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5화. >
대통령의 신년사에서도.
전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한다는 다양한 전문가들도 모두가 IT를 울부짖는 1999년이 시작되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얇은 정장을 차려입은 한 무리의 사내들이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들고 있던 피켓을 번쩍 들어 올린 남종현이 침을 꼴깍 삼키며 다가오는 인물들의 면면을 천천히 살폈다.
“오셨습니까. 이재형님.”
“오랜만입니다. 남 실장님.”
남종현은 어쩐지 이런 싸늘한 계절이 이 사내와 몹시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올해의 삼현에는 꽃피는 봄이 올까? 그런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세상이 IT를 외치고 있고, 현 IT시장을 선도한다고 볼 수 있는 SKY는 당연히 바쁘게 돌아갔다. 한참 실무진 회의를 주도하며 바쁘게 회의를 이어나가는 때에, 정호석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회장님, 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워낙 믿을만한 실무진들이니 알아서 잘하리라 믿었다.
내 개인 집무실에 들어와서야 정호석의 입이 열렸다.
“삼현의 비서실장 남종현이 금일, 김포국제공항에서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헌데 그 손님들이 용병단입니다.”
“용병단?”
“예, 검은 까마귀라고 제법 명성을 날리는 용병단입니다. 해서 조사하던 중, 놀랍게도 삼현가의 차남 이재형이 그 용병단의 머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아!”
차남 이재형.
나는 그를 알고 있다. 실제로 마주친 것은 딱 한 번이지만, 어쨌든 그를 알고 있었다.
이건이 자신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아들을 불러왔다? 그럴 리가 없다. 이건은 모르게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도 이재영이 핸들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타깃이 누구인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우선, 최대한 인원을 충원해 중역들과 회장님의 경호인력을···”
정호석의 말을 잘랐다.
“아니요, 먼저 정공법이 싫다고 얘기하니, 나도 정공법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정호석.
“이런 일은 공격보다 수비가 불리하죠.”
“그렇습니다.”
“최선의 수비란 것은 때로는 선제공격인 법입니다.”
“아아!”
내 말뜻을 완벽하게 이해했는지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리는 정호석.
“그때 보고받았던 그곳으로 움직였나요?”
“예, 맞습니다.”
삼현의 비서실장 남종현이 비밀리에 사들인 단독주택이 있었다. 항상 삼현 일가에 안테나를 세우고 있던 그 정보는 자연스럽게 내 귀에 흘러들어왔다.
사실 그곳이 또 다른 비자금 창고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알고 보니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돈으로도 안 되고, 정치 공작으로도 안 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삼현이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제3의 힘을 쓰는 일, 한 마디로 ‘암살’밖에 없다는 것을 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놈들의 감시를 철저하게 했다. 그것도 무려 특수부대의 훈련을 받은 이들이 직접 말이다.
“바로 움직이죠, 사람들 모으세요.”
“예! 회장님.”
***
남종현이 마련한 하남의 한 단독주택.
테이블 위에 펼쳐진 서류들을 보며 이재형이 말했다.
“천우진··· 설마 이 아이가 그 아이인가?”
이재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사람이 많다.”
피식 비웃은 이재형이 말을 잇는다.
“어차피 여기에 당신이 도덕적인 경영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니, 그 역겨운 가면은 벗어버리지 그래?”
“흐흐흐.”
음흉한 웃음소리와 함께, 잘 정돈된 경영가의 얼굴이 일변했다.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 한 눈빛, 자신 외엔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는 이기심이 담긴 눈동자.
“그래, 그 아이야.”
“쯧쯧, 일이 이렇게 되는군··· 이게 다 당신과 빌어먹을 노친네의 욕심 때문이라는 얘기야.”
“나와 아버지의 욕심 덕분에, 네 소중한 동생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이야?”
쾅!
“그 입에 내 동생을 담지 마.”
“내가 냈던 사고··· 아니지 크크큭, 네가 냈던 그 교통사고의 생존자가 우릴 향해 칼을 내밀었어, 공존 따위는 당연히 생각할 수 없지.”
“놈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지? 지금 이 일은 놈들의 복수인가?”
“글쎄? 그딴 이유가 중요한가? 적이 생겼단 사실과 그 적과는 절대 공존할 수 없다. 그것만 기억하면 좋겠는데?”
