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2화. >
이맘때의 사람들은 인터넷이라는 단어를 질문받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야호’라고 말한다.
아직까지 세계 시장의 최선두를 달리고 있는 검색사이트는 단연 야호가 맞다.
그러나, 전 삶과는 다르게 일찍 출발선에 오른 구골은 이제 일 검색 건수 30만을 돌파하며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알음알음 정확한 검색이라는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구골은 연일 조금씩 조금씩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래리와 세르게이, 그리고 철수는 그런 바쁜 일정 중에도 한국에서 날아온 초대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철수는 오랜만에 가는 대한민국에 대한 설렘을, 래리와 세르게이는 과연 천우진이 보여줄 ‘혁신’이란 것이 무엇인지가 기대되었다.
“이야, 이 비행기가 SKY가 전세기로 운영하는 비행기야?”
세르게이의 말에 철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와, 정말 좋다 그렇죠? 아쉬운건, 1회성 왕복 비행기만 제공한다는 거네요.”
래리가 철수의 어깨를 두들기며 위로했다.
“그래도 손님들을 위해 이렇게 돈을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커다란 여객기지만, 내부는 일반 여객기와는 다른 구조로 되어 있었다. 모든 좌석이 1등석이라고 얘기해도 좋을 만큼, 다양한 편의시설과 승무원들이 대기하고 있는 비행기 안.
승무원은 친절히 웃으며 그들의 여권을 확인하고 배정된 자리로 안내했다.
“오, 우리 앞자리인데?”
세르게이의 말에 철수가 말했다.
“회장님이 우리를 귀중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죠!”
“오, 역시! 암! 우리가 구골을 만들었다고! 정확한 검색 엔진을!”
자랑스러워하는 세르게이의 말에 래리도 내심 고개를 주억거리며 어깨를 폈다. 호화스러운 비행기에 주춤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은 당당히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니까 당당해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다가온 승무원이 친절히 웃으며 묻는다.
“다른 승객들의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음료를 먼저 서비스해 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신 음료가 있습니까?”
준비된 음료 카달로그를 철수, 래리, 세르게이가 받아들었다. 카달로그 안에는 고가의 주류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공짜인가요?”
철수의 물음에 승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함박웃음을 지은 셋이 각자 취향에 맞는 음료를 주문하고, 간단한 주전부리를 받아들었다.
“아, 뭔가 오랜 비행시간 동안 힐링할 것 같은 느낌이야.”
세르게이의 말에 래리와 철수는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들의 자리는 상대적으로 출입구와 가까웠다. 어째서 이런 자리에 배정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의도하지 않게 새롭게 탑승하는 승객들의 면면을 잘 살필 수 있는 그런 자리였다.
“맙소사.”
래리가 아래턱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왜 그래 래리?”
세르게이의 질문에도 통, 대답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지금 막 탑승한 승객을 바라보느라 정신없는 래리. 자연스럽게 세르게이의 시선도 래리와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미친···”
그들은 지금 탑승한 인물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언젠가 자신들의 회사가 거대한 기업이 되었을 때,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은 인물.
미국 금융계를 움직이는 거인 중 한 명이 웃는 얼굴로 승무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믿기지 않는 둘.
“도대체··· 우진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나지막한 래리의 혼잣말을 세르게이가 받았다.
“확실한 건, 보통 혁신은 아닐 것 같다는 거야.”
철수와 세르게이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SKY전자의 제품설명회.
여태껏 이 정도 규모에 오픈된 제품설명회는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외국에서 사례를 찾아봐도 이례적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한국의 언론사의 취재진들은 의아한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도대체 외신들은 왜 취재를 온거야?”
“저기 봐, CNN이야.”
“미친, CNN에서 카메라를 들고나왔다고? 이건 뉴스에 내보내겠다는 거잖아?”
“무대 규모부터 미쳤잖아? 들어보니까 총 수용인원이 1만명이나 된다더군.”
“하, 도대체 얼마나 거창하게 설명을 하려고 이러는 거야?”
“그것보다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외신들의 태도야, 마치 특종이라도 따러 온 것 같잖아?”
같은 언론인들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의 본능이 ‘경쟁자’를 알아본 것일까? 해외 언론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언론사들도 모두 하나의 특종이라도 더 빠르게 자신들의 언론사로 전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단상위에 사회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말했다.
