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0화. >
다시 표정을 수습한 할아버지가 샴페인을 가져온 여인과 나를 번갈아쳐다보며 묻는다.
“내가 아는 그 록펠러?”
“네.”
“하, 뉴욕에서 상류층 파티에 간다더니··· 그런 연을 맺고 왔구나.”
“어쩌다 보니까요.”
대수롭지않게 얘기했다.
지금 록펠러와 내가 어떤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보다는, 왜 손녀를 보냈는가가 내겐 더 중요했다.
‘혼맥?’
정말 록펠러가 나와 혼맥을 맺고 싶어서 저 아름다운 여인을 보냈을까? 부잣집 규수라고 보기엔 어려운 소탈한 모습. 속세에 때타지 않은 순수함.
편견이라면 편견이고, 색안경이라면 색안경이지만 내가 아는 재벌가 딸들은 내 앞에서 얌전히 웃고 있는 이 여자와는 좀 많이 달랐다.
선민의식 그런걸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뱀심이라면 뱀심이라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내 속에서 툭 튀어나왔다.
“선물은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네, 당신이 우진이죠?”
내게 포옹을 해 오는 여인.
나는 단호하가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말했다.
“아, 미안해요 아직 서양식 예절은 익숙하지 않아서.”
약간의 당황도 보이지 않고,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제가 실례를 했네요. 저는 록펠러 가문의 루이지나에요, 루시라고 불러줘요.”
“고마워요 루시, 여기 계신 멋진 노신사는 나의 할아버지 혁수 천.”
“반갑습니다. 록펠러가문의 루이지나입니다.”
교양있는 인사에 어쩐지 할아버지는 사랑스러운 손녀딸을 바라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래요, 이런 귀한 선물이라니 조부께 꼭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주세요.”
“아닙니다. 조부께서 인생의 재미를 알려준 우진을 키운 천가의 혁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말씀을 전하셨어요.”
할아버지도, 그리고 루시도.
언뜻 들으면 영국의 귀족 출신들이 말 할법한 영어를 내뱉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저런 모습도 있구나 하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아, 루시.”
“네.”
“우리가 오늘 그랜드캐니언에 ‘캠핑’을 가려고 해요, 괜찮다면 함께 하겠어요? 그곳의 야경을 보며 마시는 샴페인도 제법, 로맨틱하지 않을까요?”
“와.”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할아버지가 혀에 버터를 바르신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말 달콤하게 속삭이신다. 이제야 할아버지가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많은 여인들을 만나고 다니셨다는 얘기가 실감되었다.
루시라는 록펠러의 손녀도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 천가와, 록펠러가의 손녀가 함께 떠나는 여행이 얼떨결에 성사되었다.
***
타닥, 타닥.
모닥불 소리는 언제나 옳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고민과 걱정따위는 잊어버리게 만드는 어떤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전 삶.
시간만 된다면 난 항상 홀로 캠핑을 떠나곤 했다. 답답한 도시와 일상을 벗어나는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힐링이었고 재충전의 시간이 되었으니까.
“와아, 할아버님이 정말 대단하세요.”
“그러게요, 저도 몰랐던 모습이네요.”
“정말 내가 들은 할아버님의 연세가 맞는거죠?”
“나도 의심중입니다.”
할아버지는 어마어마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캠퍼’였다. 과거 홀로 캠핑을 즐겼던 나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만큼. 흡사 베어 그릴스의 노인버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빠르고 정확했다.
다사다난 했을 할아버지의 과거가 보이는 것 같았다. 미리 준비해 왔는지, 모닥불 위에 평평한 돌판을 올리는 할아버지.
“설마.”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는 루시.
“왜요? 우진은 저게 뭔지 아는 건가요?”
“일종의 팬이죠, 고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아하! 친환경 팬이군요!”
어느새 돌판 위에는 삼겹살이 올라갔다.
“루시, 한식을 알아요?”
할아버지 질문에 고개를 젓는 루시.
“이번 기회에 한식을 맛 봐요, 이건 한국식 바베큐 요리입니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
저러다 목이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닐까 싶은 순수한 얼굴로 고소하게 익어가는 삼겹살에 집중하는 모습이 퍽 귀엽다.
돌판은 정말 컸다. 최소 80kg이상의 무게는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사실 모닥불이라고 얘기했지만, 모닥불도 이미 캠프파이어 사이즈를 넘어서고 있었다.
