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3화. >
불티나게 팔린다.
그런 말이 아주 적절하다고 느껴질 만큼.
“미국 서부, 동부 아니 그냥 전부다! 수량이 부족합니다.”
“미국 현지 생산공장 설립, 아직입니까?”
“서버 관리 똑바로 안 합니까? 어제도 20분이나 먹통이었어요!”
실무진들은 연일 거의 싸우다시피 회의에 회의를 이어나갔다. 멀리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헛기침을 하며 나의 등장을 알렸다.
“흠, 흠.”
중구난방으로 거의 물어뜯듯이 싸우고 있던 그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더니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직원들의 눈에서 존경과 함께 열정이 보였다.
뭉게뭉게 피워올리는 연기는 모두가 진한 녹색이다. 이들과 함께 숨 쉬는 것만으로 피톤치드가 온몸에 돌아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상쾌하다.
선의란 그런 마력이 있었다. 마약과도 같아 자꾸만 취할 것 같았고 중독될 것 같았다. 이들의 선의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가장 필요한 게 뭡니까?”
SKY전자의 사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역시, 메모리입니다.”
“저장공간이요?”
“예. 저장공간만 높다면 고품질의 음원도 많은 수를 다운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품질과 저품질의 음원은 가격차이가 있다.
그래도 사용자들은 고품질의 음원을 원했다. 그러나 고품질의 음원은 몇 곡 들어가지 않는게 현실이었다. 물론, 기존의 카세트 테이프의 음질 정도는 수십 곡이 들어가니 스카이팟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과거, 분명 파인애플 사의 파인팟도 ‘하드디스크’를 적용했었다. 시대가 변하며 고용량 메모리칩이 등장하며 사라졌지만, 초창기에는 분명 하드디시크를 사용했었다.
“그 부분은 시간이 해결해 줄겁니다. 하드디스크 탑재는 너무 무거워요, 하드디스크의 크기를 아무리 줄인다고 해도, 결국은 배터리 용량과 함께 문제점이 드러날 겁니다.”
내 말에 직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장 설립은 최대한 빠르게 추진하겠습니다. 지금 품질도 품질이지만,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고 있으니까요.”
고개를 돌려 SKY LINE이라 명명한 유통회사의 실무진에게 물었다.
“공급망은 빠르게 조성되고 있죠?”
“예, 기존의 식품과 전자의 유통망을 그대로 가져왔기에 문제없습니다. 다만, 미국의 직접유통 경우는 얘기가 다릅니다.”
맞는 얘기였다. 아직 SKY LINE은 미국시장 내의 유통망까지 가져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머지않았다고 자부한다. 과거 ‘유통’업체의 핵심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아마조네스’란 회사가 어떻게 경영되었는지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비서가 내 곁에 조용히 다가와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회장님, 약속 시각이 되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벗어났다.
***
약 한 달 동안 래리와 세르게이는 한국에 머물렀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어디서든 컴퓨터와 이메일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기에 더욱 그랬다.
게다가 SKY SOFT에 따로 사무실을 만들어 주었으니 보안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들과 나의 기본 신뢰가 있는 만큼, 내가 그들의 무엇인가를 빼돌린다는 건 그들도 나도, 상상하지 않는 부분이었다.
점심 시간, 구내식당 내부에 미팅룸이 마련되었다. 몇 개의 미팅룸이 있고 그중 규모가 작은 곳에 나와 래리, 세르게이와 철수가 자리를 잡았다.
소불고기 덮밥을 맛있게 먹은 세르게이가 말했다.
“이제 천이 우리의 보스가 되는군.”
철수가 농담처럼 말했다.
“그렇죠, 최종보스.”
래리가 피식이며 동조한다.
“최종보스는 깨야지 제맛 아냐?”
완전한 구골의 흡수.
그것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실계약은 나중에 SKY 그룹의 법무팀이 알아서 마무리할 것이고, 여기서는 기본적인 협의만 이루면 된다.
미래의 전 세계 IT의 기둥이라 말해도 손색이 없을 기업이 이제는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는 얘기였다.
“그래 안정적인 월급쟁이도 좋지!”
래리는 뭔가 아쉬운 표정이다.
그를 위로하고자 입을 열었다.
“래리, 세르게이. 너희들이 가진 지분이 훗날 너희들의 자산이 되게 만들어줄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 마, 현재의 구골 지분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이되어 너희들에게 돌아가리라 확신하니까.”
