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68화 (68/458)

< 제 68화. >

피곤했다.

고통에 찬 비명과 신음, 나아가 광기가 어린 비명 따위는 인간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기에 너무나도 충분한 소음이다. 거기에 더해 시각적인 효과까지 더한다면, 버틸 수 있는 인물은 누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충 얘기는 들었다.”

너무 피곤했지만, 집에 돌아오니 할아버지가 날 붙잡았다. 별수 없이 눈 내리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할아버지가 앉아 있던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쫄쫄쫄.

고급스러운 크리스탈 잔에 할아버지가 손수 꼬냑을 따라주신다. 말없이 잔을 들어 팔을 뻗어오니, 나도 잔을 마주 들어 할아버지 잔에 부딪히고는 단숨에 비워냈다.

“힘든게냐?”

육체적으로 피로하냐 물어오신 게 아니다.

정신적인 피로를 물어 온 것도 아니다.

앞으로의 마음가짐에 대한 질문이었다. 내가 선택한 길을 걷는 게 힘드냐는 뜻.

“그럴 리가요.”

“강철 같구나··· 꼭대기에 앉은 놈답다.”

“그런가요?”

“그래··· 손 속에 자비가 없더구나.”

굳이 아무 말 없이 죽여버렸으면 편한 일을 왜 어렵게 하느냐는 질문.

맞는 말이다.

죽이면 편하다.

누가 죽였는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증언이나 그들이 나 몰래 사진 등을 찍지 않았다면 또, 그것을 폭로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모르게 처리하는 것이 안전하고 편하며 쉬운 방법이다.

“보라고요,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고개를 끄덕이는 할아버지.

“그래, 공포란 아주 효과적인 경고이기도 하지, 그나저나 이건의 서자를 살려주었다고?”

“아, 이재형이요.”

“총을 다루던 놈이라 들었다. 철웅이가 보고한 자료를 보니 멕시코 등지의 마피아랑도 붙어먹던 위험한 놈이었어.”

“아직 그가 할 일이 남았습니다.”

“할 일이 남았다?”

“예.”

꼬냑을 잠시 입에 머물다 삼킨 할아버지가 말을 잇는다.

“네 놈은 어떻더냐?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느냐?”

할아버지가 한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활짝 웃으며 답했다.

“보신탕은 취향이 아니라서요.”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던 듯하나, 할아버지는 피식 웃는 것을 끝으로 더는 아무 말 없이 술만 홀짝이셨다.

***

천우진이 몇 잔의 술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백철웅이 조용히 천혁수에게 다가왔다.

“앉거라, 참 예쁘지 않더냐?”

“예. 백부님.”

백철웅도 천혁수의 시선을 따라 포슬포슬 내리는 함박눈을 쳐다보았다.

“신년부터 욕봤다.”

우진이 마시던 잔이었지만, 백철웅은 개의치 않고 공손히 천혁수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서로 잔을 부딪치고 다시 천혁수는 아름답게 떨어지는 함박눈을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시가 한 대 내올까요 백부님?”

천혁수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급 시가를 입에 문 천혁수가 매캐한 시가 향에 기분이 좋은지 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뒤처리는 깔끔하더냐?”

“호석이와 김장원 사장이 남았으니 걱정하실 부분은 없습니다.”

“이건 그놈에게 배달되느냐?”

“용팔이를 불러 치료하고 보낼 겁니다.”

깡패, 건달, 조폭 등.

폭력과 밀접한 그들은 병원에서 진료받을 수 없다. 법에 따라 ‘폭력’에 의한 상처는 ‘신고’할 의무가 의사들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결국, 칼침 맞는 일이 잦은 부류의 인간들은 그런 그들을 치료할 의사가 필요했고, 그 불법시술을 해주는 의사들을 ‘용팔이’라는 은어로 불렀다.

“엠바고는 확실한 놈이겠지?”

“예, 명동의 김박사를 불렀습니다.”

“그래, 그치라면 문제없지.”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생각했을까? 백철웅이 천혁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민이 있으십니까?”

피식 웃은 천혁수가 시가를 안주 삼아 꼬냑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오늘도 묻지 못했구나.”

“우진이에게 말씀이시죠?”

“그래··· 손주놈에게 물어볼 말이 있는데 녀석의 두 눈을 보고 있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과연 그것이 무슨 질문일까 궁금하지만, 감히 질문하지 못하는 백철웅. 그런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것일까 천혁수가 먼저 운을 뗐다.

