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8화. >
록펠러.
미국의 명문가로 이름이 드높았다. 전 삶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가 전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자연히 지대하다. 그의 이름값이 절대 작지 않으니까.
그런 인물이 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알까? 지금 내가 더 흥미롭게 그를 쳐다보고 있음을.
“반갑습니다. 한국의 SKY그룹의 회장 천우진이라고 합니다.”
웃으면서 내 손을 마주 잡는다.
“얘기는 많이 들었소, 작금의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인물이라고? 내 수익률을 떨어뜨린 사람이 이렇게 젊은 인재인지는 또 몰랐군.”
자신의 수익률을 떨어트리고 있다란 말.
저 말은 대한민국 혹은, 아시아 경제위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마수를 뻗쳤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전혀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내가 고개 숙이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어쩐지 이 핏속에 흐르는 차가운 반골의 혈액은 넙죽 고개 숙이기를 거부한다.
“한국의 부를 한국인이 가져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당당한 내 언사에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은 록펠러를 소개한 삭스와 체이스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 록펠러는 히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내 손을 꽉 쥐고 흔들며 말했다.
“하하하하, 좋은 자신감입니다. 무릇 젊음은 그런 자신감이 있어야지!”
특이한 사람이다.
보통 처음 날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붉은색 연기를 피어 올렸다. 그러나 록펠러가 피워 올리는 연기는 노란색이다. 적대도, 우호적인 반응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
그가 먼저 손아귀의 힘을 풀기에 나도 풀었다.
“자, 앉아서 얘기합시다. 늙으면 발바닥이 약해.”
그를 따라 이동한 곳엔 고급 소파가 준비되어 있었다. 손수 샴페인을 따라 내게 잔을 건넨다.
“좋은 샴페인입니다. 특별히 체이스의 초대를 받아 사 왔지요.”
“잘 마시겠습니다.”
“하하하, 이보시게 체이스, 삭스! 천우진 회장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
록펠러의 질문에 삭스가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으로 답했다.
“어휴, 말도 마시오 우리한테는 악몽과 다름없는 순간이었으니.”
체이스가 피식 웃으며 거들었다.
“그때 있잖소? 노인네들이 모여서 우리에게 핀잔을 주었던.”
“아아아, 바트화?”
“그때 조금만 늦었어도 우리 손실이 컸을텐데 여기 미스터 천이 우리 사정을 좀 봐줬지.”
“호오, 빼어난 투자가란 얘기군··· 하긴 그러니까 한국시장에서의 우리 기대수익 중 30퍼센트를 날렸겠지.”
자리에 앉은 록펠러가 날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미스터 천. 오랜만에 즐겁게 해 줘서 고맙소.”
어떤 의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노란색 연기만 보일 뿐이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록펠러가 보내는 눈빛에 보이는 ‘흥미’
“우리의 예상이 빗나가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거든요, 역시 예정대로만 진행되는 것은 재미가 없소, 안 그렇습니까 친구들?”
체이스와 삭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하, 젊은 인재는 우리의 말이 어려운가 보오.”
어깨를 으쓱이며 록펠러에게 말했다.
“아뇨, 이해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돈 버는 재미가 없어지신 모양이군요? 그런 찰나에 아주 ‘신선한’ 라이벌이 등장했고요?”
“크하하하하하하.”
록펠러가 파안대소를 하고, 체이스와 삭스도 피식 웃었다.
“우리 록펠러가 ‘라이벌’입니까?”
“아직 친구는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얼마 만에 이렇게 웃어보는지 모르겠군···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어!”
삭스가 꽤 놀라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오, 록펠러씨가 정말 오랜만에 밝게 웃는군요? 덩달아 내 기분도 좋아집니다.”
확실히 록펠러가 가져왔다는 샴페인은 맛이 좋았다.
“오, 샴페인이 맛이 좋네요, 어디서 구입할 수 있죠? 우리 할아버지가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록펠러가 입을 앞으로 모으며 ‘오!’하고는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를 챙기는 마음이라니, 특별히 샴페인은 내가 선물로 보내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미스터 천.”