이재형이 말없이 가만히 있자, 이재영이 서류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앞으로 이주일 뒤면 SKY가 카이자동차와 흡수된 삼현자동차를 친다. 그러니 나는 그 안에 천우진과 놈의 할애비 천혁수를 안 봤으면 싶은데?”
이재형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겨우 2주?”
“힘든가?”
“동선 파악하기도 어려운 시간이다.”
“아아, 그 정도는 사전에 다 준비해 뒀지.”
남종현이 내미는 서류를 꺼내서 확인하는 이재형, 그러나 좁혀진 미간은 좀처럼 펴질 기미가 없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내용은 필요 없어. 놈들의 경호 인력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군, 네가 평범한 의뢰인이었으면 당장 이 자리에서 목이 잘렸을 거야.”
확실히 이재형의 뒤편에 도열해 있는 용병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대놓고 사지로 들어가라고 종용하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이재영이 남종현에게 손짓하자 바깥에서 커다란 나무상자를 가지고 들어오는 사내들. 총 두 개의 나무상자는 척 봐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용병들 몇이 빠르게 상자를 열었다.
철컥.
안에는 권총 수십 정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하늘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
[SKY그룹의 자본력은 도대체가! SKY인베스트먼트 또다시 공격적인 투자 재개! 이번에는 삼현전자?]
[삼현자동차 주식 공개매수! SKY가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도 주도할까?]
[혁신의 SKY, 대한민국 자동차를 혁신한다!]
[SKY는 축제분위기, 다른 재벌가는 장례식 분위기!]
[때늦은 복수일까? 카이장도차 흡수한 삼현자동차 위기일발! 과연, SKY의 자금력을 막을 수 있을까!]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적힌 신문을 들고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이재영. 초조한 얼굴로 남종현과 대화를 나누는 이건의 모습에 깊은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왔더냐?”
“예, 아버지.”
“회장님이라고 불러!”
“예, 회장님.”
자연스레 소파에 앉자 이건의 질문이 날아왔다.
“기사는 봤더냐?”
“예.”
“네 놈이 책임지고 핸들링해.”
“그러죠.”
이건이 미간을 좁히며 이재영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쳐다보았다.
“쉽게 대답하는구나.”
“준비하던 게 있습니다.”
불안에 떨던 이건의 얼굴에 흥미가 떠오른다.
“호오, 준비하던 것이 있다?”
“예.”
“그것이 무엇이냐?”
“걱정하지 마시고 지켜봐 주십시오.”
“그것이 무엇이냐 물었어.”
이재영은 대답을 회피했다. 자연스럽게 이건의 시선이 남종현에게 닿았다.
“네 놈은 뭘 좀 아는 모양이구나?”
“······”
“대답해 봐, 부회장 저놈이 무엇을 준비하는지.”
“저도 알지 못합니다.”
이건이 뱀같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말했다.
“완벽하게는 모르지만, 대충은 아는 눈치구나? 내 말이 틀렸더냐?”
“······”
“재영아.”
남종현을 빤히 바라보며 이재영을 부르는 이건.
“예, 아버지.”
“이 애비 아직 안 죽었다. 그런데 네 놈이 벌써부터 이 애비의 수족을 가져다 쓰려고 하는구나, 어디서 배운 못된 버릇이더냐?”
“··· 죄송합니다.”
“네 놈의 그 부회장이라는 자리, 미천한 지분, 언제든 다시 아비의 품으로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예! 아버지.”
“그럼 종현이는 말해 보거라, 저기 내 아들놈이 꾸미고 있는 짓거리가 무엇인지.”
힐끗 이재영을 바라보는 남종현.
이재영이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이자 입을 연다.
“이재형군을 불러오셨습니다.”
쿵!
이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니 의자가 뒤로 나자빠져 커다란 소음을 자아내고, 놀란 남종현을 전혀 신경쓰지 않은 이건은 바로 뺨을 올려붙였다.
쫙!
“이런 미친놈들이!”
남종현의 뺨을 몇 대 더 때리고, 씩씩거리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이재영에게 다가간 이건.
“내가 재형이 그 녀석은 쓰지 말라 그리 얘기했거늘!”
“쓰레기 치우는 데는 쓰레기가 제격 아닙니까?”
“이노옴!”