“우진이 그 녀석이 복수가 끝나면 무너질까··· 그것이 걱정이구나.”

아!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백철웅.

어느 순간 신뢰가 가득 담긴 두 눈으로 말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부님··· 제가 아는 우진이라면, 우리 도련님 천우진 회장님이시라면! 고작 복수라는 작은 목표가 인생의 전부라 생각하실 리 없습니다.”

그 말이 만족스러운지, 아니면 안심되는지 천혁수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오냐··· 내 핏줄은 그래야지, 암! 고작 작은 땅의 왕 노릇 하던 놈의 모가지로 만족해서야 쓰겠더냐? 넓은 땅, 세상을 오시하는 황제 놈의 모가지는 가져와야 만족스럽지.”

달빛을 받아서일까? 천혁수의 두 눈이 푸르게 빛나는 착각이 일었다. 그만큼 무서운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뱉어내는 천혁수의 그 차가운 기세에 백철웅은 얼굴 가득 커다란 미소를 걸고는 대답했다.

“그렇죠, 능히 그러고도 남을 분입니다.”

***

한 달 뒤.

남종현이 애매한 표정으로 이건의 집무실에 들어갔다. 기쁨과 걱정 따위가 공존하는 그 얼굴을 좋은 얼굴이라 부르긴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이건의 미간은 좁혀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들어 도통 좋은 소식 따위는 들려오지 않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 뭐야!”

부쩍 날카로워진 이건.

건드리면 톡 하고 터지는 봉선화 따위가 아니라 건드리면 폭발해버릴 것 같은 히스테리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차분함과 냉철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이제는 ‘악’만이 남아 있는 이건이다.

“부회장님이··· 오셨습니다.”

쿵.

급하게 일어서며 의자가 뒤로 쓰러졌다. 집무실 문을 열고 외쳤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놈이 돌아왔다니 놀라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디야! 어디야!”

휠체어에 앉아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이재영이 눈에 들어온 이건, 속히 걸음을 옮겨 제 아들을 살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많은 부분이 없어졌다.

손도, 발도.

불구가 되어버린 아들의 모습에 욕설 빼고는 다른 말을 뱉을 수 없었다.

“미, 미친.”

이건의 눈은 이재영의 피로 물든 사타구니에 고정되었다.

“미친놈들···”

그 잔인함에 치를 떨던 이건.

이재영의 살짝 벌어진 입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보였다.

“입에 그것은 무엇이더냐?”

아비의 질문에도 이재영은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숨만 쉬고 있는 인형과도 같은 모습이다.

까드득 이를 짓씹으며 손수 손을 뻗어 그것을 꺼냈다. 얇은 비닐에 쌓인 노란색 포스트잇.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경고였다.

지금 이 정도에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 언제든 칼날은 자신의 목에 닿을 수 있다는 말이면서 자신도 이재영처럼 될 수 있다는 차갑고도 냉혹한 경고.

“희윤이··· 희윤이 어디 있어?”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으로 뱉어낸 질문에 남종현이 다가와 말했다.

“파리에 계십니다.”

“들어오라고 그래.”

남종현은 이건이 유학 생활을 잘 하고 있는 장녀 이희윤을 왜 불러오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현 상황에서는 털끝만큼도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이재형이 막내 이희연을 데리고 갔단 보고도 하지 못했다. 그간 이건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침실만을 오갈 뿐이었기에.

“차 대기 시켜, 자동차 임원회의 소집하고.”

뭔가 행동을 하려는 이건의 의지가 느껴졌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라야 할 남종현은 어쩐지 그냥 지금처럼 이건 회장이 가만히 칩거 생활을 이어나갔으면 싶었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안이, 어떤 본능이 맹렬하게 이건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첨언해야 한다 외쳤다. 그러나 그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의 밥줄은 목숨줄은 이건이 틀어쥐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

얼.죽.아.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얼어 죽어도 아이스 헤이즐넛 아메리카노다.

뻘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처럼, 오늘 하루도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굳이 고리타분하고 고민스럽게 사업 생각, 미래의 지식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사전에 내린 지시만으로도 충분히 SKY는 그 어떤 기업보다도 월등하게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인물은 정호석이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날 찾아와 굳이 ‘보고’ 형태를 띨 일은 단 한 가지 뿐이니까.

“선물을 받은 노인네가 외출한 모양이네요.”

“하하, 예 회장님.”

“뭐 한답니까?”

“이건이 삼현자동차 임원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절로 입이 앞으로 모아졌다.

“호오, 뭔갈 해볼 모양이네요.”