건장한 할아버지와 정호석의 작품이었다.
적당히 돼지 기름이 돌판위에 스며들고, 할아버지가 씨익 웃으며 비장의 무기를 꺼내듯 정호석에게 받아 든 것은 놀랍게도 ‘파김치’였다.
“끝났네.”
절로 나온 목소리에 정호석과 백철웅도 해맑게 웃는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모두가 ‘일’에서 벗어나는 힐링 시간이었다.
잘 구워진 삼겹살에 파김치 하나를 돌돌 말아 로메인 상추위에 올린 할아버지가 약간의 고추장을 첨가해 루시를 부른다.
“루시, 조금 매울 수 있는데 괜찮겠어요?”
“도전해볼게요.”
뭔가 큰 결심이라도 하듯 말하는 루시를 사랑스럽게 바라본 할아버지가 정성스레 싼 한 쌈을 루시의 입안 가득 넣어주었다.
오물오물 그것을 씹던 루시가 이내 두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와락 할아버지를 안았다.
“최고의 음식이에요!”
호탕하게 웃으며 루시의 등을 토닥인 할아버지가 또 다른 한 쌈을 싸더니 내게 손짓했다. 피식 웃으며 할아버지가 싸주신 쌈을 받아 먹었다.
쌍 엄지를 들어 할아버지에게 보여주니, 루시가 어색한 동작으로 날 따라서 할아버지에게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식사자리에는 웃음 꽃이 피었다.
루시가 어색한 손놀림으로 내게 ‘쌈’싸는 법을 배우는 동안, 할아버지의 손은 쉴새없이 움직여 정호석과 백철웅도 어느새 쌈을 씹고 있었다.
“이 놈들아!”
주변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직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여기에 올 놈들 없으니까 얼른 불판 앞으로 붙어!”
할아버지의 큰 목소리에 직원들은 정호석과 백철웅의 눈치를 살핀다. 정호석이 고개를 끄덕이고 백철웅은 오라고 손짓했다.
어째서 저렇게 커다란 불판과, 모닥불이 필요했는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
지이잉~ 따라랑~
도대체 할아버지는 못하시는 게 없었다. 어느새 통기타를 매고 옛날 한국 노래를 부르신다.
나 같은 세대는 이해하지 못할 어떤 ‘한’같은 것이 담긴 그 음악에 루시는 발그레한 얼굴로 내 어깨에 몸을 기대어 왔다.
“우진.”
“네, 루시.”
“당신의 할아버지는 정말··· 낭만적이에요.”
“그런가요?”
“많은 여자들이 눈물로 지새웠겠어요.”
“하하, 바람둥이란 얘기인가요?”
“저런 매력적인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여자는 없을테니까요.”
“그렇군요.”
노래에 심취해 있던 루시가, 할아버지의 노래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할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한국에서 온 젊은 인재가 세계를 움직이는 대단한 사내가 될 것이라고.”
“록펠러씨가요? 과한 칭찬이군요.”
“제게 그 남자를 만나보고 오라고 하셨어요,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좋은 경험이 되었나요?”
“네, 또 보고싶을 만큼.”
루시가 고개를 올려 날 바라보았다.
날 올려다 보는 루시의 눈을 차마 마주보기 어려웠다.
“당신, 여자를 사랑한 순간이 없는 남자군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록펠러 양, 세상은 당신의 생각보다 살기 좋은 곳은 아니랍니다.”
“어쩐지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나이에 맞지 않게.”
“그랬나요?”
“그럼 당신이 만들 세상은 어떤가요?”
철학적인 질문이 날아 왔다.
“적어도 내 사람들 만큼은 살기 좋은 세상이겠죠.”
“오, 그러면 당신의 사람이 되어야겠군요? 살기 좋은 세상에 살고 싶다면.”
***
아쉽다는 듯 손을 흔들며 헬기에 오르는 루시.
나는 그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밝게 웃으며 그녀를 배웅했다.
거센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날아가는 헬기.
할아버지가 헬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손주 며느리가 생긴다면, 꼭 저런 아이였으면 좋겠구나 때 묻지 않고, 날 불편하게 여기지도 않는 저런 순수함이 지난 날들을 정화시켜주는 느낌이야.”
할아버지에게 제법 후한 점수를 얻은 모양.
“그런가요.”
짝!
내 등을 후려친 할아버지.
