, 사람들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자신의 아비 이건의 말이 떠올랐다.

‘밥값을 하거라.’

‘네?’

‘네가 밥값을 할 때가 되었다는 얘기다.’

동생 이재현이 죽고, 다시 떠난 유학길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보기 싫다 생각했던 자신의 오빠의 처참한 몰골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떨어지는 차가운 명령에 그녀는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건이 남겨줄 콩고물 때문이지 순종적인 성격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되죠?’

‘내 누누이 말했다. 너희들의 결혼은 내가 결정한다고.’

‘벌써 결혼을 하라고요? 저 이제 겨우 23살이에요!’

툭 하니 던져주는 사진 속 남자는 제법 멋있었다.

그러나 입맛에 맞을 리 없었다. 당장 하루 전만 하더라도 금발의 근육질 남자와 침대 위에 뒹굴다 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얘기다.

‘SKY그룹의 총수다.’

이건의 이어진 말에 이희윤이 입이 찢어졌다.

스카이 팟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비에게 눈치가 보여 굳이 들고 오지 않았지만. 또한 재벌가의 여식답게 보통의 집과는 다르게 ‘정보의 질’이 다르다.

현 SKY가 대한민국에서 어떤 존재인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며, 삼현을 위태롭게 만드는 존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쪽에서 먼저 청혼한 건가요?’

기고만장한 질문에 이건은 잠시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희윤아.’

‘네, 아버지.’

‘너에게 이 삼현의 운명이 걸렸다.’

‘네?’

따뜻하게 부르는 아비의 목소리는 처음 느껴보는 종류였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이 오히려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이런 것도 해내지 못하면 네년은 쓸모가 없다는 표현 같았기에 더욱 두려웠다. 차가운 무관심보다 더욱 심한 트라우마가 그녀의 가슴 깊이 새겨진 순간이었다.

“시발···”

나긋하게 욕을 내뱉은 이희윤.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천우진에게 보여주었던 정갈하고 예의 바른 모습은 사라지고, 차갑고 도도한 얼굴을 하고는 또각또각 걸음을 옮겼다.

***

누구보다 바쁜 하루를 보낸다는 말이 잘 어울릴 사람. 현재는 그런 사람이 자신이라 생각하는 이건이었다. 전경련 모임을 주최하고자 했으나, 모두 회피했다.

“어떻게 가져온 자동차인데!”

사재를 끌어다 쓸 만큼, 공을 들였던 자동차다. 덤으로 굴러온 카이그룹의 계열사들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제대로 흡수했고 내실을 다지던 찰나였다.

자동차라는 게 뚝딱 찍어낼 수 없는 물건인 만큼 적자 규모는 아직 해결하기 어려웠지만, 차차 나아지리라 확신했다. 삼현 전자가 세계 최초로 256메가바이트 D램 양산에 돌입한 것처럼 말이다.

결국 카이자동차, 이제는 삼현자동차가 된 그것을 SKY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간단명료하다.

많은 돈이 있다면 지킬 수 있다.

자신을 신뢰하는 주주들을 확보한다면 지켜낼 수 있었다. 삼현전자의 D램 양산을 계획보다 빨리 공개하고 삼현의 명성을 들이밀며 평균 물량보다 더 많은 물량을 계약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느꼈다. 더 많은 돈, 더 넉넉한 돈이 있어야 한다는 어떤 강박이 생길 만큼, SKY의 자본의 힘은 막강하니까.

“회장님··· 아무래도 이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남종현의 만류에 이건이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체면차리다 회사 넘어가면, 그거야말로 병신 짓이야!”

남종현은 마치 자기 일인 양, 제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이건은 앞을 막은 남종현을 옆으로 밀치고 당당히 대현그룹 본사 로비로 걸었다.

“정 회장 얼굴 좀 봅시다.”

대현그룹의 로비에서 약속도 없이 대현그룹의 총수를 찾을 만큼, 이건은 마음이 급했다.

대현그룹의 회장실.

“아니 이 회장··· 이게 무슨?”

로비에 있다던 이건을 불러오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과연 저 늙은이가 이렇게까지 할 만큼 다급할까? 듣기로는 삼현자동차의 지분 43%가 이건 외 특수관계자들의 지분으로 알고 있기에 더욱 놀라웠다.

“SKY가 무서운지 전경련이 꼬리를 말 더이다.”

“크음··· 타타다우를 본게지요.”

“그 미친 노친네가 분식회계를 그렇게 했을 줄, 누가 알았소?”