“쯧, 보스가 하는 말인데 믿어야지.”
“암암, 최종 보스가 하는 말인데.”
오미자차를 한 모금 마시고. 그들의 수장이자 최고경영자의 위치에 맞게 업무 지시를 시작했다.
“래리와 세르게이는 지금처럼 일해 주고, 철수는 미국에서 스몰 홈피에 집중해, 스카이 소프트에서도 직원들이 파견될테니까 잘 다독이고, 인력 충원은 래리와 세르게이의 자유야, 무슨 말인지 알지?”
““예스 보스.””
***
김포국제공항.
적당한 곳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남종현이 시계를 확인하더니 담배 연기를 뱉어내고, 자켓 상의를 만지며 말했다.
“비행기 아직이야?”
-치익, 방금 막 착륙했습니다.
“확인.”
서둘러 담배를 두어 모금 더 태우고는 입국장으로 바삐 걸음을 옮긴다. 그가 도착하고 5분여가 더 지나고 나서야 입국장 게이트가 열리고, 한 명의 사내가 여러 명의 인물을 거느리며 나타났다.
남종현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부회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남 비서실장님··· 마중을 다 나오셨네요.”
“하하, 회장님의 특별 지시가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수행원들이 부회장이란 사내의 짐을 받아들었고, 남종현은 그를 안내했다.
“아버지는 괜찮으세요?”
“요즘 부쩍 건강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쯧··· SKY 때문이겠죠?”
남종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 삼현의 부회장이자 이건의 장남 이재영.
“아버지가 통, 회사에 출근하시지 않는다고요?”
“예, 대부분 업무는 저택에서 처리하십니다.”
“후우 어쩌다가··· 쯧, 알겠습니다. 우선 아버지부터 뵙죠.”
“예.”
***
SKY사옥의 루프탑.
직원들의 휴식공간과 흡연구역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있는 그곳에는 회장인 나만 사용할 수 있는 밀실이 있었다.
회사 인근의 중식당에서 포장해온 고추잡채와 깐풍기를 안주 삼아 찰리 박, 강기태, 정호석, 김장원과 간단하게 한잔하며 일 얘기를 시작했다.
“삼현 자동차 부채, 성실히 갚고 있습니까?”
찰리 박이 준비해온 서류를 꺼내어 내밀며 말했다.
“겨우 1조원 남짓을 변제한 상태입니다.”
“적자규모는요? 줄어들고 있어요?”
“줄어들었지만, 미미한 수준입니다.”
“쯧, 제대로 경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군요.”
“예, 이런 상황에서 우리 SKY자동차가 점유율을 높인다면··· 더 큰 적자를 보게 될 겁니다.”
맞는 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 자동차는 이제 삼현 자동차가 되었고, 타타다우 자동차는 SKY자동차가 된 상황이었다.
“삼현 전기를 빼앗기며 지배구조를 재정립했다고요?”
“예, 다른 계열사들은 몰라도 자동차와 전자만큼은 이제 쉽게 가져오긴 어렵습니다.”
이건도 호구는 아니었다.
한번 당하니 경각심이 들었는지 서둘러 정비에 나섰다. 가장 핵심이자 알짜배기인 사업들만큼은 철저하게 지키고 싶었는지, 숨겨놓았던 비자금까지 모조리 끌어모아 방어체재를 공고히 다져놓은 상태.
표면적으로는 이건 일가가 삼현의 지분 39% 정도를 가지고 있지만, 차명까지 포함한다면 아마도 안정적이게 50% 이상을 확보하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혹, 내가 짜증이라도 났을까 강기태가 내 눈치를 살핀다.
“어려워진 것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회장님.”
나름 나를 배려하는 얘기에 밝게 웃으며 말했다.
“난 이편이 더 좋아요,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으니까. 솔직히 지금도 증자하게끔 만들면 될 일이니까요.”
바라던 바였다.
솔직히 언제든 가져올 수 있었던 삼현 전자였다. 삼현 그룹을 통째로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난 굳이 그러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복수는 이렇게 쉬운 게 아니니까 그렇다.
처절한 절망, 모든 것을 빼앗긴 설움, 절대 이기지 못할 것 같은 패배감, 삶 전체가 부정당하는 그런 느낌.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끼길 바랐다.
곧, SKY자동차의 로고가 박힌 첫차들이 세상에 나올 것이다. 완전한 ‘신차’라고 부르긴 어렵다. 기존의 내연기관은 그대로 가져가고 우선 ‘디자인’만 변경되는 차량이기 때문이다.