“예.”

“그러니까요, 좀 분발했으면 좋겠는데 건강하라고 녹용이라도 보내줘야 할까요?”

내 농담에 정호석이 피식 웃었다.

“칼을 한 자루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공포에 절어 더 열심히 움직이지 않을까요?”

“와, 잔인해.”

“하하하, 회장님이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사전에 지시해둔 것이 있으니 걱정은 없다. 사실 당장 삼현자동차가 뭘 해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저 시장에 있는 주식들과 우호지분을 확보하는 것 외에 대처법은 없다.

“모쪼록 돈을 좀 많이 썼으면 좋겠네요.”

내 계획을 알고 있는 정호석이 히죽 웃는다.

“하하 별수 없으니 그 방법밖에 없을테죠.”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 상황에서 ‘대출’을 끌어오기도 어려울뿐더러 설령 대출을 끌어온다고 하더라도 내겐 이득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삼현의 자금줄이 말라버리는 것을 원하고 있으니까.

실없는 농을 주고받는 사이, 노크와 함께 들어온 비서가 다음 일정을 얘기했다.

“회장님, 시간 되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예정된 시간이 되었다.

정보화 시대, IT혁명, IT붐 등.

일컫는 말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앞으로 많은 일상이 변할 것이라는 걸 공통으로 얘기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아직까지 크게 와닿지 않는 부분이다. 컴퓨터 조작법을 모르는 이가 태반이고,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는 이가 태반이다.

스카이 팟이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고 있음에도 역시, 젊은 세대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얘기일 뿐이었다.

촤라라락, 촤라라락.

플래시 세례.

익숙해졌지만 눈이 아픈 건 매번 똑같다.

스카이 팟의 흥행 덕분에 꽤 많은 해외 언론사가 이번 발표회에 참석한 상황, 절로 입꼬리가 길게 찢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많은 분이 IT란 것에 익숙치 않아 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혁명인지 체감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이제 SKY는 그런 분들에게도 IT의 발전이 얼마나 우리 인간의 일상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체감 할 수 있게 만들려고 합니다.”

뚜~ 뚜~ 철컥.

“여보세요?”

-헬로?

-보스?

익숙한 두 명의 목소리.

그것은 머나먼 타국 미국에서 열심히 구골을 성장시키고 있는 핵심 래리와 세르게이였다.

“잘 들려?”

영어로 된 질문을 하니 잠시 후, 대답이 들려온다.

-오! 진짜 들리잖아?

-보스 이 전화를 정말 무료로 서비스 할 거야?

발표회에 참석한 언론인들도, 세계 유수의 석학들도, 많은 기업가들도 ‘도대체 뭐 하는 짓거리지?’하는 표정들이었다.

나는 밝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신호에 맞춰 SKY SOFT에서 만든 인터넷 전화 프로그램이 등 뒤 스크린에 떠오른다.

“래리, 세르게이. 여기 계신 수많은 귀빈에게 인터넷 전화의 장점을 설명해주겠어?”

-예스~ 마이 보스!

-인터넷 전화는 무료입니다!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다면 그 곳이 어디든, 지구 반 바퀴 너머이든 북극이든 남극이든! 휴대폰 기지국이 없어 연락할 길이 없는 곳이라도, 전화 할 수 있죠.

-이봐 세르게이, 보통 인터넷망이 설치되어 있다면 무선통신 기지국도 설치되어 있다고 봐야 돼.

-잔소리는! 어쨌든 이 놀라운 ‘무료 통화’서비스를 SKY SOFT가 제공한다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만 있다면 단돈 0원으로 타국의 베스트 프랜드와 통화가 가능하다는 얘기죠, 지금 미국에서 이렇게 한국과 통화하고 있는 우리처럼요.

그제야 언론인들도.

발표회에 참석한 모두가 우리가 발표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모양이다.

“확실히 일반인들이 쉽게 정보화 시대가 무엇인지 깨닫겠군.”

“미친 통신사들은 영업 이익이 줄었다고 난리겠구만.”

“특히나 국제전화 쪽을 담당하는 놈들이 더 그렇겠지.”

“이런 걸 무료로 풀어버린다니··· 미쳤군 SKY는 땅을 파서 장사를 하는 걸까?”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이번에도 확실히 내가 얻고자 했던 것들은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뿌듯한 마음이 들려던 찰나, 불쾌한 얼굴을 마주 할 수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썩은 박수를 치고 있는 여인.

그녀는 삼현의 장녀 이희연이었다.

< 제 68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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