“네.”
내 속을 낱낱이 살펴보겠다는 눈으로 말하는 록펠러.
“미국에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효도와 관광이 주목적은 아니겠지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니 고개를 주억거리는 록펠러.
“사업이군요?”
“사업가니, 사업을 해야죠.”
“얼마 전 기자회견은 보았습니다. 무기 사업에 뛰어드신다지요?”
제법 한국 시장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미 알고 있다니 숨길 필요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의 인가가 필요한겁니까?”
“인가라··· 글쎄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미국이 불허할 명분이 있습니까?”
“호오, 원론적인 얘기군요. 당신의 정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고요?”
록펠러의 말에 속으로 혀를 찼다.
짧은 고민 이후, 록펠러에게 말했다.
“내 자금이 한국 시장에 투자되는 것 보다, 한국 시장에서 새로운 사업에 투자되는 것이 록펠러씨에게는 더 도움이 되는 상황이 아닐까요?”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록펠러가 다시 부드럽게 입가에 호선을 띄운다. 현재 내가 가진 자금을 한국시장의 기존 사업 테두리에 투자한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록펠러의 ‘경쟁자’가 될 테다. 분명 미국은 한국시장에 많은 투자를 감행하고 있으니까.
실제로 곧 있으면 미국의 ‘공매도’세력이 한국에 진출할 테다.
그러나, 그 전에 내가 가진 달러 모두가 기존의 한국 시장에 투입된다면 그들이 얻어갈 이익의 파이가 줄어든다.
그러니, 새 사업을 만들고 그곳에 내 달러가 투자된다면, 한국 시장의 이득을 노리는 세력이 감당해야 할 ‘변수’가 줄어든다는 얘기다.
“하하, 맞는 말이군요··· 확실히, 그럼 이 록펠러가 SKY가 시작할 한국형 군수기업을 응원해야 하는 겁니까?”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굳이 돕지는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미국 정부에 받아야 할 빚이 있어서요.”
“나에게 원하는 것이 없다? 하하하하.”
눈치가 할아버지 못지않은 록펠러.
“SKY의 자금이 한국 시장에 더 깊이 뿌리를 내딛기 전에 다른 쪽으로 돌릴려면 확실히··· 뭐가 이익일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체이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자자, 여기 파티장인데 너무 일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즐깁시다.”
삭스도 체이스를 거들었다.
“좋지, 홀덤이나 한 판 어떻습니까? 심심한 노인네들끼리 ‘내기’라도 한 판 하는 것이?”
록펠러가 내게 물었다.
“우리 한국의 젊은 인재는 홀덤을 좀 하나요?”
“자신이 없네요.”
“아! 규칙은 간단한 게임입니다.”
“질 자신이.”
체이스도, 삭스도, 록펠러도 제법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다 이내 가소롭다는 얼굴로 변했다.
“파하하하하,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어! 거기! 여기 카드좀 가져와! 칩도 세팅하고.”
삭스가 넌지시 말했다.
“미스터 천, 이 노인네들은 프로 포커 플레이들도 잡아먹는 괴물들일세, 조심하는게 좋아.”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글쎄요, 난 확실히 질 자신이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홀덤이라는 포커 게임에서 질 자신이 없다.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면, 결코 날 이길 수 없을 테다.
내 말에 체이스도 삭스도 록펠러도 더욱더 진득한 흥미를 표현했다.
“설마 시시하게 그냥 돈이나 걸린 홀덤 판은 아닌것 같고, 뭘로 하는 내기입니까?”
이어진 내 질문에 록펠러가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말했다.
“흐음, 소원 들어주기 어떻소?”
체이스와 삭스,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파티장 한 켠에서 4명의 홀덤 판은 시작되었다.
***
각종 유흥과 홀덤 게임을 비롯, 체이스의 저택에서 며칠은 정말 편안했다.
미국 상류층의 문화도 접할 수 있었고 크게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친목 도모와 미국 상류층들과의 교류를 부탁하려 했었는데, 부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니, 금상첨화라 할 만했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워싱턴으로 날아와 날 기다리던 외교관을 만났다.