혀를 차면서도 자리가 불편한지 정상영은 차를 홀짝이며 자꾸 시계를 쳐다보았다. 차가 식기도 전인데 이건은 후루룩 비워냈다.

“저, 저.”

탁!

거칠게 컵을 내려놓은 이건이 말했다.

“삼현이 무너지면 다음은 어디요?”

노골적으로 다음은 당신이 아니겠느냐는 질문에 정상영도 불쾌함을 느꼈다.

“요즘 부쩍 이 회장··· 경우에 없는 모습을 자주 보는군.”

“아이디어 뱅크 사업인지 지랄인지에 투자를 빙자한 삥이나 뜯기며 평생을 보내고 싶소?”

“힘이 없어 고개를 숙이는 게 어찌 부끄러운 일인가?”

“왜 힘이 없소? 이제 SKY자금도 마를대로 말랐을게요, 방산이나 신사업이다 어마어마하게 확장하고 있지 않소?”

“쯧, SKY가 끝인가? 뒤에 대한종합금융이 있소, 또! SKY전자 작년 영업이익이 얼만지 알기나 하시오?”

“그럼 올해 세계 최초 D램 양산을 시작한 우리 삼현전자의 이익은 얼마일 것 같소?”

“크음.”

정상영의 입이 굳게 닫히자 이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실 문을 열더니 외쳤다.

“종현아, 그거 가져와라.”

곧 그가 서류한 뭉텅이를 들고와 찻잔이 올라가 있던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삼현만 똥이 묻었을 것 같소? 대한민국 사업한다는 놈 중에 똥 안 묻은 놈이 있을 것 같냐 이 말이오!”

서류를 살피던 정상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회장 자네 정말! 같이 죽자는 거요?”

“천우진 그 애송이 놈에게 손수 일군 삼현이 삼켜지게 생겼소, 내가 두려울 게 있을 것 같소? 죽을 때 죽더라도 혼자는 안 죽어! 나 이건이오 이건! 재계서열 바닥의 삼현을 이 자리까지 끌어올린 이건!”

큰 한숨과 함께 정상영이 잠시 말을 잃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이건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이 서류들··· 여의도에도 가져갈 생각이오?”

“내 돈, 우리 전경련 돈 안 먹은 금배지, 제복, 펜대들이 어디 있겠소?”

“정말 감당할 수 있겠소? 자동차가 삼현이 감당하기에 어려웠다 생각하고 전자 쪽에 집중하는 것이 옳지 않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냐는 이건의 눈빛.

정상영은 본능적으로 이건이 어떤 강을 건너고 있다고 느꼈다. 갈 때까지 갔기때문에 더 싫었고 불안했다. 정말 저 서류가 세상에 공개된다면 이건의 말처럼, 자신이 암암리에 우려하고 있던 일처럼. 대한민국이 SKY에 손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깨끗하려고 노력했던 대현이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게 한이 될 만큼, 독재정부와도 대립관계를 형성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그 어떤 것이 위선이었다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정상영.

“전경련 모임부터 열겠소.”

이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오늘 밤에 봅시다. 나는 지금 바로 여의도로 갈 생각이오.”

“후우, 그럽시다.”

완전한 만족은 아니지만 처음 대현의 사옥에 도착했을 때 보다 한결 편안해진 이건의 얼굴을 확인한 남종현은 우려했던 것보다 좋은 방향으로 일이 해결되었구나 싶었다.

이건이 싫어할 만한 보고를 올려야 하는 만큼,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차량에 오르자마자 남종현이 보고했다.

“희윤아가씨가 천우진 회장과 접촉했습니다.”

기대감이 서린 이건의 두 눈에 잠시 보고가 망설여졌지만, 눈을 질끈 감고 보고를 이었다.

“천우진 회장의 다음 일정이 있어서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쯧쯧, 쓸모없는 것들.”

이제 이건은 그 무엇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의 본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핏줄마저 쓸모없다 얘기할 정도로.

“하루라도 시간을 벌어주면 그만이야, 희윤이는 포기한 것 같더냐?”

“아닙니다··· 그럴 아가씨가 아니지 않습니까?”

“클클, 그렇지··· 능력은 없는 게 독심은 있어 쉽게 포기할 아이가 아니지, 계속진행시키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지원해 줘.”

“예! 회장님.”

“여의도 금배지 놈들은 아직도 전화를 안 받고?”

“··· 예.”

“어디 얼굴을 보고도 그 지랄 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

< 제 69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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