“이 놈, 연애는 내가 아니라 네 놈이 해야겠구나··· 너무 함몰되지 말거라, 그것이 무엇이든지 삶이 먼저가 아니겠더냐?”
***
며칠간의 캠핑이 끝나고 다시 돌아온 L.A
할아버지는 호텔에서 편하게 휴식을 취하시고, 나는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다시 한 번 래리와 세르게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리셉션 산드라는 날 보자마자 웃으며 물었다.
“괴물 방으로 가실거죠?”
“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래리, 세르게이, 철수는 지난번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색으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쯧쯧, 먹고 하자고.”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그들이 우르르 내게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나와 정호석에 손에 들린 피자와 치킨등의 음식을 향해.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그들에게 물었다.
“어땠어? 우리 SKY SOFT가 만드는 운영체제는.”
철수가 급하게 치킨을 삼키고는 엄지를 척 들어올리며 정겨운 사투리로 말했다.
“고마 죽이삡니다!”
래리와 세르게이도 비슷한 뉘앙스로 말했다.
“확실히··· 나와 세르게이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후우··· 천의 SKY는 다르긴 다르더군요.”
“SKY SOFT에서 제작한 그 운영체제가 새롭게 출시할 MP3에 적용될 것이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후, 스마트폰 시장에 핵심이 될 운영체제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는 사실 여기 내 앞에 있는 래리와 세르게이의 것이다. 내가 시기적으로 조금 더 빨리 SOFT의 실무진들에게 터트렸을 뿐.
창의력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실력만큼은 대한민국의 프로그래머들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한다.
적어도 우리 회사의 인재들은 그렇다.
“MP3의 이미지도 정말 죽이더군요, 게다가 그런 디스플레이라니···”
“오 맙소사 래리, 그게 전부가 아니야 홈페이지에서 직접 다운로드 해서 바로 음원파일을 기기에 넣을 수 있다잖아? 이건 정말 MP3의 혁명이나 다름 없다고!”
“확실히···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손쉽게 MP3를 사용할 수 있긴 하겠지.”
어느새 둘만의 대화로 우리 SKY전자가 출시할 스카이팟에 대한 비전을 마구 밝혀낸다.
“그래서, 결정들은 했어? 우리 SKY와 함께 할지, 아니면 독자적인 ‘구골’이 될지.”
“······”
“······”
아직도 고민할 것이 많은가보다.
역시 미래에 시총 1위가 될 기업의 창시자들은 만만치 않다 싶었다.
“스카이 팟을 보면 무엇이 떠올라? 디자인은 확인 했지?”
마주보며 말하는 래리와 세르게이.
“좋던데?”
“맞아, 나도 확실히 좋게 봤죠.”
“아니,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 기기가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 같아? 고작 MP3하나를 위해서 운영체제까지 만들었을까?”
래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흐음, PDA시장도 노리고 있는건가? 나아가서 랩탑 시장도?”
아니, 겨우 저정도가 아니었다.
“컴퓨터는 어디까지 작아질 수 있을까?”
철수가 충격적인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맙소사!”
어리둥절한 표정의 세르게이.
이어서 래리가 들고 있던 피자를 툭 떨어뜨린다.
“왜? 뭔데? 나도 좀 알자고! 이 망할 천재 자식들아!”
철수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노트북에 휴대전화 기능을 탑재하고, 그 사이즈가 작아진다고 생각해봐요 세르게이···”
몇번 눈을 꿈뻑이던 세르게이가 ‘아아!’ 하며 아무것도 없는 천정을 올려다본다.
“MP3··· 스카이 팟은 시작에 불과 해.”
래리의 혼잣말.
“아쉽게도 내가 미국에 있어야 할 시간이 다 됐어 친구들, 천천히 고민해보라고 우리 SKY와 함께 하는게 구골에 도움이 될지, 아닐지를.”
천정을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내게 보내는 세르게이가 말했다.
“도대체 우진··· 당신은···”
“우선 출자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고, 자금이 필요하면 SKY인베스트먼트 미국지사에 요청을 해, 정식으로 ‘대출’을 해줄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래리.
“아! 그리고 그때 철수가 가져왔던 아이디어를 변형했던 것.”
“아 가제를 ‘스몰 홈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 그거, 빠르게 선 보여도 좋을거야, 그럼 고생들 하라고.”
철수의 어깨를 몇 번 두들겨 주고, 멍하니 생각에 잠긴 래리와 세르게이에게 대충 인사하고는 미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 했다.
< 제 60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