“반갑습니다. 천우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김윤식 차관입니다.”
외교부 차관이 직접 날아왔다.
그만큼 미국을 대접하는 처사라고 볼 수 있었다.
“약속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 이동하시죠?”
“그러죠.”
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식당도, 호텔도 아닌 평범한 가정집으로 보였다. 물론, 평범한 가정집이라고 했지만 규모나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운 것으로 봤을 때, 제법 돈을 들인 장소 같았다.
“이곳은 미국 측에서 제공해 준 미팅장소입니다. 아마도 정보기관의 안가가 아닐까 싶네요.”
“흠, 보안 때문인 모양이네요.”
“우리 정부에서는 북측과 외교 문제로 공개적인 이야기는 꺼리는 편입니다. 천 회장님도 이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러죠.”
보아하니, 미국 역시 북한과 한국의 외교 문제 때문에 굳이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과 북한의 외교는 공산당과 민주주주의의 대립이라 할 만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포장은 제법이지만 쉽게 얘기하면, 중국 러시아 VS 미국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한국의 첨단 무기 산업, 아무래도 북한은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 이해했습니다.”
외교부 차관의 잔소리에 싫증이 날 무렵, 마침 문을 열고 경호원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들어와 우리의 몸을 수색했다. ‘죄송합니다. 절차상 문제이니 협조를 바랍니다.’라는 예의 바른 말도 했기에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경호원들이 나가고, 이어서 미국인 셋이 들어왔다.
미 국방성 차관, 외교부 차관, 그리고 내게는 익숙한 CIA한국지부장윌리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 짐작했다. 이번 얘기는 아주 쉽게 풀려 갈 것이라고.
“SKY그룹이 한국에서 군수기업을 설립할 것이라는 얘기가 맞습니까?”
미 국방성 차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우리의 국방을 지키는 동맹관계인 미국에도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우리 정부는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차관의 말에 국방성 차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흠, 확실히 그렇게 된다면 한국 정부도, 우리도 국방비 부담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겠군요.”
대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제 분위기는 이 자리를 파할 것으로 보였다.
내가 굳이 한국 정부의 요청을 들어준 이유, 굳이 미국인들과 외교적 만남에 참여한 이유.
“부탁이 있습니다.”
장내의 모두가 날 바라보았다.
“록히드마틴사와 자리를 마련해주시길 부탁드리고 싶군요.”
미국인들의 얼굴과 김윤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CIA한국 지부장 윌리는 정보부의 일원답게 제법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다.
“쯧, 천우진 회장이 굳이 이곳에 왔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요?”
“그 밖에 미국의 방산업체들과의 자리도 마련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윌리가 탕! 테이블을 내려쳤다.
“천우진 회장! 그것은 과합니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의 지난날 약속을 잊었습니까?”
외교부 차관 김윤식, 미 국방성 차관, 미 외교부 차관도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짓는다. 윌리는 입술을 씹는다. 그날의 약속이 이렇게 돌아오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분명, 누군가의 메신져 역할을 하던 윌리는 작년, 내가 삼현과 카이그룹을 놓고 신경전을 펼치던 때, 254억 달러라는 내 자산이 한국시장에 투자되기를 꺼렸고, IMF와의 협정 이후에 자금을 투자 해달라 요청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윌리를 메신져로 부렸던 그 치들에게 세 번의 양보를 얻어냈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이 과연 그 세 번의 양보에 포함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며칠 전 록펠러에게 얘기했던 것처럼, 그들 입장에서도 내 자금이 새로운 사업에 투자되는 것이 좋으면 좋았지 싫지는 않을 터.
자신들이 먹을 파이가 늘어 날 테니까.
“자리만 만들어주면 되는 겁니까?”
“적극 협조도 건의해주시죠, 여기까지 이루어진다면, 지난날의 약속은 사라집니다.”
윌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도대체 그들에게 뭘 요구할 셈입니까?”
“위탁생산.”
“뭣?”
< 제 58화. > 끝