“잠시 후 제품 설명회가 시작될 예정이오니, 취재진께서는 지정된 자리를 지켜주시고, 잠시 후 입장하실 귀빈들의 인터뷰는 자제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서로를 바라보며 ‘귀빈들’이 누구냐는 질문을 눈으로 쏟아내는 취재진들. 외신들은 그 ‘귀빈들’이 누구인지 아는 모양인지, 영어로도 안내한 사회자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며 입구 쪽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렸다.
철컥.
문이 열리고 맨 앞 경호원 둘을 지나 천천히 입장하는 귀빈들.
“맙소사.”
“누군데? 저 외국인들이 누구냐고!”
“JB모건의 체이스, 골드만글러브의 삭스!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 미쳤군! 미쳤다고! 제기랄, 외신들이 취재를 나온 이유가 이거였어!”
“저기 나머지 외국인들은 누군데?”
“몰라 새끼야, 네가 알아봐!”
“제기랄, 빨리 저 사람들 얼굴 회사에 전달해! 누구인지 알아내라고 하라고!”
***
전 삶.
분명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던 대단한 CEO들은 편안한 복장을 즐겨 입었었다. 가령 파인애플사의 CEO는 검은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직, 한국 사회에는 그런 인식이 거의 없다. 필시 미국도 마찬가지일 거고. 의외로 미국인들 역시 고지식한 문화를 많이 갖고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영국의 신사와 같은 모습의 정장이 아닌 수많은 디자이너들과 협의를 통해 만든 퓨전 한복이었다.
가장 한국적이며, 실용적인 디자인.
제품 설명회라는 PPT에 가장 어울리는 복장으로 이것을 떠올렸다. SKY그룹의 정체성을 밝힘과 동시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애국적 이미지를 한 스푼 가져오며, 거기에 ‘혁신’을 더하고 궁극의 목표인 ‘문화’를 보여주는 옷이었다.
물론 옷의 양식은 ‘타이’가 없는 서양의 양복과 비슷하다.
“모든 준비가 끝냈습니다 회장님.”
비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단상의 뒤편에 섰다. 미리 암막 커튼을 쳐 두었으니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작게 웅성이는 소리가 이미 커튼 저편에 사람들이 들어차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 시켜 주었다.
약속된 사인인 핑거스냅.
딱!
내 엄지와 중지가 튕겨지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러고는 무대 위에 조명이 켜지고 커튼이 올라갔다.
“큰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외신들과 귀빈들에게는 따로 ‘동시통역’도 지원하고 있었다. 설명회에 꽤 많은 투자를 했다고 말하고 싶다.
“안녕하십니까, SKY그룹의 천우진 회장입니다.”
내 인사가 끝나고, 다시 암전되면 내 등뒤 스크린에 SKY그룹의 로고가 떠오른다. 이어서 화면이 전환되며 광고 영상이 흘러나온다.
다시 화면이 전환되고 스카이 팟의 앞면, 측면, 후면이 나타나고, 스카이 팟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송출된다.
“이제 우리는 무겁고 투박했던 CD플레이어를 버리고, 들으면 들을수록 늘어지고 음질이 상하는 카세트테이프는 필요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가벼운 무게, 손쉬운 작동법, 유려한 디자인. 스카이 팟을 소개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니 확실히 스카이 팟 사업을 실패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는 사전에 준비된 컴퓨터로 다가갔다. 뒤에서 카메라맨이 나와 같은 동선으로 따라 걸으며 촬영했고, 그것은 커다란 스크린에 고스란히 송출된다.
“SKY가 제공하는 사이트에서 음악을 다운로드하고, 다운로드 한 음악을 다시 스카이 팟 기기에 넣으면 끝.”
나는 미리 준비된 스피커 선과 스카이 팟 기기를 연결했다. 스피커에서는 아름다운 아리랑 선율이 발표회 내부를 가득 메웠다. 이어서 현재 빌보트 차트 1위의 명곡이 재생되고, 다음은 프랑스의 샹송이, 다음은 클래식이, 다시 판소리가.
“세계 최고의 음원을 보유하고 있는 SKY에서 이제, 당신이 원하는 음악을 다운로드하세요.”
내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스크린엔 스카이 팟의 정면을 화면 가득 담는다. 이윽고 선명하게 떠오르는 SKY그룹의 로고.
발표회장 내부에 조명이 켜지고,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되었다.
***
일부 채널에서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는 SKY그룹의 스카이 팟 제품 설명회. 이건은 그것을 비웃음을 담아 시청했다.
“쯧쯧 이상한 곳에 돈을 쏟아붓고 있군.”
그러나 남종현의 생각은 달랐다.