분명 조금 전까지 힘없는 노인 같았던 이건에게 정말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재영이 동경하며 두려워하던 원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떨고 있는 이재영.
“그놈은 괴물이라고 누누이 설명했지 않으냐! 어째서 그놈을 등용해!”
“삼현 시큐리티를 약속했습니다. 그 정도만 쥐여주어도 만족할 놈이에요.”
쫘악.
이건이 자신의 셔츠를 찢었다.
그러고는 심장 어림의 흉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이느냐?”
이재영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아 살았다. 재형이 그놈이 겨우 15살 때 있던 일이었어··· 다음은 네 놈이 아니라는 법 있더냐?”
“자신 있습니다 맡겨···”
“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이건을 똑바로 바라보며 외치는 이재영.
“천혁수 그 노인네 잡으려면 이 정도 칼은 써야 합니다! 지금 삼현의 순수한 힘으로 천혁수 그 노인네 못 잡습니다! 아버지도 알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그놈 동생이 우리 손에 있습니다! 쓰레기 같은 인생에 한 줄기 빛 줄을 우리가 쥐고 있단 얘기입니다!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왜 이렇게 약해지셨습니까?”
“난 모르는 일이니 네 놈 알아서 하거라, 모든 책임도 네 놈이 지는 것이고.”
까드득.
허락은 허락이었으나, 모든 리스크는 이재영이 쥐게 되는 허락이었다. 분한 표정의 이재영이 바깥으로 나갔다.
쿵!
문을 세게 닫고는 입꼬리를 히죽 들어 올리는 이재영.
“재형이 칼이 아버지한테 향하면 더 좋잖아요?”
어쩐지 스산한 그의 표정에 지나가던 가사도우미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돌려 가사도우미를 바라보던 이재영이 물었다.
“들었어요?”
가사도우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들었구나··· 우리 어린 아가씨가, 내 얘기를 들었어.”
“아, 아닙니다 부회장님! 아무런 얘기도 못 들었어요!”
“아니, 넌 들었어 들었을 거야.”
멀리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유모.
이재영은 유모에게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유모는 싸늘한 눈빛으로 가사도우미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이이잉.
품에서 울리는 진동.
기다리는 소식이 있었을까? 이재영이 밝은 얼굴로 전화를 받는다.
“그래.”
-천우진 확보.
“벌써? 고작 일주일 만에?”
-궁금하면 직접 확인하던지.
“이야, 확실히 총이 좋긴 좋은 모양이야? 이렇게 쉽다고? 어디야?”
-안가.
“바로 가지.”
희희낙락.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이건의 집무실 문을 한 번 쳐다본 이재영.
“거 보십시오, 약하면 물어뜯기는 게 이 세상입니다. 총질해도 무마시킬 힘이 있는데 도대체 왜 약해지는 겁니까? 천혁수, 천우진 그놈들이 아무리 윗대가리들 위에 올라서 있어도, 그동안 우리 삼현의 돈을 안 받아먹은 윗대가리들이 없습니다. 결국은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꼬리를 흔들며 충성을 맹세할 것이라고요.”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가사도우미의 뺨을 툭툭 치며 말하는 이재영.
“안 그래요?”
유모에게 끌려가는 가사도우미의 두 눈에는 선량하고 강직했던 부회장이 아닌, 악마가 선명하게 보였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인 악마가.
***
탁.
고급 스포츠카에서 내린 이재영은 무엇이 신났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단독주택 내부로 들어갔다.
곳곳에 떨어져 있는 혈흔들, 코를 간지럽히는 피비린내에 그의 입은 더 찢어질 곳이 없을 정도로 활짝 찢어졌다.
“요란하게도 했나 보다.”
뒷짐을 지고 그를 맞이한 용병에게 그가 물었다.
“천우진이 그 개새끼는 어디 있어?”
“지하실.”
“어휴, 못 배운 새끼라 혓바닥이 짧네. 형이 기분이 좋아서 참는다.”
용병의 뺨을 두어 번 두드리고 그를 지나 지하실로 내려가는 이재영.
철컥.
뒤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뭐야, 왜 이렇게 어두워?”
어둠 속에서 생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뭐야? 누구야? 불 좀 켜봐!”
탁!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고, 나타난 전경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이재영. 그리고 그런 그의 두 눈에는 시리도록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천우진이 보였다.
< 제 65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