SKY의 신차는 약 8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자동차라는 게 뚝딱하고 도깨비방망이로 두들긴다고 개발되는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다. 이번 신차는 ‘경차’와 ‘승합차’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세단은 곧 ‘디자인’변경 만으로 잠시 시간을 벌어볼 생각이었다. 이후에 물론 개발에 착수해야 함은 당연했다.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있을 것 같으니, SKY인베스트먼트는 공격적으로 삼현의 주식을 사들이세요.”
강기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허튼 곳에 자금을 쓰지 못하게 만들라는 말씀이시죠?”
찰리 박과 함께 다니더니 제법 M&A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대충 얘기를 알아들은 것 같으니, 이제 일 얘기는 그만두고 그냥 가볍게 술자리를 즐겨야겠다.
“자, 한잔하시죠.”
***
이건의 장남 이재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알던 냉철한 경영가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수척하고 마른 노인이 되어버린 아비의 얼굴 때문이었다.
“아버지···”
“오냐, 왔구나.”
“예, 삼현 중공업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고 왔습니다.”
“그래, 보고는 받았다. 고생했구나.”
“이제 제가 왔으니 회사는 걱정하지 마시고, 우선 아버지 건강부터 챙기셔요.”
이재영의 말에 이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불쾌함의 표현이었다.
“이 애비 아직 안 죽었어!”
“아버지 제 뜻은 그것이 아니고···”
“일없다! 얼굴 봤으니 되었어, 나가 봐!”
조금 전까지 분명, 수척한 노인이었던 이건의 얼굴. 하지만 지금은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괴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기 아들에게도 자신이 가진 권력을 내놓고 싶지 않은 모양.
이재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뒷방 늙은이 취급······”
이건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집무실을 빠져나온 이재영. 점잖고 젠틀하기만 했던 그의 얼굴은 조금 전 이건이 보여주었던 얼굴과 매우 흡사하게 변했다.
“남 실장.”
“예, 부회장님.”
이재영이 남종현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아버지 꼴이 저게 뭐야?”
“죄송합니다.”
소란을 들었을까, 주변의 가사도우미들의 발소리에 이재영은 한숨과 함께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후우, 남 실장님.”
“예! 부회장님.”
“재형이 어딨어요?”
“예?”
소스라치게 놀라며 되물었던 남종현.
이재영이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남종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이재형이 그 서자새끼 어디 있냐고. 나이를 자셨나 자꾸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아, 둘째 도련님은···”
“야이 개새끼야, 그 새끼가 왜 도련님이야.”
“죄송합니다.”
“그래서, 어디 있어?”
“이재형군은 멕시코에 있습니다.”
“내일까지, 전화 연결 시켜. 서자 놈도 쓸 때가 있겠지.”
남종현은 몹시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회장님이 아시면 경을 칠 일입니다. 부회장님.”
이재영이 자신의 이마를 남종현의 이마에 딱 붙이고는 부릅뜬 눈으로 말했다.
“남 실장님, 우리 꼰대가 오래 살 것 같아요~ 아니면 내가 오래 살 것 같아요?”
“······”
“그냥 시키면 시키는대로 합시다 우리, 서로 얼굴 붉히고 이게 뭐 하는 거예요? 우리 사이에 안 그래요?”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고개를 뒤로 빼고, 손을 뻗어 남종현의 어깨춤 주변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하는 이재영.
“사채업자 나부랭이들한테 우리 보안실 애들이 먹히겠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합시다 상식적으로, 천혁수 그 노친네 총탄이 날아다니던 시절에도 사채하던 노인네에요.”
“예, 제가 간과했습니다.”
“그러니까, 재형이 그 서자새끼 같은 또라이들을 붙여줘야 그나마 체급이 맞다 이런 얘기죠, 용병인지 지랄인지, 그것들이랑 다 같이 들어오게 할 테니까 적당한 안 가나 하나 섭외해 놓으세요.”
“예.”
이재영이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는 찰나.
“큰 도련님!”
그를 밝게 맞이하는 인물이 나타났다.
“아, 유모! 잘 지내셨어요?”
남종현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된 이재영, 유모라 불린 가사도우미를 꼭 껴안으며 입만 벙긋하여 남종현에게 명령했다.
‘내일 오전 중에, 전화 연결.’
남종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이건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 제 63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