과연 SKY가 자주 언급하던 ‘혁신’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시사하는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고작 대한민국의 그룹의 제품 설명회를 보기 위해, 미국의 거대 투자기업들이 움직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직도 한국을 전쟁이 지친 가난한 나라로 알고 있는 외국인들이 태반이다. 세상이 이럴진대, 미국의 거물들은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오죽할까?
그런 그들이 주목하는 그룹 SKY.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혁신’이란 단어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남종현.
“알아봤어?”
“제품이 출시되는 대로, 바로 조사에 착수할 것입니다.”
“그래, 철저하게 파헤쳐,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의 SKY야, 기술력이랄게 보잘것없을 테니까 금방 알아볼 수 있을게야.”
“예, 회장님.”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리고 회장의 고갯짓에 남종현이 문을 열었다. 가사도우미가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회장님 앞으로 퀵서비스가 왔습니다.”
작은 상자를 받아든 남종현이 이건을 바라보았다.
이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잠깐, 거기서 열어 봐.”
“아··· 예.”
남종현은 이건과 멀리 떨어진 문 앞에서 박스를 개봉했다. 놀랍게도 작은 박스 안에는 예쁘게 포장된 스카이 팟이 들어있었다.
“그게 뭐야?”
이건의 질문에 남종현은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이건에게 내밀었다. 이건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TV와 그것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개 잡놈들이!”
이건이 그것을 바닥의 던지려는 찰나. 남종현이 황급히 이건을 말렸다.
“회장님! 더 빠르게 조사 할 수 있는 시료입니다!”
남종현의 말을 알아들은 이건이 ‘크음!’하는 노골적인 불쾌함을 표출하며 다시 남종현에게 스카이팟을 건냈다. 남종현은 그것을 받아 들고 천우진이 조작했던 것처럼 몇 번 만져보았다.
“회장님, 파일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
“파일? 그, 음악을 얘기하는가?”
“예.”
“틀어 봐.”
남종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동봉되어 있던 이어폰을 꽂아 이건의 귀에 조심스럽게 꽂았다. 그러고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건이 발작하듯 이어폰을 집어 던졌다.
“당장 그 망할 것 가지고 꺼져!”
“예, 예.”
남종현은 이건이 스카이팟마저 부술까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고 과연 이건이 들었던 노래가 무엇인지 자신도 듣기 위해,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노래가 아닌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
-살려는 드릴게.
등 뒤 집무실 안에서 집기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제야 남종현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
본래 9월 출시를 목표했던 스카이 팟은 예정보다 40일이나 늦어진 10월 중순에 출시되었다. 이유는 제품 설명회 다음날, 전 세계 동시 출시를 계획했기 때문이었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미리 해외로 적정량의 스카이 팟을 옮겨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타타다우 전자를 인수하면서 해외 공장들을 비롯해 많은 생산시설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전세계 동시 출시는 요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혁신을 말하는 동양의 작은 기업 SKY - BBC]
[작은 땅에서 혁신을 외치다 - CNN]
[세상은 지금 IT=SKY로 통한다 - 뉴욕타임즈]
잘 만들어진 시계태엽처럼, 모든 것의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니 순풍에 돛 단 듯, SKY전자의 스카이팟은 순항하고 있었다.
“회장님! 스카이 팟의 영업이익뿐 아니라, 음원사이트의 음원다운로드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박입니다!”
하여간 ‘돈을 번다’라는 생각만 떠오르면 강기태는 신이 나는 모양이다. 잔뜩 격양된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본이 빵빵해진다는 소리군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SKY항공우주개발을 설립하는 과정에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다. SKY가 타타다우를 인수하지 않았다면 쌩 돈을 다른 기업에 가져다 바쳐야 했을지도 모를만큼.
당장 생산시설을 짓는 데만 해도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으며, 미국의 많은 군수기업들에서 파견 나온 인물들의 인건비는 물론이고 기본 생활도 보장해줘야 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전과 휴대폰 실무진들 회의 소집하세요.”
비서가 고개를 숙이고는 바깥으로 나가고, 나는 찰리박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제법 우리 ‘전자’도 덩치가 커질 겁니다.”
“이미 업계 3위의 타타다우를 가지고 있으니 작은 덩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죠, 하지만 1위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죠.”
강기태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찰리 박은 대한민국에서 오래 살지 않아 공감하지 못하는 모양.
“으음··· 그렇군요.”
“우리 SKY가 가전과 휴대폰 사업에도 빠르게 진출해 해외 인지도를 넓힌다면, 삼현전자는 마음이 급해질 겁니다.”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강기태가 요사스럽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오, 이번에는 삼현전자입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 제 62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